2022년 10월 18일 저녁 6시 30분.
늘 그렇듯 정신없는 회사 생활 후 녹초가 된 몸을 싣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
‘으, 으으으으…. 또 시작이여….'
숙취에 고통받는 사람마냥 극심한 두통과 메슥거림이 시작됐다. 20대에는 왕복 4시간의 출퇴근길에서 자기소개서 첨삭도 해주고 독일어 공부도 했었는데,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차멀미를 하다니.
매일 3시간씩, 그것도 6개월이나 탔으면 이제는 익숙해질 때가 되었건만. 컨디션이 좋지 못한 날에는 어김없이 차멀미를 했고 그날 또한 그러했다.
차멀미를 견뎌내기 위해 잠을 자기로 결정, 머리를 창문에 기댔다. 덜덜덜덜덜 진동에 골이 울린다. 최대한 버텨보려 했지만 참아낼 재간이 없다. 창문에서 떼어낸 머리를 앞으로 푹 숙이고 다시 잠을 청했다.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신명 나는 헤드뱅잉이 시작됐고, 그와 동시에 나는 정신을 잃고 쪽잠에 빠졌다.
버스 노선이 반쯤 지났을까, 이번에는 목덜미가 너무 아프다. 덕분에 잠이 깨버렸다. 뜨이지 않는 눈을 잠깐 끔뻑이고 목덜미를 주물렀다. 정신은 없지만 차멀미는 그대로였다. 아니, 더 최악이다. 깨질듯한 머리와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속에, 이제는 다 말라버린 뻑뻑한 눈과 뻣뻣하게 굳어버린 목까지 추가다.
중간에 버스를 내려 잠시 쉬었다가 환승해서 다시 타는 방법도 있겠지만 버스가 시골로 들어온 지 오래였다. 낮에도 '외지고 낯선 곳'이라는 공포감이 있는 시골인데, 이미 밤하늘에 어둠도 짙게 깔려 더 무섭다. 심지어 '외지고 낯선 곳'에서는 똑같은 버스 텀도 더 길게 느껴진다.
'그깟 멀미가 뭐가 대수라고. 멀미 좀 진정시키려고 무작정 버스에서 내린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
'그 무서운 곳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다음 버스는 어떻게 기다릴 건데?'
'너 그러다가 괴한한테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
콩만 한 내 간과 파김치가 된 심신은 전정기관과 위장에게 '매사에 그렇듯 이번에도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고 떠들어댔다.
버텨내야 한다. 앉은 자리 그대로 흐물흐물 늘어져 눈을 감았다. 차멀미를 하며 혼미한 중에도 머리는 팽팽 돌아간다. 원래도 염세적이던 머리가 피곤하기까지 하니 더더욱 부정적인 생각들만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현재 내 상황. 나이는 33살이나 처먹고 중소기업 계약직 신세. 계약기간 11개월 중 절반 정도 지난 상태. 나보다 5살이나 어린데 유능하기까지 한 팀장님을 모시고 있음. 마침, 낮에 팀장님께 한 소리 들음.
타닥, 타닥, 타다다다닥….
작은 사무실을 채우는 단 하나의 키보드 소리. 사무실 내에서 단 하나의 키보드 소리가 난다면, 여기저기 SNS를 돌아다니며 한창 참가자를 모집하고 있어야 할 내 키보드에서 나야 하는 소리이다.
하지만 내 키보드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다. 나는 방금도 홍보차 들어간 한 오픈 채팅방에서 강퇴당하고 또 멘탈이 터져 스스로를 달래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구 제발….'
모니터 뒤에 숨어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참고 있는데, 일순 키보드 소리가 멈췄고 팀장님이 입을 열었다.
“무지렁 씨 지금 뭐 해요?”
간담이 서늘해졌다. 커다란 덩치가 가려지지도 않는 모니터 뒤에 웅크린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동공이 확장되고 심장이 쿵쿵쿵쿵쿵 뛰기 시작했다. 멍때리고 있던 머리가 다른 의미로 새하얘졌다. 마치 차에 치이는 순간 몸이 굳어버린 고라니새끼 마냥.
침착해야 한다. 나는 웅크린 자세 그대로 맺힌 눈물을 소매에 살짝 찍어낸 후 목만 살짝 뽑아 올렸다. 낮은 모니터 위로 눈만 내놓고 팀장님과 눈을 맞췄다.
“… 프로그램 홍보 중입니다.”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간신히 대답하고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다. 팀장님이 말을 이었다.
“무지렁 씨. 벌써 당신 계약 기간의 절반이나 지났네요. 세월 빠르다. 그쵸?”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숨겨야 한다. 억지로 입꼬리를 당기고 모니터 뒤에 숨어서 대답했다.
“… 그… 러네요오.”
“그런데 무지렁 씨 과업 중에 메인 프로그램 참가 모집을 채 10%도 못 채웠네요?”
“….”
말문이 막혔다. 팀장님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사무실 안에 또다시 무거운 정적이 깔렸다. 빠르고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도저히 당장 생각이 나질 않는다. 새하얘진 머리를 열심히 쥐어짜 본다. 할 수 있는 홍보는 다 해봤거나 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생각해 둔 다른 홍보 방안이 하나 더 있긴 했다. 하기 싫어 재껴 놔서 그렇지. 한참의 정적이 흐른 후, 버리려던 카드를 어쩔 수 없이 꺼내어 보였다.
“… 카페랑 제 개인 SNS에도 올리는 등 더 노력하겠습니다.”
"하아."
팀장님이 한숨을 쉬고 고개를 두어 번 저은 후 입을 열었다.
“무지렁이 씨, 무지렁 씨 나이에 그 연봉 낮은 거 알죠? 일도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은데. 무지렁 씨가 미워서 그러는 건 아니고 진지하게 다른 일 알아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결국 들어버렸다. 업무를 잘하지 못한다는 말을 돌려 하는 그 말.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다양한 아르바이트와 사회 경험에서 너무 자주 들은 그 말.
"무지렁 씨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요."
나이에 비해 연봉이 낮은 점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경력 10년차일 나이에 나는 여전히 신입이자 11개월짜리 계약직이니까. 그래도 이번 업무는 반은 적성에 맞는 일인 줄 알았는데. 나머지 반은 노력으로 메꾸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많이 늦었지만 괜찮다'고, '이제라도 커리어를 쌓아나가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일도 아니라니. 발밑이 또 한 번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무슨 일을 해야 제 몫을 할 수 있는 거지? 내 인생,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