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이 바람 될 때

죽음의 문턱에서 삶에 대한 영감을 선사하는 책

by 지만

폴 칼라니티는 평생을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에 바쳤다.

어려서는 궁금증을 <죽음과 철학>을 비롯한 문학으로 해소했고,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며 탐구를 계속한다. 하지만 "도덕적 명상은 도덕적 행동보다 못하다"라고 느낀 그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을 체험하기 위해 의학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의사 중에서도 어려운 도덕적 딜레마를 매 순간 맞닥뜨리는 신경의가 되고, 의사 겸 과학자로 지평을 넓힌다.

삶과 죽음에 대한 탐구란, 칼라니티의 "자아의 신화"라고 볼 수 있다(<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그의 운명은 그가 자아의 신화를 이루도록 안내한다. 그리고 그 길은 "말기 암"을 수반한다. 칼라니티는 암 환자가 되어 죽음을 직면하며 의사로서도 가늠할 수 없던 깨달음을 얻고,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경험을 공유한다.


칼라니티가 끝내 통찰한 죽음이란 무엇일까?

그는 제목이기도 한 아름다운 비유를 통해 죽음을 표현한다.

"숨결이 바람 될 때
(When breath becomes air)"

"숨결"과 "바람"의 병치는 두 개념이 양극단에 위치한 듯한 착각을 준다. 숨결은 살아있는 것(biotic), 바람(혹은 공기)은 살아있지 않은 것(abiotic). 따라서 독자는 숨을 거둔 사람의 폐에서 마지막으로 내뱉은 숨이 퍼져나가 바람이 되는 모습, 즉 죽음으로서 사람이 자연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이 상상은 "죽음"이라는 키워드에 갇혀있다. 사람이 죽을 때 내뱉는 숨만 바람이 될까? 사람이 살아가는 매 순간 들이쉬고 내쉬는 공기는 흘러가 바람이 된다. 숨결과 바람은 죽음을 기점으로 순환되는 것보다 더 자주, 삶의 매 순간 교차한다.

따라서,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죽음보다 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죽음은 그저 삶의 마지막 순간, "숨결이 마지막으로 바람 될 때"이다. 이 비유 속 "삶과 죽음"은 분리된 두 범주가 아니며, 죽음은 삶의 하위 개념이다.

죽음이 삶의 한 순간이라는 칼라니티의 깨달음은 다음 문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수년을 죽음과 함께 보낸 후 나는 편안한 죽음이 반드시 최고의 죽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아기를 갖기로 한 결정을 양가에 알리고, 가족의 축복을 받았다. 우리는 죽어가는 대신 계속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삶과 죽음은 종종 분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치되는 개념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죽음도 삶의 일부이기에 우리는 죽음을 위해 특별한 마음가짐을 가질 필요 없이, 삶을 대하던 자세 그대로 죽음까지 나아가면 된다. 죽음을 앞두고 아내와의 관계를 재정비하고, 새 생명을 탄생시키고, 신경 수술을 수행하고, 작가라는 꿈까지 이룬 칼라니티처럼.


이처럼 칼라니티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계속 살아가라"라고 답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할까?

바로, "굴복하지 않는 태도"로 살아가야 한다. 칼라니티는 "말기 암 환자"로서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다. 나아가, 그는 삶과 죽음의 진리를 파헤치려는 "순례자"로서 "진리의 불완전성"에 굴복하지 않는다(<순례자>, 파울로 코엘료).

진리의 불완전성이란, 진리를 완전히 깨우치는 행위의 불가능을 의미한다. 이는 다음 문장에서 이해하기 쉽게 정리된다.

“결국 우리 각자는 커다란 그림의 일부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의사가 한 조각, 환자가 다른 조각, 기술자가 세 번째, 경제학자가 네 번째, 진주를 캐는 잠수부가 다섯 번째, 알코올 중독자가 여섯 번째, 유선방송 기사가 일곱 번째, 목양업자가 여덟 번째, 인도의 거지가 아홉 번째, 목사가 열 번째 조각을 보는 것이다. 인류의 지식은 한 사람 안에 담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맺는 관계와 세상과 맺는 관계에서 생성되며,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궁극적인 진리는 이 모든 지식 위 어딘가에 있다.”

평생 삶과 죽음을 밀접하게 탐구한 칼라니티지만, 그도 삶과 죽음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애초에 진리를 깨우친다는 것은 이상적인 허구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에 칼라니티는 좌절하는 대신, 진리에 대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우리 환자의 삶과 정체성은 우리 손에 달렸을지 몰라도, 늘 승리하는 건 죽음이다. 설혹 당신이 완벽하더라도 세상은 그렇지 않다. 이에 대처하는 비법은 상황이 불리하여 패배가 확실하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의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환자를 위해 끝까지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거리가 한없이 0에 가까워지는 점근선처럼 우리가 완벽을 향해 끝없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있다.”

이 인용구에서 삶과 죽음은 이상과 현실의 극단적인 비유가 된다. 칼라니티가 환자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환자를 위해 끝까지 싸운 것처럼, 추구하는 바가 현실에서 도달될 수 없음을 인지하더라도 끝까지 이상(理想)으로 나아가는 것에 의미가 있다. 그렇기에 칼라니티는 죽음을 앞두고도 살아가고, 진리가 완성되지 않을 것임에도 진리를 찾는 여정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모든 사람이 칼라니티처럼 진리를 깨우치고 싶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괴리와 모순이 가득한 현실을 살아간다. 따라서 우리 모두 칼라니티의 "굴복하지 않는 태도"를 배울 수 있다.


굴복하지 않는 태도란, 핑계가 없다는 의미다. 칼라니티에게는 말기 암마저 핑계가 되지 못한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I can’t go on. I’ll go on.)"

"Won't"와 "can't"의 차이는 상황에 대한 주어의 주도권에 있다. 암은 칼라니티의 손 밖의 일이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나아갈 수 없다(I can't go on). 하지만 의지는 그의 것이므로, 나아가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다(I will go on). 위 문장은 언뜻 보면 모순적이다. 문법이라는 질서 속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에, 두 단어(can't와 will)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마치 도플갱어의 조우와도 같은 이질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두 단어의 공존은 (놀랍게도) 문장을 두 가지 형태로 적음으로서 해결된다. 나를 제한하는 운명과 나의 의지는 두 문장처럼 별개인 것이다.

칼라니티가 보여주듯, 내 영향 밖의 요소는 어찌할 수 없더라도 나의 의지를 바꾸는 것만으로 삶에 충분한 변화를 꾀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핑계에 숨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칼라니티는 이 책을 통해 모든 "숨 쉬는 이들"에게 영감을 준다. 숨결이 바람 되는 매 순간, 열정을 가지고 살라고. 우리의 계획을 흐트러트리는 장애물을 맞닥뜨려도 계속 숨 쉬며 살아가다 보면, 배움과 의미가 있을 거라고. 그렇게 굴복하지 않는 삶은, 마지막으로 숨결이 바람 될 순간에 아쉬움은 느낄지언정 후회는 적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