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5. 브랜드 : 후지필름이라는 색
2018년 5월, 큰 덕통사고가 났다. 현장엔 후지필름 미러리스 X-Pro2와 XF35mmF2가 있었고 나는 사고의 여파로 필름이 끊겼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필름 카메라를 하나 둘 떠나보내는 중이었고, 이제는 필름을 쓸 일이 없다며 ‘필덕’ 친구들에게 쟁여 놓은 필름을 하나씩 선물했다. 일로 찍는 셔터 남발형 디지털 생활에 질려 필름 생활을 시작한 지 딱 2년 만의 일이었다.
반짝 유행에 휩쓸렸던 사람들이 다시 디지털 세상으로 떠난 뒤에도 내 곁에는 필름 카메라를 쓰는 친구가 몇몇 남아 있었다. 이유는 저마다 달랐다. 색감이나 질감 표현에 매료된 친구가 가장 많았지만 신중해진 셔터 덕에 느리게 흐르는 필름의 시간이나 미리 보기가 없는 탓에 결과물을 기대하게 되는 제약의 묘미에 빠진 친구도 있었다. 고성능 전자기기가 되어가는 디지털카메라에 지친 친구 중에는 필름 카메라가 주는 제약이 오히려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를 더 즐기게 만든다고 하는 이도 더러 있었다. 나는 대부분 이유에 찬성표를 던지는 입장이었지만 특히 한 장을 촬영하기까지 손이 많이 가는 촬영 감각과 필름의 색감 표현에 빠져 있었다.
수동 필름 카메라는 촬영에 있어 사진가에게 모든 역할을 일임한다. 사진 한 장을 찍으려면 카메라에 원하는 필름을 장착한 뒤 촬영 대상과 구도를 결정하고 와인더로 필름을 감아 노출과 초점을 원하는 방향으로 조절해 셔터를 누른다. 디지털도 마찬가지지만 이 일련의 행위 중 몇 가지는 카메라에 슬쩍 떠밀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카메라가 더 그럴듯하게 역할을 수행한다. 사진가가 빛을 읽지 못해도 뷰파인더나 LCD 모니터를 통해 카메라가 읽어주는 빛으로 촬영 가능한가 하면 AI의 발전으로 셔터만 누르면 알아서 움직이는 피사체를 추적하는 상황이 된 지는 꽤 되었으니. 때문에 디지털로 사진을 시작해 업이 되면서 매년 TB 단위로 사진을 쌓아가던 나는 카메라에 대부분 역할을 맡겨왔다. 나보다 카메라를 더 믿었으니까.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면서는 사진 찍는 방법과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내가 셔터를 누르기까지 이토록 신중한 사람이었나 놀라는 일이 연속됐고 촬영 단계에서 완전에 가까운 한 장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는 필름의 색감과 질감 표현에 만족한 덕이 컸다. 디지털 생활에서는 촬영 시간과 비례하게 혹은 그 이상, 편집에 공을 들였다. 처음부터 후보정으로 색과 톤을 표현하는 습관을 들였더니 RAW 파일만 믿고 촬영이 소홀해졌고, 어느 순간 이게 내가 마주했던 장면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다고 날 것 그대로의 결과물을 내놓자니 어쩐지 민낯을 들키는 기분. 필름 생활 초창기에도 마치 후보정을 하듯 원하는 색과 톤을 찾기 위해 필름을 꽤 많이 소비했지만 2년 여가 흐르니 촬영 빈도가 잦은 장면마다 사용하면 좋은 필름이 리스트업 됐다. 그렇게 촬영 단계에서 어느 정도 색과 톤의 표현을 예상하고 촬영해 이후 과정을 현상소에 일임하는 루틴에 커다란 해방감을 느꼈다(이쯤 되면 그냥 디지털 생활이 싫었던 걸로 하자).
다시 덕통사고 현장. 그러니까 내가 디지털 세상으로 회귀하게 된 사건 말이다. 뉴트로 열차를 타고 필름이 유행처럼 번질 때였다. 일본 출장 때 헐값에 산 필름 카메라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좋아하길 잠시, 필름 가격과 현상 가격이 차례로 상승했다. 셔터는 더 신중해지고 아예 사진을 찍는 횟수가 줄었다. 어느 날 필름 시절부터 사진을 시작해 디지털 생활자가 된 선배가 물었다. “사람들은 왜 필름 카메라를 쓸까?” 괄호 열고 최신 기술을 다루는 디지털카메라매거진에서 일하는 너 말이야 너 괄호 닫고. 내가 한참 뒤에야 꺼낸 답은 “셔터 남발병이랑 라이트룸, 이 둘과 안전이별을 했어요.”였다. 선배는 대뜸 첫 회사를 퇴사하며 전리품처럼 장만했던 후지필름 X70의 행방을 물었다. 왜 그걸 디지털에서는 못 하냐는 뜻이었다. 선배는 필름 시뮬레이션과 몇 가지 기능을 활용하면 한 장을 만드는 재미에 라이트룸은 켜지도 않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당시는 X70을 필름 여행의 안전자산 같은 용도로만 썼다. 보장된 결과물이 필요한 어떤 순간에 말이다. 기본 세팅은 자동 모드에 클래식 크롬. 이유는 단순했다. 전반적으로 채도가 높지 않은 톤, 특히 하늘색 표현이 좋았다. 그럼에도 섀도는 톤이 은근히 강한 편이라 전반적으로 플랫하지 않고 입체감이 어느 정도 살았다. 이 필름 시뮬레이션은 푸른 하늘과 초록이 깃든 풍경을 담을 때 진가를 발휘했다. 당시는 후지필름 C200, 기록용 필름, 수페리아 엑스트라를 주로 썼는데 클래식 크롬은 가성비 좋고 어떤 장면에서도 평타를 쳤던 기록용 필름과 가장 비슷한 결이라고 생각했다. 선배의 조언대로 필름 카메라를 쓰듯 X70으로 하이라이트, 섀도, 그레인 등 설정값을 일일이 조절해 사진을 찍으며 몇 달을 보냈다. 역시 ‘짬바’는 다르다고 몇 십 년 동안 필름을 만들어온 브랜드답게 색 설정의 디테일이 다르구나 싶었다. 색에서 받는 느낌 즉, 색감은 단순히 눈으로 목격하거나 언어로 표현 가능한 범주 이상의 것들이 영향을 미쳤다. 이를 테면 사진가가 자신의 시선을 표현하기 위해 하이라이트와 섀도의 디테일을 조절하거나 일부러 대비가 강한 색 설정을 사용하고, 그레인으로 어떤 질감을 주는 행위 등. 게다가 이 모든 시행착오 과정에서 필름 값이 전혀 안 든다니?
각설하고, 그즈음 나는 몸 담고 있던 카메라 매거진에서 후지필름의 브랜드 담당 에디터가 됐다. 후지필름이 X-H1을 론칭하며 트리플 플래그십 체제를 선언했을 때였다. 나는 작가도 아니면서 모든 사진 분야에 도전해 보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X 시리즈와 XF 렌즈 전 기종을 총망라하는 연재를 시작했다. 겁도 없이. 매달 카메라와 씨름한 끝에 기술서 <슬기로운 미러리스 생활> 시리즈를 출간하며 결실을 맺었고, 그 사이 후지필름과 블랙홀 같은 사랑에 빠져 X-Pro2를 들였다.
전자식과 광학식을 오가는 X-Pro2의 뷰파인더를 응시한 채 카메라 상단, 후면 다이얼과 렌즈의 조리개 링을 양손으로 돌려가며 촬영하는 감각은 새로운 재미를 부여하기 충분했다. 마치 수동 필름 카메라를 처음 쓸 때처럼 설렜다. 이후 장소나 장면에 따라 필름 시뮬레이션을 설정한 뒤 화이트 밸런스, 노출, 하이라이트와 섀도, 그레인 등 색과 톤을 이루는 다양한 기능을 조작하며 촬영 단계에서 완전에 가까운 한 장을 완성하는 데 몰두했다. X70을 쓸 때도 느꼈지만 X-Pro2를 쓰며 이게 디지털로도 가능한 거였구나, 마음가짐의 문제구나 다시 한번 깨달았다.
사실 이 덕통사고의 가장 큰 요인은 아크로스였다. 그간 흑백으로 색을 논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흑백은 검은색과 흰색으로만 이루어진 단색을 의미하는 줄 알았으니까. 흑백의 개념에는 흑에서 백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를 채우는 다양한 명조의 회색까지 포함된다. 이를 회색조라 하는데, 흑백사진의 경우 흑과 백 사이 무수히 많은 회색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계조와 입자감 표현이 중요하다. 이는 후지필름이 표준 옵션인 모노크롬 외에 아크로스라는 필름 시뮬레이션을 개발한 이유기도 하다.
실제로 써 보면 아크로스는 섀도 표현이 무척 풍부하다. 뭉뚱그려 색을 표현한다기보다 픽셀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회색으로 그러데이션 되듯 이음새(?) 묘사력이 디테일하다. 그 덕인지 명료한 편이라 흑백임에도 쨍하다는 인상을 준다. 게다가 옐로, 레드, 그린 필터를 사용하면 미묘하게 다른 색감의 흑백 표현이 완성된다. 도대체 어떤 설계가 이런 차이를 만드는 걸까. 후지필름은 이 모드 하나로 이들의 색 세계를 디깅하고 싶게 만든다. 글로벌 페이지를 찾아보니 후지필름은 아크로스 설계 당시 풍부한 계조 표현을 위해 중간 톤부터 하이라이트 톤까지는 깔끔하고 샤프하게, 섀도는 깊이감을 잃지 않는 선에서 부드럽게 묘사되도록 최적의 균형을 고려했다고 한다. 하이라이트부터 섀도 모두에 마치 흑백 필름에 나타나는 불규칙한 물결 모양의 그레인을 구현하기 위해 다른 모드와는 완전히 다른 노이즈 리덕션 알고리즘까지 적용했단다. 이 사람들 필름 짬바가 심상치 않다 했더니 브랜드 자체가 필름 디깅 끝판왕이었다. 색을 디깅하는 후지필름을 디깅하는, 디깅으로 피리를 부는 브랜드다.
후지필름은 그 뒤로도 중요한 새 카메라 출시에 맞춰 새 필름 시뮬레이션을 발표하는 확고한 정체성으로 덕심을 흔들고 통장을 강탈했다. 나는 클래식 네거티브와 노스텔직 네거티브를 만나며 일에서도 더는 RAW 파일을 찾지 않게 됐다. 특히 클래식 네거티브와 노출 오버의 조합은 아직까지 필름을 찍는 친구를 가성비 좋은(?) 디지털 세상으로 끌어들이는 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 이보다 필름 그 부드러운 금발 같은 필름의 색감을 잘 구현한 디지털 색 설정은 없었으니.
클래식 네거티브 설계 당시 후지필름이 모델로 삼은 필름은 수페리아였다. 필름 생활자로 이 필름을 사용하면서 노출에 따라 표현이 약간 다른 점이 묘미라고 생각했다. 특히 적정 노출-노출 언더 구간에서 채도가 높지 않음에도 색 대비가 높아 사진이 전체적으로 선명했다. 클래식 네거티브는 이를 꼭 빼닮았다. 컬러의 표준 옵션인 프로비아보다 채도는 낮지만 전체적으로 쨍한 느낌을 가진 이유는 조명을 사용하지 않는 평면적인 환경에서도 장면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콘트라스트를 약간 높여 설계한 덕이 크다.
다만 정작 후지필름이 색 설계에 진심이라 느낀 지점은 따로 있다. 후지필름은 클래식 네거티브를 발표하며 컬러별 콘트라스트라는 새로운 명칭을 발표했다. 후지필름을 디깅하며 그들의 행보에는 곤조가 있다고 느껴왔지만 컬러별 콘트라스트라는 명칭을 들었을 땐 이건 또 무슨 신박한 소리인가 싶었다. 들어 보니 노출 설정에 따라 콘트라스트가 달라진다는 의미로, 후지필름은 클래식 네거티브 설계 당시 컬러별로 밝기 변화에 따라 계조 컨트롤을 각각 다르게 설정하는 방식으로 이를 구현했다. 아니 그렇게까지? 싶었는데 막상 노출을 변경해 가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노출 언더로 촬영하면 대비가 강해지면서 입체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반면 노출 오버로 촬영하면 빛바랜 따듯함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건 그냥 화질 좋은 필름 사진이구나 싶을 때가 왕왕 있다.
누군가는 후지필름을 두고 필름 시뮬레이션 장사를 한다고 말한다. 새 필름 시뮬레이션을 쓰려고 기변을 고민하는 자로서 이 장사를 더 오래, 더 진지하게 해줬으면 싶다. 필름 시뮬레이션이 한 50가지쯤 된다면 사진을 찍는 재미는 50배 이상이 될 테니. 물론 후지필름이라는 브랜드의 색을 만드는 건 필름 시뮬레이션이 다가 아니다. 사진의 본질에 더 다가가려는 다양한 시도나 후지필름에 오래 머물며 브랜드 자체와 세월을 그려가는 개발진, 아날로그에 한 발 더 다가간 X-Pro3 같은 기종의 등장 등 후지필름을 사용했고, 사용하고, 사용하게 될 이유는 차고 넘친다. 후지필름 덕질에 있어 노션 변경이 어려웠던 이유도 업의 베네핏으로 사진에 진심 어린 그들의 행보를 일선에서 지켜본 점이 크게 작용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각 필름 시뮬레이션을 톺아보고 후지필름을 사랑해 마지않는 이유를 하나하나 열거하고 싶지만 읽는 이의 호흡곤란을 배려해 간증글은 여기서 마친다. 후지필름에 후며든 사람이라면 이미 다 디깅한 이야기일 테니.
매주 목요일 발행
현직 에디터와 번역가, 남에게 취향을 팔기보단 매번 본인이 사기만 하는 전직 마케터가 풀어내는 디깅의, 디깅에 의한, 디깅을 위한 에세이. 디깅을 처음 시작하는 분, 다수가 인정하는 프로 덕질러, 이 장르 저 장르 최애는 없고 차애만 가득한 우리 옆집 사는 분까지 두루두루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지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