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인천-LA 싱가포르항공
-라이너 마리아 릴케-
때마침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삶은,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왜 점점 사라져 가기만 하는 걸까. 쉴틈 없는 한 달을 보내고 어김없이 돌아오는 이틀의 포상을 온전한 쉼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기도 하다. 절대 쉴 수 없어!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사라지고 있다는, 어떤 강박 같은 것이었다.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첫머리를 장식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에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췄다. 그대로 책을 닫고 계산대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와 차분히 읽어보니 황경신이 말하는 삶이라는 시간은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황경신은 사라져 가는 시간에서 이따금 발현하는 존재하지 않았던 감정, 감각 따위에 주목한다. 사라져 가는 시간 사이 사이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것들에 대해 말한다. 그녀는 마치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게 "모든 것이 반드시 사라져 가지만은 않아!" 하고 충고하는 듯했다.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짓기 위해 아름다웠던 계절들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작업을 하다는 그녀의 말에서, 문득 LA로 향하던 그날을 떠올렸다.
2016년 10월 23일. 새로 취항한 인천-LA(로스앤젤레스) 싱가포르항공에 올랐다. 가을과 겨울 사이, 사계절 내내 날씨가 좋다는 LA로의 여행. 여름과 가을이 다 가도록 냉랭한 계절을 보낸 내게 특별한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다.
차창 너머 한국엔 먹구름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고작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뿐인데 이미 마음은 다른 계절, 다른 나라로 향하고 있었다. 다녀오면 진짜 겨울이 되어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이 비행기는 이륙 준비를 시작했다.
LA(로스앤젤레스)는 본래 한국과 17시간 정도 시차가 있다. 서머타임이 시행되는 기간은 3월 12일부터 11월 5일까지. 우리가 LA로 향했던 서머타임 기간에는 시차가 16시간이 된다.
LA 사람들보다 16시간을 먼저 살고 있던 우리는 16시간 전으로의 비행을 시작했다. 10월 23일 아침에서 다시 10월 23일 아침으로 돌아가는 여행. 우리에겐 두 번의 10월 23일이 주어졌고, 모두 공평하게 16시간을 선물로 받았다.
절대 쉴 수 없어! 그때까지도 나는 사라져 가는 시간이 그저 아쉬웠다. 선물 받은 16시간까지 꽉꽉 채워 살뜰히 보낼 요량이었다. 처음 타보는 프리미엄 이코노미 클래스를 잠시 둘러보는 사이에도, 원고 자료와 노트북이든 가방이 발아래 툭툭 채였다. 아니, 마음 한 구석에 툭툭 채였다.
이유모를 죄책감에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 영화 리스트를 둘러보고 좋아하는 노래를 검색해보는 동안에도 여전히 쓰다만 원고가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11시간 30분이면 충분해, 하는 핑계로 영화 <어바웃 타임> 더빙판을 재생시켰다.
<어바웃 타임>이 두 번째 플레이되고 그 끝을 만나기도 전에 잠이 들었다. 헤드셋으로 들려오는 기내 방송 소리에 잠에서 깼을 때, 몇몇 사람이 켜놓은 개인 독서등만이 기내를 밝히고 있었다.
좌석 뒤쪽에 있는 독서등을 켜고 노트북을 꺼냈다. 그러나 원고는 좀처럼 진전이 없었다. 옆에 앉은 사람들이 뒤척이는 소리에 타자를 치던 손이 멈추길 여러 번, 그대로 노트북을 닫았다. 아. 성미가 급한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머리가 다시 지끈, 하는 소리를 냈다.
마음이 스스로 쉴 필요를 느꼈다. 여행이라는 쉼표가 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여행을 하는 동안만이라도 조금 여유로워져야지, 하고 생각했다. 때마침 기내에 음료 서비스가 시작됐고, 휴식을 위한 동반자로 싱가포르 슬링(Singapore Sling) 한 잔을 주문했다.
싱가포르 슬링은 래플스(Raffles)라는 싱가포르 호텔에서 저녁 노을을 떠올리며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친 하루의 끝에 달콤한 휴식을 예고하는 황혼처럼 매혹적인 색을 지녔다. 붉은 빛이 감도는 싱가포르 슬링을 받아들고 창가 빛에 의지해 그 색을 가만가만 가늠해봤다. 반짝이는 빛이 잔을 감싸자 사이렌처럼 붉은 빛이 반짝거렸다. 일종의 경고였을까. 지금 너는 일상 끝에 있고 이제 달콤한 휴식을 즐길 차례야.
싱가포르 슬링은 체리 블랜디랑 레몬 주스가 들어가서 과일향이 진하고 첫맛이 달달한 편이다. 싱가포르식 음료인줄 알았는데 100년도 넘은 싱가포르만의 칵테일이라고 한다. 부담 없이 마시기 좋아 두 잔을 연거푸 마셨더니 피로가 몰려왔다. 알고보니 드라이 진이 들어가기 때문에 알코올 도수가 17도나 된다고.
그렇게 아주 달콤한 꿈을 꿨다. 싱가포르항공 딥슬립 4종 세트와 함께 쉼에게 모든 시간을 내주었다. 그때는 죄책감에 시달렸지만, 이만큼 지나 돌이켜보니 당시 나는 어떤 갈증도 압박도 없이 무척 편안했다. 시간에 쫓겼을 땐 느낄 수 없었던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황경신의 말처럼, 아름다웠던 계절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나는 걸음을 옮겨야겠다.
LA 발견한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을 짓기 위한 걸음을.
2016년 10월 23일에서 2016년 10월 23일로의 시간 여행.
Written, Photographed by Jimbee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