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비극적 영웅, 영웅, 혹은 한 사람

by 지만

많은 독자들이 <스토너>를 읽는 것을 괴로워한다. 윌리엄 스토너의 인생은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스토너의 선택은 많은 순간 틀렸다고 느껴지고, 그 파장은 끝까지 그의 발을 묶는다. 오죽하면 스토너는 죽기 전,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하며, 우정, 사랑, 일 모두 놓친 듯한 자신을 비관한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서 독자들의 마음에 자리 잡는 것은, 스토너에 대한 연민이 아닌 존경심이다. "인생"이라는 여정을 성공적으로 완주한 영웅, 한 "사람"을 향한 경의의 마음이다.


비극적 영웅

음울함에도 선망하고 싶은 스토너의 삶. 그런 그를 현대판 "비극적 영웅"이라 볼 수 있을까?

"비극적 영웅" 인물 전형에는 대표적으로 오이디푸스와 햄릿이 있다. 두 인물 모두 영웅적인 특출남을 가졌지만, 치명적인 약점(hamartia)으로 인해 몰락의 길에 들어선다. 고대 비극적 영웅의 약점은 대부분 hubris, 신 혹은 운명에 대한 오만함이다.

스토너 역시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고집"이다. 그는 완고한 신념으로 1차 대전 징병을 거부하고, 곧 영문과 학과장이 될 홀리스 로맥스의 애제자 찰스 워커의 학문 기만을 묵인하지 않는다. 그 결과, 스토너는 성실하게 경력을 쌓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조교수 이상 진급하지 못한다.

그의 약점 역시 오만함(hubris)이라고 볼 수 있다. 고대 비극적 영웅은 신의 권력을 얕보며 운명이 자기 손에 달렸다고 믿고 행동한다. 스토너는 대다수가 택하는 성공의 길을 외면함으로써 사회 통념이라는 거대한 신을 거역한다.

비극적 영웅의 아킬레스건을 갖춘 스토너이지만, 그의 약점이 시사하는 바는 다르다. 비극적 영웅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오만하지 말자"라는 교훈을 준다. 하지만 <스토너>의 독자는 스토너를 경각심을 주는 악례(惡例)로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토너의 신념이 의미 있었다고 느껴진다.

그 이유는, 참회의 순간(anagnorisis)이 다른 모습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비극적 영웅은 스스로의 오만으로 인해 몰락하게 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한다(예를 들어, 스스로의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를 보라). 스토너 역시 죽음을 코앞에 두고 참회를 시작하며, 신념으로 인해 사회적 성공을 거두지 못한 자신을 책망한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다음 질문을 세 번 거치며 변화한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스토너는 남들이 보기에 우정, 사랑, 일 모두 놓친 인생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떳떳한 삶을 살았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마음속 목소리가 안내하는 선택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토너는 문학, 딸 그레이스, 연인 캐서린, 친구 데이비드 매스터스와 고든 핀치, 그리고 자신의 삶을 향한 그의 사랑을 함축적으로 상징하는 그의 "책"을 손에 들고, 마음 편히 눈을 감는다.

스토너는 비극적인 삶을 통해 경각심을 깨워주기보다, 오히려 신념을 지키는 태도를 통해 영감을 선사한다.


전형적 영웅

스토너의 인생이 암울할지언정 비극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그는 비극적 영웅의 자격이 없다. 그렇다면 스토너를 전형적인 "영웅"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영웅" 인물 전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사가 영웅의 여정(Hero's journey) 형식으로 진행되는지의 여부이다. 스토너의 인생은 그 궤적을 대부분 따라간다.

image.png 영웅의 여정 도표. 출처: https://coachingleaders.co.uk

1. Call to adventure (모험의 부름)

스토너에게 부름은, 2학년 때 수강한 아처 슬론 교수의 영문학개론 수업에서 찾아온다. 슬론 교수는 스토너에게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의 의미를 묻고, 스토너는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날 이후, 스토너는 기존에 전공하던 농과대학의 커리큘럼을 저버리고 영문학의 길로 들어선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 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300년 전 셰익스피어가 저작한 소네트로부터 스토너는 문학도로서의 부름을 받는다.


2. Refusal of the call (모험 거절)

스토너는 학부를 졸업할 때까지 부모님께 학업의 변화를 알리지 않으며 새로운 세계로의 도약을 외면한다.


3. Meeting with the mentor (멘토와의 만남)

스토너의 멘토 슬론 교수는 스토너가 변화를 직면하도록 돕는다.

"아직도 자신을 모르겠어?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일세... (중략)
이건 사랑일세, 스토너 군.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아주 간단한 이유지."

슬론 교수는 석사와 강사 겸 박사과정을 스토너에 제안하며 그가 문학인의 길에 발을 내딛는데 도움을 준다. 무엇보다, 슬론 교수는 스토너에 사랑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슬론 교수는 스토너가 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게 그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하며, 앞으로 스토너가 결정을 내릴 때 스스로의 마음을 따를 수 있도록 안내한다.


4. Crossing the threshold(새로운 세상으로의 도약)

스토너는 학자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공간적 배경은 계속 미주리 대학으로 바뀌지 않지만, 공간에 대한 스토너의 인식이 변화한다.

"이제는 캠퍼스가 회색 풍경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캠퍼스가 그의 시선을 밖으로, 위로 이끌어 하늘을 향하게 했다.
그는 아직 이름을 알 수 없는 가능성을 바라보듯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슬론 교수의 표현을 빌려, 기존에 "폐쇄된 공간"으로 느껴지던 학교가 더 넓은 "세상"으로 변모한 것이다.


5. Tests, allies, and enemies(관문, 동료, 그리고 적)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과정과 강사를 겸하게 된 스토너는 여러 관문과, 동료와, 적을 맞닥트린다.

강사가 된 스토너는 가르치는 일이 생각처럼 되지 않음을 발견하지만, 결국 점차 교수로서의 명망을 쌓아간다.

이디스와의 결혼도 사랑의 부재와 스토너를 향한 이디스의 원망으로 인해 어긋나지만, 스토너는 딸 그레이스와의 관계를 돈독히 다진다.

스토너는 1차 대전에 참전하지 않으며 승진 기회를 저버리지만, 그와는 별개로 학자로서 최선을 다하며 책을 출판한다.

그 과정 속 데이비드 매스터스와 고든 핀치라는 동료를 만났다가 잃기도 하고, 아처 슬론이라는 멘토를 잃고, 홀리스 로맥스라는 적을 만난다.


6. Approaching the challenge (도전)

순탄하지만은 않은 스토너의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은, 찰스 워커의 등장에서 나타난다.

"스토너는 자신이 미처 대처할 수단을 생각해 낼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대담한 허장성세에 직면했음을 깨달았다."

찰스 워커는 스토너의 세미나에서 진지하게 임하지 않으며 스토너의 학자로서의 자신감을 타격한다.


7. The ordeal (시련)

홀리스 로맥스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는 찰스 워커는 스토너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스토너와 홀리스 로맥스는 찰스 워커의 박사 과정 구두시험을 맡게 되고, 그의 적합성을 놓고 대립한다. 로맥스 교수는 상식을 벗어난 선에서까지 찰스 워커를 보호하려고 하고, 스토너가 끝까지 냉담한 태도로 찰스 워커를 불합격시키자 그에게 앙심을 품는다.


8. The reward (보상)

더 큰 권력을 손에 쥔 로맥스가 결국 싸움을 이기지만, 어쨌든 스토너에게 보상이 찾아온다. 바로, 캐서린 드리스콜과의 사랑이다.

"나이 마흔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

아내 이디스와 주고받지 못한 사랑의 감정을 스토너는 뒤늦게 캐서린과 나눈다.


9. The road back (돌아오는 길)

로맥스의 복수로 인해 스토너와 캐서린과의 관계도 빠르게 막을 내린다.


10. Resurrection (부활)

캐서린과 헤어진 스토너는 오랜 기간 병에 걸린다. [상징적 죽음]

병에서 깨어난 스토너는 마치 다른 사람으로 부활한 듯 매사에 초연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새내기 수업만 배당해 주는 로맥스에게 마음대로 커리큘럼을 바꾸며 복수에 성공한다. [상징적 부활]


11. Return with the elixir (보물을 들고 귀가)

스토너의 삶의 결말은 비극적 영웅의 것과도 달랐지만, 전형적 영웅의 것과도 결이 다르다. 어쨌든, 암이라는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막을 내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보물을 들고 생을 마감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 보물은 바로, 그의 책이다.

그가 죽기 직전 책을 발견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보물을 찾은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마치 돌더미 속 다이아를 캐내는 것처럼.

"협탁 위에 오랫동안 손도 대지 않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는 잠시 손으로 책들을 만지작거렸다. 가늘어진 손가락, 관절의 섬세한 움직임이 놀라웠다. 그 안의 힘이 느껴져서 그는 탁자 위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책 더미에서 손가락으로 책 한 권을 뽑아냈다. 그가 찾고 있던 그 자신의 책이었다. 손에 그 책을 쥔 그는 오랫동안 색이 바래고 닳은 친숙한 빨간색 표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앞서 [비극적 영웅]으로서의 분석에서는 이 책의 상징을, 모든 것에 대한 스토너의 "사랑"으로 해석했다. 나아가, 그 책은 스토너 그 자신을 상징한다.

"흐릿하게 바랜 그 활자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될 것이라는 환상은 없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작은 일부가 정말로 그 안에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책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 책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장을 펄럭펄럭 넘기며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책장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스토너가 죽음과 동시에, 그의 책은 살아난다. 스토너가 뿌린 사랑의 씨앗은 뿌리를 내려 새로운 생명을 키울 것이다.

문학에 대한 스토너의 사랑은, 학술서의 형태로 남아 영문학도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조교수로서 최선을 다한 애정의 시간은, 적지 않은 학생들에게 영감을 선사했을 것이다.

캐서린과 함께한 사랑의 시간은, 그녀가 앞으로 사랑하고 문학을 공부하는데 힘이 될 것이다(캐서린의 책은 William Stoner의 약자인 "W.S. 에게" 헌정되었다).

딸 그레이스에게 헌신한 사랑은, 비록 삶이 무너진 그녀이지만 다시 힘을 내는데 자양분이 될 것이다.

이처럼 스토너의 인생은, "사랑"이라는 보물을 결국 찾아 수확한 영웅의 일생이다.


한 사람

필자는 스토너의 인생을 "비극적 영웅"보다는 "영웅"으로 해석하고 싶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풍기는 암울한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다. 영웅담의 통쾌함보다는 현실의 찝찝함이 가득하다. 따라서 이번에는 스토너를 그저 "한 사람"으로 바라보겠다.

이 소설에 현실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우는 이유는 작가 윌리엄스가 스토너의 인생을 미화하지 않고, 그가 내린 선택의 기회비용에 조명을 비추기 때문이다.

집 농사를 돕는 대신 학자의 삶을 택했을 때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진 어머니의 얼굴,

참전을 하지 않은 스토너와 참전을 하여 승진하는 고든 핀치의 병치(juxtaposition),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디스와의 결혼 후에 펼쳐지는 이디스의 변모,

찰스 워커의 농간을 좌시하지 않자 찾아온 홀리스 로맥스의 복수,

캐서린과의 관계가 알려지자 학교에 퍼지는 추문,

그리고 이디스로부터 보호해주지 못하자 어른이 되자마자 출산을 하고 알코올 중독이 되어버린 그레이스까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그 선택이 최선이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 편이 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윌리엄스는 단호하게 스토너가 내린 선택이 불러온 부정적 파장에 집중하고,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짊어지지 않았을 짐을 눈앞에 펼친다.

스토너의 선택이 최선이었는지 최악이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스토너는 앞서 나열한 모든 기회비용을 짊어지는 대가로 자신만의 인생을 얻었다. 매 순간 사랑을 택함으로써, 끝내 스스로의 삶을 사랑하며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스토너의 삶을 비극적 영웅과 전형적 영웅의 틀에 끼워 맞추며 알 수 있는 것은, 그 틀이 유연하다는 것이다. 점토처럼,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틀은 자유롭게 형태를 바꾼다. 한 개인의 삶을 놓고 수만 가지 평가가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신념 아닐까?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스토너를 영문학의 길로 이끌었던 셰익스피어 소네트의 이 구절의 의미는 함축적이다. 사람이든 관심사이든, 그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순간적이다. 순간의 사랑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 끝날 우리의 삶 또한 더 잘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