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노동자가 주는 어감

워홀러의 아주 사적인 고백

by 김진빈




고백하건대 나는 외국인 노동자를 무시하거나 혹은 무서워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동시에 호주에 ‘잠시 머문’ 외국인 노동자 중 한 사람이었다.


Working Holiday는 여행을 하면서 발생하는 여행 경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병행할 수 있도록 일정 기간 취업 비자를 허락해주는 제도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특권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입장에선 특권이고 누군가의 입장에선 아닐 수도 있다. 호주에 다녀온 이후 “제발 워킹홀리데이를 가라. 학교에만 붙어있는다고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꼰대’식 선배를 자처했던 나도 눈물을 쏙 뺄 만큼 힘들었던 시기가 분명 있었다.





어디에서 일을 하건 자국이 아니면 ‘외국인 노동자’라는 타이틀을 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독 우리나라에선 '외국인 노동자'의 어감이 좋지 않다. 워킹홀리데이를 온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자주 하던 “우린 외국인 노동자니까”라는 말의 어감만 봐도 긍정적인 편은 아니다. 호주 사람들은 이런 면에서 조금 더 올바른 가치관을 가졌다. 다인종 국가인 호주는 생김새는 물론 영어 발음 자체도 제각각이다. 영어 발음이 다르다고 해서 비웃거나 무시하기보다 되묻거나 자신이 생각하는 말이 맞는지 여부를 묻는다. 또 길거리를 지나다 생김새가 다른 사람을 만났다고 해서 대놓고 쳐다보거나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물론 호주에 인종차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호주에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퇴근하는 내게 호주 청소년 7명이 몰려와 “Courgette(코제트)”라고 외쳤던 적이 있다. 당시엔 뜻도 모르고 무서움에 큰길로 빠져나왔지만 집에 돌아와 검색해보니 호박 같이 누렇다는 뜻의 동양인 비하 발언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뜻을 몰라 화를 내지 않고 돌아설 수 있었다. 또 한 번은 키가 내 두 배쯤 되는 흑인이 와서 연신 “Go Home”을 외쳐댔다. 어디선가 한국어의 된발음이 발음이 쎄서 외국인이 무서워한다더라는 소리를 들어 인상을 구기고 온갖 욕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런 차별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왔다고 하면 일을 구하는데 있어 차별은 없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듣는다. 단호하게 말하자면 거의 없다. 그러나 언어에 대한 차별은 있다. 호주 보스에게는 이력서를 주러 온 사람이든 인터뷰를 보러 온 사람이든 피부색이나 머리색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영어를 얼만큼 하느냐고 얼만큼 일을 잘 할 수 있느냐다. 언어는 그 나라에서 생활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라 사실 차별이라 말하기도 뭐하다. 실제로 한인잡만 했던 나도 피크 시간에 영어로 손님을 응대하기 위해 바쁘지 않은 시간에 설거지를 도맡아해야 했다. 호주는 자신이 열심히 하는 만큼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사실 나는 나약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사적인 고백에 앞서 한 가지 묻고 싶다.

"외국인 노동자가 주는 어감이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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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워킹홀리데이 비자든 취업 비자든 외국에 나가서 일한다는 자체가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다인종 다문화 국가인 호주에서 조차 난 몇 번의 인종차별 아닌 인종차별을 겪었다. 심지어 같은 동양인에게 동양인은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욕을 먹은 적도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한국 집 앞 작은 공장에서 일하던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떠올렸다.


고작 18살이었던 나는 벽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을 보며 어느 나라 언어인지도 모르는 말로 대화하는 그들이 무서웠다. 첫 번째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에 섞인 그들의 웃음소리가 무서웠고, 두 번째로 종종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들의 범죄 소식이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외국인 노동자 범죄가 하나씩 터질 때마다 그들에 대한 불신은 날로 높아져 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은 담장 밖으로 한 발작도 나올 수 없는 시스템 속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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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 되고 다문화 아이들과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캠프의 강사로 활동하면서 내 생각도 성장했다. 아니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두려움’이 ‘안타까움’ 혹은 ‘불쌍함’의 감정으로 변했다. 애써 그 감정을 숨기려 지극히 평범하게 그들을 대했다.


다문화 아이들과 비다문화 아이들이 반반씩 섞인 캠프였다. 한창 예민할 시기의 아이들이었지만 또래인지라 크게 의식하거나 동요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사건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유독 말을 듣지 않아 신경을 많이 썼던 다문화 아이가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라는 말에도 아이들과 장난치기 바빴다. 참을 대로 참았던 나는 결국 화를 내뱉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 들린 한 마디에 ‘선생님’이라는 자리에 서있는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중국말로 해야 하는데 애들 앞에서 해요?”


울음을 꾹꾹 눌러 말하던 아이. 같이 울음을 꾹꾹 눌러 속으로 삼켜야 했던 멈춰버린 시간. 순간의 정적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분명 미안한 상황인데 미안하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고 말해버리는 것이 애써 숨겨놓은 내 감정을 들켜버리는 것 같아서. 그리고 더 이상 그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모두 하루하루 버티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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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이 심하다더라. 길거리만 지나가도 욕은 기본에 계란까지 뒤집어쓸 수도 있다더라…."

출국 전 엄마는 호주의 나쁜 사건을 수집하는 수집가였다. 동시에 곧이곧대로 내게 전하는 이야기꾼이었다. 그때마다 내 대답은 같았다.


“어딜 가도 똑같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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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삼촌을 만난 건 친구가 살게 된 시드니 쉐어 아파트에서였다. 친구 집을 방문한 내게 삼촌이 처음으로 건넨 인사는 “안녕하세요. 사장님!”이었다. 나는 당황했고 삼촌도 당황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얼굴이 빨개진 내 앞에 삼촌은 뭐가 잘못됐냐는 표정으로 머리에 물음표를 가득 그리고 있었다.


7년을 한국 공장에서 일했다고 했다. 인도네시아에 부양할 가족이 있고 한국에선 더 이상 돈을 벌기 힘들어 호주로 왔다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삼촌은 한국사람이 사장님이라 불리는 걸 가장 좋아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겨우 서로의 호칭을 ‘보스’로 정리했다.


이후로도 종종 친구네 집에 들렀다. 한국 음식을 해주는 우리에게 삼촌은 인도네시아식 과자를 만들어줬다. 아주 조촐하지만 행복한 날들을 보냈다. 문득 한국에서의 삶이 힘들지 않았냐고 건넨 내 질문에 삼촌은 다시 한번 물음표를 그렸다.


“보스는?”


삼촌의 다음 말을 끝으로 오랜 정적이 흘렀다. 호주에 온 뒤로 어느 누구도 힘들지 않냐고 물어주지 않았다. 같이 갔던 친구들은 모두 함께 힘들었고 그저 술 한잔 기울이며 침묵으로 서로를 위로할 뿐이었다. 행여 부모님이 힘드냐고 물어볼까 전화도 몇 주에 한 번씩 드리던 시기였다. 그리고 의외의 사람에게서 금기어처럼 느껴졌던 그 말을 들었다. 대답을 할 수 없었고 눈을 마주칠 수도 없었다. 낯선 외국인에게서 느껴졌던 이유 모를 동질감에 서러움의 눈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눈가에 대롱거렸다.


“난 부인도 있고 자식도 있어. 힘들지 않아.”


행여 분위기가 무거워질까 이 말 뒤에 여자는 요리를 잘해야 한다며 너스레를 떨던 삼촌. 분명 낯선 모습을 하고 있는 그가 한국어로 작은 위로를 건넸다.






버팀목이 있어야 물건이 쓰러지지 않는다


버팀목의 사전적 정의는 ‘물건이 쓰러지지 않게 받치어 세우는 나무’다.


시드니를 떠나고 한 번도 삼촌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의 SNS 계정에서 삼촌 소식을 종종 듣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따금씩 호주의 삶이 힘들어질 때마다 내가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첫 째는 가능한 영어를 많이 사용하며 사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여행을 위해 돈을 버는 것이었다.


호주에 가기 전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영어 공부도 중요하고 생계를 유지할 돈도 중요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버팀목을 만드는 일이다. 사람은 생각보다 나약한 동물이다. 아무리 단단하고 굳건한 사람도 외국에 나가 산다는 것은 다른 일이다. 외국에서의 삶은 외로움과의 싸움이다. 때문에 쓰러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도와줄 ‘버팀목’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은 버팀목이 단순히 ‘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그 앞에 ‘여행을 위한’, ‘다른 도시에서의 삶을 위한’처럼 어떤 경험을 위한 수식어가 붙었으면 좋겠다. 만약 물질적인 것을 사기 위해라는 이유가 버팀목이 된다면 물질적인 것을 더 이상 살 수 없는 상황이 오면 버팀목은 부러져버리고 만다.


누가 워홀러의 삶을 묻든 '어디서 이런 일을 해라'라는 식의 조언을 해주고 싶진 않다. 누구에겐 최고였던 곳이 누군가에겐 최악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어느 곳에 가든지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버팀목 하나쯤은 반드시 품고 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게 호주로 떠나기 전 단순한 외국인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워홀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