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Slow Moments

12 Hours In '___?___'

어느 12시간 도보 여행자의 여행법

by 김진빈



감정에도 바이오리듬이 있다.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도 어느 날 문득 마음이 벅차 갈 곳을 잃었음을 느낀다. 이럴 때는 매일 밤 침대에 몸의 피로를 뉘이듯, 마음에게도 푹신한 침대가 필요하다. 마음의 길을 잃은 사람들이 마음의 병을 쏟아내는 방법은 저마다 다 다르다. 안 그래도 시끌벅적한 카페에서 더 목소리를 높여 친구와 수다를 떤다거나, 휴식을 핑계 삼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휴양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누군가는 며칠 분량 식량을 싸들고 침대에서 안락한 생활을 즐기기도 한다.


나의 경우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거나 오롯이 쉼에 집중할 수 있는 휴양 여행, 침대행을 택하기보다는 홀로 혹은 마음 맞는 친구와 낯선 도시를 걸으며 나를 들여다보는 여행을 떠나는 편이다. 공백 없이 사는 일상에 치여 마음이 지쳤다고 시위를 할 때면, 우선 비행기표부터 끊고 본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하루를 버틸 힘을 비행기표에서 찾곤 하는, 일종의 생존형? 여행자다.


목적지는 정하되, 하루에 12시간을 걸어도 끄떡없는 두 다리와 순간을 기록할 카메라만이 함께 하는 목적 없는 여행. 매번 이런 방식으로 여행을 떠나다 보니 여행에 몇 가지 규칙이 생겼다.



목적지는 정하되,

목적은 없어야 한다

우선 당장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비행기를 끊어야 하니 목적지부터 정한다. 목적지를 정할 때는 버킷리스트에 나열해 놓은 수많은 나라와 도시 중 휴일과 연차를 계산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여행지를 택하고, 그 도시에서 가장 산책하기 좋은 장소들을 꼽는다. 다만, 그 장소에서 꼭 봐야 할 곳이나 꼭 가야 하는 곳을 미리 정하지는 않는다.


마음이 들떠 그 장소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정해놓으면, 어김없이 '반드시'라는 단어에 얽매여 시간을 보내곤 한다. 자연스레 그곳 자체보다 그곳에서 유명한 곳을 찾아다니는 여행이 된다. 여행마다 장단점이 있지만 나는 이럴 경우 대부분 그 도시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 늘 아쉬움이 남았다.



하루 동안

한 지역에만 머문다

여행을 하다 보면 하루에도 수많은 변수와 마주하곤 한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여행에 미숙했던 나는 낯선 곳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어 분 단위로 여행을 계획했다. 행여 버스나 기차를 놓치지는 않을까, 오늘 일정을 다 이루지 못하지는 않을까 여행 내내 조바심이 나 화장실을 가는 일조차 불안해했다. 하루 동안 가야 할 곳이 많으니 여행은 늘 피로했고, 추억만 있고 마음이 지친 여행이 계속됐다.


이제는 하루에 한 지역만 머무른다는 규칙을 세워놓고 이를 절대 어기지 않는다. 애초에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일상 탈출과 쉼이다. 몇 번 무모한 여행을 하고 나니 무언가를 많이 이루기보다 적당히 새로운 것들을 보고 느끼고 쉬는 여행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제는 한 지역에서 시작점만 정하고 정처 없이 걷는다. 외관이 마음에 드는 식당에서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고, 걷다 지칠 때면 작은 커피숍에 들어가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그 지역에 사는 사람처럼 하루를 보내다 밤이 되면 숙소로 돌아오는 식이다.



탈 것에 의존하기보다는

두 발로 걷는다

호주에 살 때 생긴 습관이 걷기다. 가난한 워홀러에게 비싼 교통비는 부담이었고, 웬만한 거리는 탈 것에 의존하기보다 튼튼한 두 다리를 믿기로 했다. 그때 같은 거리를 매번 다른 루트로 걸으며 쉽게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과 순간을 마주하고,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에 매력을 느꼈다. 덩달아 도보 여행의 소중함까지 알게 됐다.


그때 습관이 도보 여행 규칙이 됐다. 이 매거진을 계획하면서 지난 여행들을 돌아보니 나는 여행에서 숙소나 식당에 머무르는 시간을 빼고 대부분 걷고 있었다. 하루 12시간, 2-3만 보는 거뜬한 여행. 사실 하루에 한 지역만을 여행하다 보면 별다른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아도 웬만한 곳은 도보로 이동 가능하다. 이렇게 두 발로 걷다 보면 도시와 도시의 연결점을 만나고, 그 오묘한 차이를 온몸으로 실감한다. 때때로 남들이 쉽게 볼 수 없는 곳을 발견하는 기쁨을 만끽하기도 한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걷다가 문득 감정을 뉘일 곳을 찾으면, 그 순간을 카메라로 담고 글로 기록하곤 한다.


그 기록의 순간들을 전하고자 한다. 하루 12시간 도보 여행자가 직접 걸으며 만난 순간과 그곳에서 마주한 생각에 관한 기록. 오랜 친구와 함께 추억이 담긴 사진첩을 들춰보듯 가볍게, 누군가 나의 순간들을 함께 즐겨주길 바랄 뿐이다.




하루 12시간 도보 여행자

공백 없이 흐르는 일상이 지칠 때면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비행기표를 끊는다.

아침에 숙소를 나서는 순간부터 밤이 저물어갈 때까지 한 지역을 걷고 또 걸으며 남긴 기록.

하루 12시간 도보 여행자가 붙잡아둔 순간들이, 누군가의 일상 탈출에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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