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이름에 대하여

<우리 엄마의 이름은 엄마?> 그 후 #02_<로맨스는 별책부록>

by 김진빈


1963년 4월에 태어나 줄곧 자신의 이름으로만 불려 왔던 그녀는 1989년 4월 한 남자의 아내가 되면서 처음으로 다른 이름을 갖게 됐다. 같은 해 11월 한 아이의 엄마가 되면서 그녀는 결혼 전까지 불려 왔던 이름을 서서히 잃어갔다. 종종 아빠의 딸, 엄마의 딸로 불렸던 일은 있었으나 이토록 오래 다른 사람 입에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듣지 못한 적은 없었다. 먼저 태어난 남자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녀의 예전 이름을 기억해주던 몇몇 이가 있었으나, 나중에 태어난 여자아이마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녀는 완전히 자신의 이름을 잃었다.


대신 그녀는 더 많은 이름을 얻었다. 명절이면 애미, 어멈, 새아가, 새 언니, 제수씨로 불렸으며 남편에게는 여보, 당신이 되었고 아이들에게는 엄마로 불렸다. 종종 마트에 가면 누구 엄마, 아줌마라고 부르는 이도 있었다. 이 모든 단어가 그녀 한 사람을 지칭하고 있었지만 특정 상황에서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하여 부른다는 이름이 가진 기본 기능 외에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그 수많은 이름은 그녀와 같은 처지인 또 다른 누군가가 들어도 전혀 이질감이 없었다. 인파가 몰리는 곳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수많은 이름 중 하나를 부르기라도 하면 그녀와 비슷한 차림새를 하고 주변에 서 있던 몇몇이 뒤를 돌아보곤 했다.


<우리 엄마의 이름은 엄마?> 프롤로그 엄마라는 이름에 대하여 中


출처 : tvN 공식 홈페이지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을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엄마라는 새로운 이름 때문에 잠시 뒤로 밀어뒀던 '강단이' 이 세 글자를 찾는 과정이 이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 강단이를 잃고 엄마, 여보, 새댁, 새 언니, 제수씨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려 왔던 그녀는 강단이라는 이름을 되찾기 위해 세상에 나왔지만 '경단녀'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었다. 극 설정이 다소 극단적이긴 하지만,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여성이 겪는 재취업의 어려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내가 어떻게 지켜온 자리인데."


면접을 보러 간 강단이 앞에 또 다른 엄마가 면접관으로 등장한다. 결혼 후에도 육아와 일을 병행했던 그녀는 결혼 후 육아에만 전념한 강단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떻게 지켜온 자리인데. 이제야 기어 나와서는. 이 장면을 보고 나는 강단이 편도 그 여자의 편도 들 수 없었다. 결혼을 코 앞에 두고 막연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지금의 나는, 언제 나에게 닥칠지 모르는 두 가지 비극 앞에 숨이 턱 막혔다.


출처 : tvN 공식 홈페이지

면접에서 몇 번 아니, 몇십 번 고배를 마신 강단이는 결국 결혼 이전 학력과 경력을 모두 포기하고 고졸 신입을 뽑는 자리에 지원한다. 고졸 신입 지원을 앞두고 강단이는 학위증과 경력증명서를 찢어버린다. 강단이가 찢은 것은 단순한 종이 한 장이 아니라 엄마가 되기 전까지 살아온 그녀의 모든 과거다.


강단이를 보며 오빠와 내가 초등학생이 되기 전 다시 취직을 해야 했던 엄마를 떠올렸다. 결혼 이후 줄곧 엄마 역할로만 살아왔던 엄마는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결혼 이전의 학력, 경력과 무관한 일이라도 개의치 않았다. 대부분 일이 별다른 학력이나 경력을 요구하지 않는 단순 노동이었으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도 엄마는 꽤 오랫동안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살아야 했다.


엄마는 다시 일을 시작하기 위해 어떤 과거를 지워야 했을까. 그리고 나는 앞으로 엄마와 같은 엄마가 되기 위해 어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지워야 할까. 결혼을, 그리고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출처 : tvN 공식 홈페이지
출처 : tvN 공식 홈페이지

엄마는 28살에 결혼해 같은 해 겨울, 엄마가 되었다. 처음에는 평평한 저울 양쪽에 자신의 삶과 가정을 각각 올려놓고 자신을 잃지 않으려 아등바등 살았지만 술잔을 비우듯 한 해, 두 해 그리고 몇 해를 살아가는 동안 엄마는 이전의 삶을 비워내고 새로운 세상을 맞았다.


오늘이 어제가 되고 내일이 오늘이 되는 숱한 시간 속에서 엄마는 가정이 중요해지고, 가족이 중요해져 자신을 저 높이 미뤄뒀다. 그 시간 안에서 살아온 최대 수혜자인 나는 엄마를 존경하고 감사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처럼 살아낼 자신은 없다. 나에게 여전히 결혼의 무게가 무거운 이유다. 이제 더 이상 내 결혼을 무거워하지 않는 엄마에게, 엄마의 희생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자신이 없어 문득 결혼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진다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놓지 못했다.


<우리 엄마의 이름은 엄마?> 결혼의 무게 I 中





저자 김진빈

문득 스친 한 문장으로 삶을 써내는 작가로 살고 있다. 평소 스스로를, 그리고 세상을 면밀히 들여다보는 일에 꽤 많은 시간을 쓴다. 이따금 무형의 형태로 머릿속을 부유하는 수십 개 문장 중 단 한 줄을 건져 수면 위로 올린다. 그리고 그 문장은 어김없이 글이 되고 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