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Slow Moments

조금은 느려도 괜찮아

슬로 무비로부터 시작된 슬로 라이프식 여행

by 김진빈


스물셋에 졸업 대신 택했던 호주행.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의 인스턴트식 관계에 허덕이던 어른이의 시작점에서,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카모메 식당 かもめ食堂>을 만났다.


1.jpg 출처 : 오기가미 나오코 <카모메 식당>


핀란드 헬싱키에서 작은 식당을 연 일본인 사치에와 낯선 일식당에 찾아오는 손님 이야기.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과 익숙해지기까지, 슬로 무비 특유의 느린 전개가 그들의 이야기를 천천히 그려나간다.


핀란드어를 모르는 마사코와 눈을 감고 세계지도를 찍어 핀란드에 왔다는 미도리.

낯선 땅에서 일본인이라는 공통점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두 여자는 매일 카모메 식당을 찾는다.

손님이자 주인으로, 때로는 친구로 카모메 식당을 작은 웃음으로 채워가는 그녀들.


대부분 슬로 무비가 그렇듯, 사치에와 두 여행자는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하루를 흘려보내기 일쑤다.

되도록 느긋하게 하루를 보내고, 천천히 관계를 맺으며, 이따금 깊은 생각에 잠긴다.

여기에 관객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마음을 울리는 대사가 조미료처럼 버무려진다.


2.jpg 출처 : 오기가미 나오코 <카모메 식당>


감독은 그들이 커피를 내리거나 주먹밥과 시나몬롤을 정성스레 만드는 과정을 영상에 천천히 담아낸다.

낯선 곳에서 맺은 인연과 나누는 따듯한 밥 한 끼.


어느새 처음이라는 어색함은 온데간데없고, 서로가 서로에게 소박한 일상을 털어놓는 사이가 된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세 여자의 웃음소리에 식당 앞만 기웃거리던 서양인도 마음의 문을 열고 여유로운 그들의 하루에 동참한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새로운 만남, 그리고 그 만남이 자신의 일상에 스며들기까지.

카모메 식당을 찾는 이들은 누구 하나 상대방에게 마음을 열어달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다만 이따금 밥 한 끼만큼의 마음을 함께할 뿐이다.


<카모메 식당 かもめ食堂>은 가면을 쓴 채 만나는 인스턴트식 관계에 익숙해져 마음 한 구석에 외로움을 간직하고 사는 우리에게 정성스레 만든 따듯한 주먹밥과 시나몬롤을 선물한다.


3.jpg 출처 : 오기가미 나오코 <안경>


담담한 위로를 건네받듯 그렇게 슬로 무비에 빠졌다.

<안경 めがね>, <토일렛 トイレット>으로 이어지는 조금은 느려도 괜찮은 이야기.


느리게 흐르는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온전히 그들의 슬로 라이프에 동참할 수 있었다.

인스턴트식 만남으로 가득한 냉랭한 세상을 살다 보니 그들이 그려내는 진득한 만남이 유일한 온기가 될 때도 많았다.


<안경 めがね>을 여섯 번째 돌려보던 날, 낯선 곳에 오랫동안 머물며 서서히 적응해가는 타에코처럼 느긋하게 한 곳을 여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아침마다 바닷가에 모여 기이한 체조를 부끄럼 없이 할 수 있는 정도의 사이가 됐으면 좋겠다고.


4.jpg 출처 : 오기가미 나오코 <안경>


<안경 めがね>을 만난 이후 대부분 여행이 그랬다.

그곳 사람들이 사는 집에서 자고, 먹고, 동네를 산책하는 식. 그들의 삶에 문을 두드리는 일은 처음엔 어색하고 때론 부담스럽지만 타에코가 마침내 안경을 떨쳐버렸듯 이내 그곳에 물처럼 스며들었다.


이정표가 없어 길을 잃으면 새 길을 찾았고, 그래도 모르면 새로운 길친구를 사귀었다.

빡빡하게 짜인 일정에 얽매여 진짜를 놓치는 일은 바쁘게 흘러가버리는 일상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적어도 다른 누군가의 일상에 문을 두드리는 여행에선

시간이 데려다주는 대로 방향을 틀 줄 아는 여유를 갖기로 했다.


5.jpeg 출처 : 오기가미 나오코 <안경>


한 번 떠난 여행이 기약 없이 길어지기도 했다.

그곳을 알기엔 턱 없이 부족한 시간이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은 날도 많았다.


머무르게 된 집 주변을 무계획으로 산책하길 여러 번.

마침내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최단 코스를 알아냈을 때 그 희열을 잊을 수 없다.


그들의 삶에 스며들었던 여행을 정리하는 밤이면 어김없이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렸다.

길을 잃었던 자리에서 새로운 길로 이어지는 거리가 스치듯 지나쳤던 사람들과 안내원을 자초했던 고마운 인연들로 채워졌다. 덕분에 거리를 맴돌던 향기까지 기억할 수 있게 됐다.


20160803-DSCF4668 복사본.jpg


슬로 라이프식 여행은 조금 느려도 괜찮다.

오히려 느려서 더 괜찮다.


오늘 일정이 내일로 미뤄지더라도

팥을 끓이던 사쿠라가 일러준 대로 서두르거나 조급해하지 않으면 그뿐이다.

그만큼 눈으로 보고 머리와 마음으로 담을 수 있는 기억이, 그리고 내 사람이 많아질 테니까.




하루 12시간 도보 여행자

공백 없이 흐르는 일상이 지칠 때면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비행기표를 끊는다.

아침에 숙소를 나서는 순간부터 밤이 저물어갈 때까지 한 지역을 걷고 또 걸으며 남긴 기록.

하루 12시간 도보 여행자가 붙잡아둔 순간들이, 누군가의 일상 탈출에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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