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몽살구클럽

결코 작지 않은 우리들의 세상

by 지만

아이는 어른보다 작다. 그래서 아이의 고민은 어른의 것보다 작을 것만 같다. 하지만 고민의 크기는 각자 세상의 넓이에 비례한다. 아이의 세상에 떠오르는 태양을 고민이 온통 가리고 있다면, 빛이 들어올 수 없다.

<자몽살구클럽>의 소하, 태수, 유민, 그리고 보현이의 세상에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클럽 활동을 통해 서로의 하늘의 먹구름을 거두며, 살아갈 의지를 함께 다진다. "살구 싶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보현은 살구 싶다

보현이는 꿈의 자유 대신 현실의 책임을 짊어졌다. 암 투병 중인 어머니를 대신해 어린 동생을 돌보며, 영화감독 대신 공무원이라는 현실을 택해야 한다는 주변의 압박에 시달린다.

넌 나의 빛

보현이는 어머니와 동생에게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다. 함께 바다에 가자고, 토마토 계란볶음을 해 먹자고 약속한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이지만, 그녀의 투병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다고 느낀다. 동생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동생이 있기에 책임이 더 무겁다. 따라서 보현이에게 가족은 빛이지만, 동시에 비다.


태수는 살구 싶다

태수는 자몽살구클럽의 창시자다. 태수에게는 부모님의 기대가 너무 숨 막혔다. 학생회장으로서 써야 했던 바른 학생의 가면도 답답했을 것이다.

하루만 미뤄내 보는 다이빙
다친 맘을 고쳐낼 거야

태수는 다이빙(투신)을 미루기 위해 자몽살구클럽을 만든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피어나버린 꽃
손바닥 위 내려앉은 향에 긴장한 코
이름도 사는 곳도 모르는 나의 구원자
사이서 내가 감히 함께 외쳐봐도 될까요

서로가 서로의 구원자가 되어주기 위해서.

태수와 함께 자몽살구클럽의 주축이 되는 것은 유민이다. 태수와 유민은 사랑하는 한 쌍의 연인이다. 위 노랫말, "아무런 예고도 없이 피어나버린 꽃/손바닥 위 내려앉은 향에 긴장한 코"가 처음 태수와 유민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싹텄을 때의 설렘과 두려움을 묘사하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화자 소하가 처음 언니들을 만났을 때의 감정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유민은 살구 싶다

태수와 유민이가 힘들었던 이유는, 둘의 사랑을 우정의 이름 아래 감춰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민이는 태수와의 관계 이외의 아픔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만큼 유민의 세상에 태수와의 사랑은 큰 부분을 차지했다. 아마 유민이는 태수가 죽기 전부터 계속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죽어가던 그녀를 안았어요
걸터앉은 눈물은 외로웠죠
우 그래 내 잘못인 거죠
우 날 잡아가세요

노래 <용의자>의 화자를 유민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민은 "내 잘못인 거죠/날 잡아가세요"라며 "죽어가던 그녀", 태수의 아픔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전가한다. 좋은 집안에서 자라, 공부마저 잘하던 태수의 인생에 흠으로만 느껴지는 자신(유민)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유민은 "혼자인 그녀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이게 내 잘못일까요/웃기지 마세요/결국 그녀는 떠났죠/혼자였거든요"라고 태도를 바꾼다. 외롭던 태수를 옆에서 항상 지킨 것은 유민인데, 태수의 죽음의 책임을 유민에게 떠넘길 수 있을까.

둘의 사랑을 담기에 세상이 너무 좁았다.


소하는 살구 싶다

소하는 가정폭력 피해자다. 아버지는 주정뱅이에 취하면 폭언에 폭력을 휘두르고, 소하 앞에서 당당하게 여러 여자들과 불미한 관계를 이어간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견디지 못하고 소하가 어릴 적 집을 나가,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

괴로운 매일을 견디던 소하는, 자몽살구클럽에서 언니들을 만난 뒤 희망을 엿본다.

나의 신발을 서둘러 벗기며 괜찮냐고 물어봐 줬으면 좋겠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아무 말 없이 안아 줬으면 좋겠다. 그거라면 난 버틸 수 있다. 언니들은 나의 유일한 동아리 부원들이자, 구원자이자, 우리니까.

언니들이 아버지의 폭행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언니들의 존재만으로 소하는 버틸 이유를 찾는다.


자몽살구클럽

자몽살구클럽의 마법은 모두가 서로에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네 명의 소녀는 외줄 위에 손을 잡고 나란히 서 있다. 한 명이 떨어지면 그 반동에 모두가 휘청일 것이기에, 어느 한 명도 떨어지지 않으려 모두 한마음으로 고군분투한다.

난 널 버리지 않아
너도 같은 생각이지?
저 너머의 우리는
결코 우리가 될 수 없단다

저 너머의 우리, 죽고 나면 그들은 지금처럼 즐거운 추억을 함께 쌓아갈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의 최선은 서로가 서로를, 각자 스스로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각자의 앞에 닥친 현실은 서로의 존재만으로 가리기에 너무 크다. 깜깜한 서로의 세상에 촛불이 되었지만, 촛불은 시간이 지나면 바람, 비, 폭풍, 뭐든 한 번이면 꺼진다.

만약 우리가 서로에게서
영영 사라진대도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버텨 가야 한대도

결국 그들은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버텨 가야 한다".

외줄 위 아이들 중 태수가 가장 먼저 추락하고, 그 반동으로 유민, 소하, 보현이는 크게 휘청인다.

가장 태수와 각별했던 유민이는 음악을 통해 조금은 극복한 모습을 보인다.

어린 아픔 나의 사랑 이젠 안녕
어린 아픔 나의 사랑 이젠 안녕

하지만 소하에게는 희망의 불씨가 꺼진다.

기우는 새벽에 매달린 채 밝아온 천국
나와 상관없죠
가면 쓴 천사의 속삭임 내게는 한 번도
닿은 적 없으니

자몽살구클럽을 통해 천사는 태수, 유민, 보현 언니들의 모습으로 소하 앞에 나타나, 살 이유가 있는 세상을 속삭였다. 하지만 언니들과는 별개로 소하의 현실은 바뀌지 않았고, 결국 소하는 폭군을 직접 죽인다. 천사가 있었다면, 소하가 순교자가 되도록 지켜봤을까. 그래서 소하는 언니들로부터 엿본 희망을 아예 부정한다. 천사의 속삭임이 그녀에게 한 번도 닿은 적 없다면서.

언니들이 아무리 소하 편이라고 해도, 살인을 저지른 그녀까지 포용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 언니들이 그녀를 안아줘도, 아버지를 죽였다는 현실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소하는 길을 잃는다.

세계의 정답을
해석할 수 없는 나는
어디로 어디로 어디로

소하는 결론을 내린다. 그녀의 세상에서 구원자는 없다고.

모든 걸 버리고
홀로 도망쳐온 곳엔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

태수도, 소하도 외줄에서 떨어졌으니 자몽살구클럽은 실패한 걸까?

그렇지만은 않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 네가 서 있어
아무도 모를 추억 틈에 너와 내가 있어
기나긴 여름을 지나서 너에게
안기기 위해 오늘도 시간을 달리네

노래 <시간을 달리네>의 화자는 마치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자몽살구클럽을 회상하는 듯하다. 클럽 활동이 끝났더라도 추억은 남아있기에, 서로가 서로의 생존을 위해 온 힘을 바쳤던 당시 "우리"를 회상하며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 추억을 떠올린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중학생 소녀들의 생존 기간을 20일 연장한 것만으로, 자몽살구클럽은 성공이다.


아이의 세상

어른의 세상이 아이의 세상을 침범하고 옥죄일 때, 자몽살구클럽은 아이만의 세상이 되었다.

바다는 자신의 눈앞에 벌어지는 인간들의 삶을 기억한다.(중략) 바다는 세상의 모든 사건들을 저항 없이, 삭제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차츰 불어나고 있을 뿐이다. 보다 커다란 품을 만들어 갈 뿐이다. 바다는 우리와 함께 살아갈 것이고 이 사실은 때때로 쓰나미 같은 용기를 내게 선물해 줄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바다 같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보현 언니의 꿈을, 유민 언니와 태수 언니의 웃음을 지켜주는 사람. 더 이상 스스로를 익사시키지 않고 내일을 꿈꾸며 유영하는 어른.
하나 확실한 것은, 나의 바다는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의 바다는 언제나 이곳에.
우리의 바다는 언제나 이곳에.

바닷가에서는 견고하게 쌓인 모래성도 파도 한 번이면 흔적 없이 무너진다. 바다는 물속 깊이 숨어있는 어떤 보물이라도 밀물과 함께 가져다줄 것만 같다. 자몽살구클럽에서는 어른들이 마음대로 끼워 맞춘 세상이 잊혔다. 태수의 모범생 생활도, 보현이의 책임감 있는 누나의 모습도, 소하의 가정폭력 피해자 신세도. 그리고 그들이 진짜 원하는 모습을 가져다주었다. 태수와 유민이가 자유롭게 사랑하고, 보현이가 영화를 찍고, 소하가 사랑받으며 마음껏 부모님을 미워했다.

자몽살구클럽이라는 바다에서 아이들은 서로의 세상을 지켰다. 그럼으로써 미처 자라고 있지 못한 내면의 성장을 일궈냈다.

나는 우리를 닮은 씨앗들이 어른들에게 걸리지 않고 여름 공기를 마실 때까지 서 있기를 속으로 바랐다. 토마토들의 주인인 우리까지도.

옥상이라는 아지트에서 태수, 유민, 보현, 소하는 토마토를 닮은 빨갛고 땡글땡글한 꿈, 사랑, 서로를 키워냈다.

음반과 소설의 형태로 나타난 <자몽살구클럽>과 함께, 더 많은 아이들의 세상이 지켜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