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통장 잔액 약 200만 원.
지금부터의 행동 규칙은 단 두 가지.
첫 번째 규칙 : 최대한 후회가 남지 않는 삶을 살 것.
두 번째 규칙 : 통장 잔액이 0원이 되는 순간 미련 없이 떠날 것.
It's showtime!! 마지막으로 억만장자처럼 펑펑 써보고 죽는 거야!!
현실의 나는 프로그램 홍보를 위해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을 전전하고 있지만 머릿속의 나는 이미 부자다. 아니, 용돈을 200만 원이나 받은 부잣집 따님이다. 속으로 손을 비비며 생각했다.
'자, 뭐부터 돈을 써보지?‘
막상 돈을 쓰려고 봤더니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하고 싶었던 일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하나도 기억나질 않는다. 순간 당황했지만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자, 하나씩 질의응답을 해보자. 하다 보면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겠지.
첫 번째 질문. 하고 싶은 일이 뭐가 있었지? 이제는 없지? 그러면 갖고 싶은 물건은? 없음. 좋아하는 음식은? 기억 안 남. 아는 게 없다. 아는 게 없으니, 질문도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다. 쓸모도 없더니 아는 것도 없다.
'정말 폐급이잖아….'
짧고 굵게, 조금만 더 살고 가기로 했다. 그걸 위해 규칙을 만들어 스스로에게 유예를 줬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질 않는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했는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었는지, 옷 취향조차도. 200만 원 안에서 최대한 야무지게 살다 가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원하는 것이 없으니,돈을 쓸 수도 없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더니. 의미 없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 사고 싶은 것들을 고민하다가 뜬금없이 웹소설 공모전이 생각났다. 나의 흑역사,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자신 킬러라고 말하며 떠들고 다녔던 킬러 조직 이야기와 함께.
며칠을 망설였다. 접수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자니 참을 수 없이 부끄럽다. 게다가 나는 글도 전혀 쓸 줄 모르고 웹소설도 모르는데 무려 웹소설 공모전이라고?
게으름의 화신이라 터치 한 번이면 무조건 선물을 받을 수 있을 때조차 귀찮아서 누르지 않는 내가, 심지어 끈기도 없어서 뭐 하나 꾸준히 해본 적도 없는 내가, 이제는 아무도 나한테 관심도 없는데 꼴에 혼자서 아직도 '하면 잘하는 애' 타이틀을 쥐고 놓지 못하는 내가, 그런 내가 시간도 얼마나 걸릴지 감도 안 잡히는 데 절대 수상도 못 할 일을 위해 부끄러움까지 참아가며 노력한다?
예전의 나였으면 절대 시작도 하지 않았을 선택지이다. 그때 문득 다짐이 떠올랐다. 아, 나 금방 죽을 거지. 관점이 바뀌자, 질문이 바뀌었다.
'이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지 않고 죽어도 괜찮을까?'
질문이 쉬워지니 답도 쉽게 나왔다. '생각났으니 이대로 죽기에는 당연히 아쉽다'고 말이다. 한 번 더 자문했다. '그렇다면 이걸 쓰면 죽고 나서도 부끄러울까?' 고개가 가로 저어지며 결정이 났다.
죽을 때가 되면 생전에 했던 부끄러운 일들은 무의미해진다(범죄는 제외다). 대신, 살아생전 다 못한 일들이 아쉬워질 뿐이지.
그래, 곧 죽을 사람은 흑역사가 부끄럽지 않다.
가장 먼저 공모전 요강을 다시 봤다. 5천 자 이상 원고 1화분에 작품 기획서만 적으면 된다고 한다. 5천 자라는 글자 수에 대한 감은 없지만 1화만 쓰면 된다니. 할만할 것 같다. 계속해서 읽어 내려가다가 유의 사항에서 눈이 멈췄다.
높은 수위의 노출과 폭력 묘사는 지양하고, 다음과 같은 작품은 심사에서 제외됨.
가. 19금 성인물
나. ….
내가 구상했던 이야기에서 실존 인물이라고까지 말하며 주력했던 캐릭터는 호색한이다. 그런데 19금은 안 된다고? 또 한 번 고민에 빠졌다. 역시 포기해야 할까. 그때 홍보를 위해 들어가 있던 웹소설 작가 오픈 채팅방이 생각났다. 물어보자. 후닥닥 타이핑을 치고 마음 바뀌기 전에 전송.
"안녕하세요. OOO 웹소설 공모전에 지원해 보려고 하는데요. 혹시 XXX 정도의 19금 표현은 가능한가요?“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물어보다니.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행동부터가 겁이 나고 무섭다. 거기다가 질문한다고? 차라리 '안 된다'고 말이라도 해주면 다행이지. 대답을 못 들으면? 애써 용기 냈는데 대답도 듣지 못한다면?
하지만 심사 대상 여부가 불확실한 노력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보다는 질문 한 번으로 확실시하는 편이 훨씬 낫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모임장님의 짧은 답변이 돌아왔다.
"그 정도는 가능합니다."
그 주 주말, 컴퓨터를 쓰기 위해 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 컴퓨터는 하루 3시간까지 이용할 수 있고 나는 공모전 마감까지 3일을 올 수 있다. 공모전을 위해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은 최대 9시간.
공모전 제출 양식을 다운로드했다가 깜짝 놀랐다. 그냥 신청서랑 전체 줄거리랑 1화 분량 정도만 적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기획서에는 적으라는 것도 너무 많은 데다가 뜻 모를 용어들이 난무했다. 장르, 로그 라인, 기획 의도, 등장인물,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 내용을 채워 넣기 전에 용어부터 난관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로그 라인과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는 그 말이 저 말 같고 저 말이 그 말 같다. 심지어 트리트먼트라는 용어는 헤어 제품 트리트먼트가 연상돼 글자를 보고 있으면 입안에 트리트먼트 맛만 날 뿐이다. 그나마 아는 용어들도 문제다. 뭐라고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 장르라는 용어는 아는데 내가 쓰려는 글의 장르는 모르겠다. 일단 추리소설로 적어두고 기획 의도도 일단 패스. 그나마 등장인물은 작성 완료다.
장르와 등장인물 부분을 제외하고는 단 한 자도 쓰지 못했는데 벌써 2시간 정도가 지났다. 시간이 없다. 이대로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가야 것 같다. 급한 대로 작품 기획서는 미뤄두고 일단 원고부터 쓰기로 노선을 변경했다.
그렇게 첫째 날의 남은 한 시간 동안 2천 자 정도를 쓰고 둘째 날에는 세 시간 동안 고작 1천 자를 더 써서 3천 자를 채웠다.
'5천 자라는 거. 생각보다 분량이 많잖아?'
역시 어떤 일이건 직접 해보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며 첫 주말, 이틀이 흘렀다.
다음 주말이자 공모전 제출 마감일. 남은 시간은 3시간. 원고도 2천 자나 써야 하는 데다가 거의 비어 있는 작품 기획서도 이제는 완성해야 한다.
원고를 먼저 써야 하나 양식을 먼저 채워야 하나 고민하다 역시 하던 것을 먼저 마무리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 남은 3시간 중 2시간을 투자해 간신히 원고 1화분을 완성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단 1시간. 1시간 안에 작품 기획서를 채우고 제출까지 완료해야 한다. 바로 양식의 빈 부분 중 첫 부분인 로그 라인으로 커서를 옮겼다가 손가락이 멈췄다.
'그… 고생했는데 딱 5분만 쉬었다가 할까?‘
리프레시를 위해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강렬한 햇빛에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가 시야가 밝아졌다. 어두운 터널 끝에서 맞이한 환한 세상의 시작이었다.
'내가 뭐라도 해보다니! 게다가 완성까지 하다니!'
비록 1화를 작성한 것뿐이지만 업무가 아닌 일을 시도하고 완성까지 했다는 흥분감에 전율이 흘렀다. 축하도 받고 싶다. 홍보를 위해 들어가 있던 웹소설 작가 오픈 채팅방에 글을 썼다.
'저 방금 1화 다 썼어요! 이제 양식 채워서 접수하면 되는데요. 장르가 뭔지 로그 라인이랑 시놉시스 그리고 트리트먼트가 뭔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네요. ㅠㅠ'
전송 시간을 보니 딱 5분이 지났다. 제한 시간 55분. 시간이 없다. 일단 해보자.
작품 기획서의 남은 부분은 로그 라인과 기획 의도, 시놉시스 그리고 트리트먼트. 다시 한번 인터넷 검색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보고 또 봐도 형식과 분량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같은 말 같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내가 이해한 대로 전체 스토리에 대한 트리트먼트, 시놉시스, 로그 라인 순으로 점점 분량을 압착해서 채워가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은 3분, 이제 남은 부분은 기획 의도뿐이다. '기획 의도라….' 잠시 고민하다 역시 기획 의도라면 문제와 문제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판단, 평소 갖고 있던 사회 문제와 결부시켜 작성하다 시간이 1분밖에 남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어쩔 수 없이 파일을 내 메일로 전송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의 다 왔어. 나머지는 집에서 하면 돼.'
켜지는 데에만 한세월, 나의 타이핑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컴퓨터 사양. 한숨 한 번 푹 쉬고 타이핑을 시작하려던 그때, 채팅 알림이 왔다. 모임장님이셨다.
'괜찮으시면 한 번 봐드려도 될까요?'
웹소설 작가 겸 강의도 하시는 분께서 첨삭을 해주신다니.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재빨리 기획 의도를 채워 전송했다. 급한 일이라 그런지 금방 회신해 주셨다.
'글은 잘 쓰셨네요. 장르는 추리가 아니고 '킬러물'입니다. 제목은 심플하게 정정해 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킬러다] 같은 거로요.'
무슨 그런 오글거리는 제목을 쓰란 말인가. 제목은 안되겠고, 장르를 정정하기 위해 양식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써놓은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트럼프 카드가 어쩌고 체크메이트가 어쩌고] 미쳤다. 이게 더 부끄럽다. 이거는 죽어서도 수치스러울 것 같다. 모임장님의 말씀대로 장르는 킬러물로, 제목은 [나는 킬러다]로 정정한 후 메일을 보냈다. 마감 1분 전이었다.
끝났다. 공모전 접수는 했다. 이제 와서 19금을 포기하지 못한 점이 살짝 후회됐다. 정말 열심히 썼는데 그 부분 때문에 심사에서 제외된다면 너무 속상할 것 같다. 모임장님께서는 이 정도 19금 표현은 괜찮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나는 안 될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 주사위는 굴러갔고 나는 내일의 출근을 위해 눈을 붙여야 한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아무리 눈을 꼭 감고 있어도 잠이 오질 않는다. 잠시 눈을 떠보니 이미 새벽 2시다. 오늘도 6시 20분에 일어나야 하는데 잠이 오질 않는다. 뭔가 하나를 해냈다는 성취감인지 저질러 버렸다는 생각인지 심장이 세차게 뛰는 탓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