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해 보면 가능성이라도 생긴다

by 무우지렁이

시기가 문제일까, 욕심이 문제일까. 길고 길었던 숲해설가 수업이 끝나도록 구직이 되지 않고 있다. 구직급여도 벌써 절반이나 지났다.


'내가 너무 범위를 작게 잡았었나?'


불안해졌다. 이번 구직은 여태까지와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하고 있다. '후회 없는 삶을 살 것'이라는 목표 의식이 있기 때문이고 구직급여라는 보험 덕분이었다.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구하지 않을 것이다. 돈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구할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창업이건 경영이건 여튼 컨설팅을 하고 싶었다. '대신 공부해서 남을 돕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진 지 오래다. 고생해서 딴 경영지도사 자격증을 제대로 써먹어 보지도 못하고 죽으면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뿐이다.


여태 창업 및 경영 컨설팅은 오랜 경력과 노하우가 있으신 분들만 하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없는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년에 면접을 다녀보니 20대 중후반의 창업 보육매니저들도 창업 및 경영 컨설팅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보다 나이도, 경력도 적으신 분들도 컨설팅을 한다는데 무려 경영지도사까지 딴 내가 못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역시 가장 관심도 있고 기존에 하던 업무인 창업 지원 및 컨설팅 관련으로 부산 전역에서 일을 알아보고 있다. 하지만 작년에 거의 모든 창업 지원기관에 서류를 넣었던 탓일까. 구직이 쉽지 않다. 구직급여 기간도 절반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구직 중인 6월 말, 슬슬 구직을 포기할까 생각했다.


'더럽고, 치사해서 내가 창업하고 말지!'




생각만 거창하지 역시 콩알만한 간의 소유자인 나는 실행에 옮길 수 없다.


'업종은 뭐로 하려구?'


그렇게도 염원하던 경영지도사업을 하자니 전문직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나라에서 해주는 창업 지원은 해당이 없고 처음부터 모든 것들을 다 잘 해야 할 것 같다. 역시 자신이 없다.


'그럼, 경영컨설팅 말고 창업지원 대상 업종 중에 하고 싶은 일이 뭐가 있지?'


아직은 경영 컨설팅을 제외하고는 하고 싶은 일이 없다. 하긴, 돈도 안 쓰고 반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33년이나 모르고 살던,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낼 수 있을 리는 없지.


'내 관심사가 뭘까?'


관심사를 찾아보려 하니 자연스럽게 서평으로 생각이 옮겨갔다. 이제는 어느 정도 레퍼런스가 쌓였다. 단시간 내에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던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5월부터 한 대형서점의 스타 블로거가 되어 있기도 했다.


'그래, 여태 했던 서평 분류를 보면 알 수 있겠지.'


그렇게 여태 서평 했던 도서들의 카테고리를 분류 및 분석했다. 하지만 관심사를 특정할 수는 없었다. 너무 중구난방 퍼져있는 데다가 치우친 것도 없어 종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주력 관심사가 뭐지?'


주력 관심사를 알 수 없으니, 창업도 할 수 없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돈을 벌려면 취직하거나 하다못해 창업이라도 해야 한다. 취직이 안 되니 그나마 자의지만 있으면 시작이라도 가능한 창업 쪽도 생각을 해봐야 한다.


'좋아. 그럼 뒤집어서 내가 줄 수 있는 가치가 뭐가 있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치가 뭐가 있을까?'


이 부분도 모르겠다. 다만 요 근래 나의 몇몇 경험들이 다른 사람들의 우울 관리에도 조금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일종의 노하우는 생겼는데 이론적 기반이 없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옆 동의 행정복지센터에서 우울 예방의 일환으로 캘리그래피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홍보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우울 예방, 배우는 것, 표현하는 것. 모두 나의 관심사에 부합한다. 수업 일시를 보니 평일 낮 수업이지만 당장 취업이 될 것 같지도 않다. 더군다나 수업에 수료증 같은 개념도 없어 중간에 그만두더라도 아까울 일도 없다.


'취업 전까지만 다녀볼까?'


관심이 생겼다. 수강 신청을 하려고 포스터를 조금 더 자세히 보다가 대상 요건에서 걸렸다.


'수강 대상 : XX동 거주, 만 34세 이상 65세 미만 여성'


XX동이 아니라 옆 동에 거주한다. 나이도 한 살 차이로 수강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캘리도 배워보고 싶고 무엇보다 정신건강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다.




원래의 나였다면 그냥 포기했을 것이다. 전화하는 것부터가 무서운데 심지어 당연히 안 될 요구를 해봐야 하니까 거절당한다는 공포까지 추가다. 하지만 공모전과 이벤트, 체험단 신청 경험으로 이제는 안다. '해보고 안 되면 말지 뭐.'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도하지 않으면 확률은 0%지만 시도하는 순간 1%의 확률이라도 생긴다. 용기를 내야 한다.


전화하는 것은 돈이 드는 일도 아니고 금방 끝난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눈 딱 감고 한 번만 해보자. 전화로 문의할 스크립트를 만들고 전화번호도 눌렀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용기를 내면 된다. 심호흡 한 번 하고 숨 딱 참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친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고 스크립트를 읽었다.


"안녕하세요. 캘리그래피 수업 홍보 포스터 보고 전화드렸는데요. 혹시 XX동 거주하고 만 33세인데 저도 수업 신청 가능할까요?"


또르르르르.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는 나의 할 일을 다 했다. 나는 질문했고 이제 바톤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1분 같은 1초가 흐르고 상대방이 대답했다.


"아, 아시다시피 저희가 XX동 주민들을 위한 수업이다 보니 다른 동네 분들은 조금 힘드실 것 같네요."


수화기 너머에서 조금은 곤란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부정적인 대답에 그럼 그렇지. 포기하려던 그때, 상대방이 말을 이었다.


"지금도 신청자가 많긴 한데요. 바로 옆 동이시니 혹시 모집 다 해보고 자리 비면 연락드려볼게요."


됐다! 가능성이라는 티켓이라도 얻었다. 그걸로 되었다. 비록 당장 참여가 가능하다는 답변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만족한다. 안 될 것 같은 것이라도 원하는 것을 물어볼 수는 있게 되었고, 가능성이라는 수확도 생겼다. 그렇게 한 뼘 더 성장했다.




며칠 후,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전에 캘리그래피 수업 문의하셨던 무지렁 님 맞으시지요? 수업 기간이 8주로 좀 긴데 다 나오실 수 있어요?"


순간 여태 구직이 안 됐는데 설마 8주 안에 구직이 되겠나 싶어 그렇다고 대답했다.


"좋아요. 다음 주 수요일부터 수업 시작인데요, 10시까지 XX동 행정복지센터 4층 대회의실로 오세요."


그렇게 나는 캘리그래피와 연을 맺었다. 담당 공무원 선생님은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한 분이셨는데, 같이 수업을 들으시는 분들도 모두 달콤한 솜사탕 같으신 분들이셨다. 덕분에 어딘가 뻣뻣하고 어색한 나도 편하게 수업을 들을 수 있다.




'흐아아아.‘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드디어 숨을 쉬었다.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됐다는 기쁨보다는 구직에 대한 불안감이 한층 강화되었다. 내 입으로 8주간의 수업을 다 나갈 수 있다고 말하면서 내 귀로 들은 것이다. '나는 최소 8주간 취업이 되지 못할 사람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구직을 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지난 두어 달 동안 관심이 가는 업무들만 고집부려봤고 안 되는 것을 알았다. 이제라도 빠른 취업을 위해 구직 기준을 완화하기로 했다.


경영 컨설팅 외에 하고 싶은 다른 일을 찾는 것부터가 아직은 더 많은 시간과 경험 필요한 것 같다. 게다가 찾더라도 바로 돈벌이가 가능한 상태로 만들 수 있을 리는 없다.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지금은 꿈보다는 먹고사는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꿈도 먹고는 살아야 꿀 수 있다. 돈이 있어야 먹고살고, 꿈도 꿀 수 있다.


근무지가 편도 1시간 이내의 거리에 위치하고 구인 자격요건에 부합하는 일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기만 하면 전부 이력서를 제출했다. 사무직은 물론이고 건물과 해변 청소까지 닥치는 대로 지원했다. 단기 아르바이트의 경우에는 부산 전역에 이력서를 뿌려댔다.


그런데 정말 단 한 군데도 연락이 오질 않는다. 이대로는 곤란하다. 뭐라도 해봐야 한다. 그런데 뭘 어떻게 더 해야 할지 모르겠다. '딴에 최선을 다한다고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 뭘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걸까.' 생각하고 있는데 불현듯 공장 취직은 대부분 전화로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래, 진짜 급하고 절박하다면 전화 지원도 해봐야지! 뭘 고고하게 서류만 제출해 두고 연락을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전화 지원은 물론이고 전화 문의가 가능한 곳들은 전화를 돌렸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역부족인 모양이다. 여전히 수확이 없다. 전화를 해보면 역시 이미 구인이 완료되었다는 답변이 대부분이고, 나이와 혼인 여부 등의 이유로 퇴짜를 맞기도 했다. 나보다 능력 있고 열정적인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여전히 한 군데도 연락이 오질 않는다. 그렇게 캘리 수업에 참여하며 말했던 것처럼 무려 8주간의 캘리 수업이 끝날 때까지도 나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그래도 캘리그라피 수업을 통해 일주일에 한 번씩 좋은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을 수 있는 시간 덕에 조금은 덜 우울한 시간을 보냈다. 시도해 보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소중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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