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열차 慈情列車

엄마에게 선물한 2018년, #모녀여행

by 김진빈



2016년이 2017년으로 이어지던 밤,

엄마와 나는 서울역사 안에 놓인 작은 TV 앞에 서서 새해를 맞았다. 그리고 곧 정동진행 열차에 몸을 싣고 2017년을 향해 달렸다.


다시 2017년이 2018년으로 이어지던 밤,

우리는 여수엑스포행 기차에 나란히 앉아 새해를 맞았다. 엄마는 잠든 누군가가 깰 새라 나지막이 카운트 다운을 하곤 곤히 잠이 들었다. 엄마는 의자 등받이에, 나는 쪼그라든 엄마 어깨를 베고 누워 2018년을 향해 달렸다.


우리는 여전히, 그리고 변함없이 새로운 아침을 기다렸다.



변한 건 엄마의 마음이다. 언제부턴가 엄마의 늘거나 줄어든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시작은 엄마의 많아진 눈물 정도였으나, 몸으로 체감하는 변화는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사내대장부 같다는 말을 자랑스러워하던 엄마가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잦아졌다. 엄마의 오열 전화를 세 번쯤 받아 들었을 때, 뭔가 대단한 변화가 시작됐음을 감지했다.


어쩌면 변한 건 엄마의 몸이다. 주체할 길 없는 호르몬의 변화를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나약해진 몸. 삶으로부터 조금씩 밀려나는 것 같다는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무언가를 했다. 5분 거리에 사는 내게 하루에도 세네 번씩 전화를 걸어 창문은 꽉 닫았는지, 피죤에 담가 둔 빨래가 이틀이 넘지 않았는지 같은 사소한 질문들을 쏟아냈다. 어느 날부턴 가는 정년을 대비한다며 온갖 자격증을 따기 시작했다. 늘어난 자격증 개수만큼 그녀는 예전의 자신을 되찾았을까. 아니면 미래의 자신을 바꿔 놓은 걸까.



2018년의 첫 아침을 향해 달리는 기차 안에서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무심코 기댄 엄마의 어깨가 한없이 낮아진 것을 깨달은 시점부터였다. 나는 엄마가, 그리고 우리 모녀가 결코 예전과 다르지 않음을 증명하려는 듯 거의 눕다싶이한 자세로 고쳐 앉아 엄마의 어깨에 기댔다. 그 어깨엔 살면서 변함없이 느껴왔던 그녀의 자정慈情, 그 따뜻함이 그대로 배어있었다.


엄마는 내내 잠이 들었다 깨길 반복했다. 기차가 출발하고 두 시간 정도 지났을 때는 아예 스마트폰을 꺼내 친구들에게 새해 안부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모티콘 하나면 해결되는 나와 달리 그녀는 인터넷을 뒤져 새해 인사말 이미지를 찾고 정성 들여 메시지를 작성했다. 잠을 자지 않느냐는 내 물음에 늙으면 다 그래, 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그사이 기차는 여수엑스포역에 닿았다. 엄마의 옷매무새를 챙기고 장갑과 목도리를 체크하고 엄마 손에 들린 짐을 받아 들었다. 어릴 땐 아침저녁으로, 커서는 하루에 세네 번씩 전화를 걸어 읊었던 엄마의 사소한 걱정들이 이제 고스란히 내 몫이 돼버렸다.


긴 여수엑스포역을 빠져나와 드디어 여수를 만났다. 엄마와 나란히 올빼미 투어 버스에 앉아 여수의 밤을 한 바퀴 돌고 난 뒤, 유람선을 타기 위해 오동도로 향했다. 왼쪽에 앉아 야경이 잘 보이지 않았다며 투정을 부리는 엄마가 아이 같이 느껴져 괜스레 짜증이 났다.


예전에는 같이 언성을 높이고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 바빴던 엄마가 이제는 말 못 하는 아이처럼 조용하다. 더는 생채기를 만들 힘이 없어진 걸까, 별별 상상이 침묵을 메웠다. 걱정, 애잔, 짜증. 사회에서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가면 뒤에 숨어든 감정들이 엄마와 있으면 아무렇지 않게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애교 없는 내가 사과 대신 아무렇지 않은 척 팔짱을 끼면 엄마는 또 배시시 웃어 보인다.



남들이 잠시 눈을 붙이는 시간에도 엄마는 배 앞머리에 올라 칼바람을 맞았다. 왼쪽에 앉아 야경을 못 본 탓이겠지. 괜한 마음이 또 심술을 부리고 짜증을 낸다. 아직 해가 떠오르려면 한참 남았어요. 일출 전에 방송할 테니 배 안에 들어와 계세요. 젊은 선장의 방송이 오동도 바다에 울려 퍼졌다. 엄마는 선장과 나를 향해 찡긋 웃어 보이고는 모자를 푹 눌러썼다.


무슨 생각해? 세상에 이렇게 예쁘고 좋은 게 많구나, 하는 생각. 엄마는 오래 참아온 독백 같은 말들을 바다로 쏟아냈다. 요 근래 혼자 여행해보니까 그렇더라. 아주 작은 것도 나를 위해 생각하고 오래 고민해본 적이 없는 거야. 같이 여행길에 오른 사람들을 먼저 보내 놓고 바다에 앉아서 생각만 하다가 돌아온 적도 있어.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하나하나 기억나지는 않는데, 그 시간들이 너무 감사했어.



엄마 말에 동의를 표하듯 새해를 기념하는 불꽃이 하늘에 올라 제 몸을 밝혔다. 제 몸을 희생해 누군가의 하루에 기쁨을 선물하고 바다 아래로 사라졌다. 불꽃놀이와 함께 연신 감탄사를 쏘아 올리던 엄마는 동그랗게 떠오른 해 앞에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따져 묻지 않기로 했다. 엄마는 이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건데, 삶으로부터 조금씩 밀려나고 있다는 엄마의 말은 틀렸다. 우리 때문에 자신의 삶을 밀어내고 살았던 엄마는 이제야 삶을 찾아가는 중이다.


다행이다. 엄마가 조금씩이라도 자신의 삶을 찾는 방법을 알아가기 시작해서.




여수 오동도 선상 해돋이


자정에 가까운 시간, 용산역에서 여수엑스포역으로 가는 마지막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1월 1일을 향해 떠나는 일이 이 여행의 시작이다. 사전에 통화를 마치면 수원, 조치원과 같은 정차역에서 탑승하는 것도 가능하다.


겨울은 해가 늦게 뜨기 때문에 새벽 4시 여수엑스포역에 내려 여수의 야경을 감상하는 올빼미 투어를 진행한다. 여러 의미로 서울에선 볼 수 없는 야경이 펼쳐진다.


오동도 선착장에서 크루즈에 올라 새해를 기념하는 불꽃놀이를 감상하고 있으면 어느새 아침해가 떠오른다. 다들 배 앞머리에, 양옆에 나와 새해를 맞는다. 크루즈가 해에 점점 다가갈 때는 모두 환호성을 지른다. 육지가 아닌 바다 한 가운데서 보는 새해 첫 일출은 엄마에게 2018년을 선물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다.




2018년 1월 9일

Written, Photographed by Jimbee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