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러의 커피백서

탐나는 커피 레시피 in Australia

by 김진빈


호주의 아침은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담고 있다.



호주 사람은 손목시계만 보며 출근하는 발걸음을 재촉하기보다 일찌감치 집을 나와 동료와 느긋하게 아침을 시작하는 쪽을 택한다. 때문에 타운홀 역이 있는 시드니 시티 중심부를 기점으로 7시면 대부분 카페가 문을 연다. 뚜벅이 워홀러인 나도 호주에 1년을 살면서 커피홀릭이 됐다. 호주는 연간 2.9kg에 달하는 커피를 소비한다고 하는데, 모르긴 몰라도 워홀러로 지낸 1년 간 그 소비량에 엄청난 보탬이 됐을 것이다.


양만 많이 마셨다고 커피홀릭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호주만의 색다른 커피 맛을 즐기기도 했고, 오히려 한국 믹스커피를 전파하고 오기도 했다. 호주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마시는 수돗물에 쉬이 적응하지 못한 한국인이었던 나는 커피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커피와 더 친해질 수 있었다.



주중, 주말을 가리지 않고 호주 사람의 아침은 커피와 함께 시작된다.




에너자이저라 부르고 롱 블랙이라 쓴다



4개월 정도 노스 시드니 역 근처 회전초밥집에서 웨이트리스(Waitress)로 일했다. 노스 시드니 역 주변은 시드니 시티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사무실이 밀집해 있는 오피스촌이다. 점심시간이 시작되는 11시 30분부터 끝무렵 2시까지 가게 안은 그야말로 ‘헬(Hell)’이다. 한바탕 손님을 치르고 나면 배고픔보다 빨리 찾아오는 것이 목마름. 호주 사람은 수돗물을 아무렇지 않게 마시는데, 수돗물이 익숙하지 않은 한국 사람에게는 수돗물 특유의 냄새가 날 수밖에 없다. 평범한 한국인이었던 나는 손님에게 2불에 파는 그린티(녹차)를 사장 몰래 타 마셔야 했다. 나중에 눈치가 보여 택한 방법이 커피다.



오페라 하우스 앞 바에서는 맥주나 와인을 즐기는 사람도 많지만 의외로 커피를 즐기는 사람도 많다.



스탬프 투어가 있을 정도로 한국에서 인기 있는 스타벅스(Starbucks)는 호주에선 그 명함을 함부로 내밀지 못한다. 실제로 시드니(Sydney) 중심인 센트럴 근처에는 스타벅스 두 곳이 있지만, 나중에 서부지역인 퍼스(Perth)로 이사했을 때는 한 곳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못 찾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워홀러인 내 행동반경 안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다. 2000년에 처음으로 호주에 론칭된 스타벅스는 2014년 대부분 점포를 철수하기에 이른다. 여러 기사에 의하면 최종적으로 남은 24개 점포마저 호주 현지 법인이 인수했다고 한다.


본사에서 직영으로 점포를 관리해 커피의 나라 호주의 고유 커피를 등한시한 스타벅스가 물러나고 롱 블랙(Long Black), 플랫 화이트(Flat White) 등 현지화 전략을 세운 글로리아 진스(Gloria Jean’s)가 그 틈에 승기를 꽂은 것. 호주에는 우리나라의 스타벅스만큼 글로리아 진스가 많이 눈에 띈다. 노스 시드니에서 일하던 가게 앞에도 ‘글로리아 진스’가 있었다.


점심시간 내내 주문을 받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느라 지칠 대로 지친 성대를 씻어줄 생명수로 ‘롱 블랙’만 한 선택은 없다. 처음 호주 카페에서 주문할 때 한참이나 메뉴판을 들여다봐야 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아메리카노(Americano)는 보이지 않고 결국 아는 메뉴인 라테(Latte)를 시켜야 했다. 한국에서 흔히 마시는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Espresso)를 즐겨 마시는 이탈리아인이 에스프레소에 물을 타 연하게 마시는 미국인들을 보고 그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즐겨마시는 롱 블랙은 아메리카노와 레시피가 조금 다르다.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 샷 위에 뜨거운 물을 붓지만 롱 블랙은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데워진 뜨거운 물에 에스프레소 샷 두 잔을 더해 만든다. (참고로 호주는 에스프레소를 ‘숏 블랙(Short Black)’이라 부른다) 만드는 순서 차이라 하지만 에스프레소 추출 시 함께 나오는 거품인 ‘크레마(Crema)’ 덕에 그 풍미는 더 깊어진다. 처음 마셨을 땐 아메리카노보다 커피의 쓴 맛이 강해 적응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지만 고된 노동에 지친 워홀러에게 에너자이저(Energizer) 같은 역할임엔 틀림없다.


덕분에 가벼운 주머니 사정이 더 가벼워졌더랬다. 나를 위해 쓰는 돈은 아끼지 말자 약속했던 지라 커피에 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요조도 청춘페스티벌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내일을 위해 오늘 먹고 싶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참지 마세요”라고. 롱 블랙을 참지 않은 덕에 차비가 없었던 나는 대신 아침저녁으로 왕복 3시간을 걸어 다녀야 했다. 가게 사람 모두가 Working-Holiday가 아닌 Walking-Holiday를 왔다고 놀릴 정도였으니 롱 블랙 사랑에 대해선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달빛과 네온사인이 잔잔한 어둠의 바다를 비추는 달링 하버의 밤.




노상의 낭만을 모르는 자 커피 향을 알지어다



한국에선 종종 치맥과 함께 한강을 찾았다. 자연스레 그 습관이 호주까지 이어졌다. 아름다운 별빛이 물든 바다를 보며 마시는 맥주 한 잔의 낭만. 지친 일상을 푸념해도 좋고, 친구들끼리 지나간 추억을 떠올려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을 막 시작하고 사치를 부려보겠다며 달링 하버(Darling Harbour)에서 피자와 함께 병맥주를 들었다. 미간이 깊게 패인 경찰이 오기 전까지 워홀러의 삶에 대한 한탄을 흐르는 물에 실어 보낼 작정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호주는 정해진 구역 이외에 곳에서 술을 마실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노상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나라라니. 깔끔하게 차려입고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에서 마시는 맥주가 전부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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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제야 주위 사람들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따듯한 커피를 테이크 어웨이(Take-away, 호주에선 영국 영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테이크 어웨이를 사용한다. 미국은 Carry-out나 To go를, 북미나 필리핀은 Take-out을 사용한다고 친절한 사전이 알려줬다. 처음 호주에서 커피를 주문할 때 테이크 아웃이라 말했다가 점원이 못 알아 들어 손으로 밖을 가리켜야 했던 경험이 있다)해 손에 들고 달링 하버의 밤을 만나러 온 사람들. 낭만을 운운하며 술을 찾는 워홀러의 손은 부끄러워졌다. 술기운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푸념하듯 고민을 내려놓기엔 과한 아름다움을 가진 달링 하버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 후로 종종 달링 하버를 찾았다. 낮에는 버스킹 하는 사람들의 노래를, 밤에는 형형색색의 조명 사이에서 시원한 바다 바람을 맞았다. 그때마다 손에는 따듯한 플랫 화이트가 들려있었다. 호주에서 브런치를 즐겨보겠다며 찾은 다이닝 카페에서 먼저 주문하던 남자가 플랫 화이트를 시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당시는 도전정신이라고는 일 퍼센트도 찾아볼 수 없는 겁 많은 워홀러였고, 평범하게 라테를 시켰다. 다음에 일하던 가게 근처 카페에서 플랫 화이트라는 메뉴를 보고 직원에게 무엇이냐고 묻자 열심히 이러저러하다 설명해줬다. 영어가 짧았던 나는 당연히 못 알아들었고, 머리에 물음표를 그리자 점원이 한 말. “라테랑 비슷해.” 주변에 한국 가게가 많아 한국인을 많이 상대해왔던 점원은 정말 명쾌한 답을 내려줬다.



처음으로 마셨던 플랫 화이트. 한 모금 마시고 한 말은 "뭐야 라테잖아."였다.



플랫 화이트는 평평하다는 의미의 'Flat'과 우유를 의미하는 'White'를 합친 말로 라테와 비슷한 커피의 한 종류다.


라테처럼 우유 거품이 풍성하지 않고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따를 때 거품이 거의 없는 듯 얇고 평평하게 올라가는 커피를 일컬어 플랫 화이트라 한다. 뉴질랜드와 호주에서 즐겨마시는 커피로 한국에서도 파는 것을 보고 호주가 그리운 마음에 몇 번 시켜 마신 적이 있다.


레시피는 바리스타에 따라 다르다고 하는데, 거품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기본적으로 라테보다 커피 맛이 진한 것처럼 느껴진다. 따듯한 우유가 들어가서 롱 블랙보다 부담이 덜해 속이 부담스러운 날에 플랫 화이트를 들고 종종 달링 하버로 향했다. 달링 하버를 찾은 대부분이 손에 커피를 들고 있다. 그래서인지 달링 하버를 찾을 때마다 커피 향이 짙게 배어있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리고 유달리 푸르른 달링 하버엔 커피와 함께 훌훌 털어버린 워홀러의 이야기가, 혹은 누군가 사랑을 속삭이며 남긴 로맨틱한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워홀러가 만난 호주의 탐나는 커피 레시피



# Korea Coffee를 맛보지 못한 맥심


호주 첫 호스텔에서 하우스키퍼(Housekeeper)로 일하던 프랑스 친구 이름은 맥심이었다. 짧은 영어로 네 이름이 한국 인스턴트커피 이름과 같다 말하자 장난치지 말라며 웃어넘겼던 맥심. 나중에 한인마켓을 찾으면 꼭 맛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사 때문에 두 달이 지난 후에 그 호스텔을 다시 찾았을 때 맥심은 이미 떠난 뒤였다.


나중에 일하던 가게에는 항상 스태프용으로 한인마켓산 맥심 믹스커피를 구비해뒀다. 종종 단골손님에게 커피를 타 주곤 했는데, 더운 날 엄마에게 타 줬던 믹스커피 2 봉지+얼음의 조합은 호주 사람도 엄지를 척 들게 만들었다. 나중에는 단골손님들이 ‘코리아 커피’를 외쳐대는 통에 매니저가 한인마켓을 자주 찾아야 했다.



# 눈을 낮추면 선택지는 많다


간혹 대타로 풀타임을 하고 파트타임을 주로 하면서도 커피는 잘도 사 마셨다. 결국 가난한 워홀러에게 허리띠를 졸라 매야 하는 상황이 왔다. 나를 위해 쓰는 돈을 아끼지 말자던 나와의 약속을 더 이상 지킬 수 없어졌고, 1불짜리 식빵과 60센트짜리 스파게티면에 2불짜리 소스를 곁들여 끼니를 때워야 하는 지경이 됐다. 그나마 풀타임으로 일하는 날에는 점심과 저녁을 해결하고 집에 돌아왔지만, 그 외에 날에는 집에서 뭐 먹을지가 걱정인 날이 많았다.


당연히 커피 값도 줄여야 했다. 롱 블랙의 진한 맛과 플랫 화이트의 부드러움에 깊이 빠진 내게 커피를 끊는 일은 어려웠다. 흔히 회사원이 돼서야 회사원들이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다니는 이유를 알게 된다고 하는 우스갯소리처럼, 고된 노동으로 지친 워홀러의 손에 커피가 들려 있어야 하는 이유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종종 세븐일레븐을 찾았다. 세븐일레븐의 1불 커피는 노동요를 부르다 지친 워홀러에게는 생명수이자, 시험공부에 허덕이는 유학생에겐 에너자이저 같은 역할이다. 실제로 아침에 세븐일레븐을 찾으면 항상 줄을 서야 했다. 셀프 머신 앞에 종이컵을 놓고 롱 블랙, 라테, 카푸치노 중 한 가지를 선택한 뒤 잠시 기다렸다 뚜껑을 닫고 카운터에서 돈을 계산하면 되는 시스템이다. 피로가 누적된 날이라면 사이즈 업된 2불짜리를 마셔도 좋다. 호주 커피가 기본 4~5불 정도 하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저렴한 값에 커피를 즐길 수 있다.







워홀러가 찾은 카페 레시피



01. 글로리아 진스(Gloria Jean’s)

글로리아 진스에서는 아이스 롱 블랙을 가장 많이 마셨다. 기본 메뉴이기도 했고 더운 날씨에 고된 노동까지 겹쳐 시원하게 쭉쭉 마실 수 있는 커피가 필요했기에. 그러다 당이 땡기는 날이면 아이스 초콜릿을 마셨다. 원래 음료를 빨리 마시는 편이지만 시원하고 달달한 아이스 초콜릿을 마시는 날이면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음료가 바닥을 드러냈다. 나중에는 가게 사람들이 '음료 흡입기'라는 별명까지 붙여줄 정도로 그때 게눈 감추듯 마시던 그 시원함을 아직까지 잊지 못한다.


02. 아로마(AROMA)

퍼스에서 일하던 테이크 어웨이 샵 앞에 아로마라는 카페가 있었다. 소규모 개인 카페가 많은 호주 특성상 당연히 프랜차이즈 카페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뒷전으로 물러난 오래된 프랜차이즈 브랜드였다. 아침이면 16불짜리 스페셜 메뉴를 팔고, 커피와 함께 다양한 종류의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즐기기 좋은 곳으로 글로리아 진스보다 가격이 약간 저렴하다. 가게까지 친절하게 배달해주는 라테 위엔 항상 귀여운 마시멜로우가 함께였다. 그리고 온 가게 안에 커피 향이 퍼질 정도로 커피 맛이 깊고 향이 오래갔다. 이제 점포가 그렇게 많지 않은 오래된 프랜차이즈지만 깊은 커피 맛과 섬세함으로 손님을 배려하는 곳이 아로마다.


03. 돔(DOME)

아침이면 테이크 어웨이 카페에 줄을 서고, 점심에는 다이닝 카페에서 커피를 곁들인 식사를 하는 호주 사람들. 특색 있는 개인 다이닝 카페가 즐비한 호주에도 많은 점포를 보유하고 있는 프랜차이즈 다이닝 카페가 있다. 바로 돔이다. 4시면 문을 닫는 퍼스 카페들과 달리 밤 9시까지 문을 열어 일이 끝나고도 자주 찾던 곳이다. 음료는 5~7불 사이로 글로리아 진스와 비슷하지만 사이즈가 감동이다. 특히 아이스 초콜릿을 시키면 함께 나오는 곰돌이 모양 초콜릿 덕에 마음까지 달달해질 수 있으니 심장 폭격을 주의해야 한다.


04. 산츄로(SAN CHURRO)

호주 카페는 한국 카페처럼 대부분 메뉴가 비슷하다. 롱 블랙을 비롯한 플랫 화이트 그리고 한국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는 보통의 커피들. 반면 산츄로는 초콜릿을 다양하게 활용한 이색 카페다. 다양한 아이스 음료도 좋지만 쌀쌀한 날에 핫 초콜릿 한 잔이면 온몸이 사르르 녹는다. 우리가 아는 그 핫초코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끝에 달달함이 오래 남아 텁텁함으로 이어지지 핫초코와는 달리 깔끔한 달달함을 가졌다. 진한 초콜릿에 퐁당 빠진 기분을 사이드 메뉴인 츄러스와 함께 나누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오래전 이대 앞에 산츄로가 상륙했다고 하니 달달함에 취한 기분을 느끼러 이대를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