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딜레마

마치 내일도 이 거리를 걸을 것처럼

by 김진빈




얼마 전, 하드디스크를 뒤지다 스무 살 첫 여행으로 친구들과 떠났던 내일로 일정표를 발견했다. 한 번 아니면 영원히 아니라는 돌부처 같은 아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한글로 표까지 그려가며 만들었던 계획표. 문득 다시 보는데 숨이 턱 막혔다.


그 일정을 다 소화해냈던 걸로 기억하는데, 친구들은 무슨 죄였을까. 10분 단위로 일정이 잡혀있고 뭘 보고 뭘 먹고 어디서 잠을 잘지, 심지어 취침 시간과 기상 시간까지 빼곡히 적혀있었다. 화장실이라도 한 번 갈라치면 일정이 하나둘씩 뒤로 밀려 오늘 계획을 다 이행하지 못할까 발걸음을 더 재촉해야 했던 걸로 기억한다.


워낙 익숙하지 않은 것에 도전하는 걸 싫어했기에 처음 가는 여행지가 익숙할 정도로 그곳의 정보를 숙지했다. 중요한 건 여행지에 가서도 '재미있다', '신기하다'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사진과 글로 이미 모든 정보를 알고 있던 나는 마치 관광 해설사처럼 친구들에게 그곳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도 했다. 그 후로도 몇 번의 여행을 더 그렇게 다녀왔다. 당연히 모두가 그런 식의 여행을 하는 줄 알았다.






황새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진 뱁새



그러다 대학교 선배 L군을 만났다. 친구와 여행책자 하나만 들고 떠난 한 달 동안의 베트남 여행기.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계획이 없는 여행이라니. 뭘 보고 뭘 먹고 심지어 어디서 잘 지를 정하지 않고 떠나는 여행이 가능한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나중에는 남자니까 가능한 일 일거라는 말도 안 되는 결론까지 내리고 있었다.


솔직히 부러웠다. 무언가를 놓치면 놓치는 대로, 노숙경험까지도 즐길 줄 아는 그런 마인드를 갖고 싶기도 했다. SNS에 하루에도 몇 번씩 올라오는, 배낭 하나 짊어지고 떠난 세계여행 이야기를 들을 때면 괜스레 가슴이 벅차오르곤 하던 시기였으므로.


그리고 L군 조언에 따라 전주로 무계획 무박 여행을 떠났다. 무박임에도 전날까지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뭘 보고 뭘 먹어야지. 온통 머릿속엔 루트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득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스마트 시대에 살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전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전주의 대표적인 관광지를 찾았다. 한옥마을로 가는 버스 노선을 체크하고 나서야 마음 놓고 잘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때 전주 여행은 엉망진창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전동성당 앞에 도착했고 기념사진을 찍으려는데 메모리 카드가 없다는 알림 창이 떴다. 정신줄을 집에 놓고 온 모양이었는지 그대로 '멘붕' 상태가 됐다.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타고 온 길을 다시 걸어 삼성전자를 찾았고 거의 4만 원의 돈을 주고 32GB 메모리 카드를 샀다. 무계획 여행이라는 초조함에 정신이 팔려 항상 챙겨 왔던 소지품을 생각할 겨를 조차 없었던 것.


애초에 일정을 짜지 않았기에 늦춰질 일정도 없었지만 그날 전동성당 일대만 돌고 집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야 했다.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면 오목대라는 곳이 있고 전동성당 건너편엔 청년몰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내 동선이 전주 관광지의 전부인 줄 알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서울 어디쯤에 잠시 사진을 찍으러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조금 더 과장하면 점심을 먹으러 다녀온 기분이랄까.






풀리지 않는 여행의 딜레마



그 후로 내 여행은 딜레마에 빠졌다.


사전에 너무 많이 알고 가면 이미 갔던 곳을 다시 찾는 기분이 들어 설렘이 전혀 없었다. 이 관광지는 이 스팟에서 사진을 찍어야 하고, 이런 곳을 꼭 가서 체험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이 중 하나라도 하지 못하면 무슨 중죄를 지은 것처럼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다. 심지어 루트를 다 돌고도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으로 발길을 돌린 적도 많았다. 반대로 사전에 조사를 안 하고 가면 너무 못 보고 오는 것이 문제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 주위에 뭐가 있는지 그 지역에 어떤 음식이 유명한지 알 턱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고 아쉬운 여행이 됐다.


딜레마에 빠졌다며 투덜거리는 내게 L군은 이렇게 말했다.

"여행이 꼭 뭐가 남아야 되나. 그냥 그때 좋았으면 된 거잖아."

"그래도 이왕 가는 거면 뭔가 남겨오는 게 좋지 않아?"

"여행에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어."

아마 이 정도의 대화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행의 딜레마에 빠진 내 해답은 '선출발 후목적'이었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채우려 발버둥 친 몇 번의 여행을 더 다녀오고 나서 내린 결론이다. 결국 L군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존심 센 자아가 반쯤 타협안을 내놓았다. 반짝이는 것을 애써 찾으려 하지 말고 반짝이는 것을 만들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반짝인다고 믿는 순간 그곳은 반짝이게 돼있다. 돈과 시간을 들여 떠난 여행에서 뭔가 남겨와야 한다는 강박이 엄청난 스케줄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의 공허함을 만들었다. 그렇게 반드시 남들이 찾은 무언가를 나도 그대로 찾아야 하는 FM 같은 여행이 반복됐다.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 반짝이는 것은 그곳을 잘 안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잘 모른다고 해서 얻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내가 그곳에 부여하면 그 자체가 특별해지는 것이다. 그 깨달음의 순간에 방법이 아닌 마인드를 바꾸기로 했다. 그리고 무계획 장기여행의 결정판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






무계획 장기여행 프로젝트, 워킹홀리데이



다행스럽게도 무계획 장기여행엔 악동 3인방이라는 동반자가 있었다. 대학 4년 내내 손발이 척척 맞아 매번 프로젝트를 같이 해왔던 P양, L군, S군. 성향은 모두 제 각각이었지만 그래서 더 죽이 더 잘 맞았다. 어느 날 워킹 홀리데이를 성공적으로 다녀온 친구 이야기를 들은 L군이 말을 꺼냈다.

"나 워킹 홀리데이 가고 싶어."

"나도! 근데 혼자는 안 보내줄 텐데..."

"그럼 다 같이?"

"ㅇㅇ"

그로부터 정확히 6개월 후 졸업을 반 학기 남겨두고 호주행을 택했다. 정말 '무' 계획이었다. 각자 한 달 정도 버틸 수 있겠다 싶은 금액을 들고 무작정 시드니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 환승을 위해 머물렀던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와이파이를 잡아 시드니 중심가가 센트럴 역이라는 것을 찾았고, 센트럴 역에 내려 바로 앞에 보이는 백패커에 들어갔다. 설상가상 빈 방이 없었고 만원 돈을 내고 인터넷을 사용했다. 긍정의 악동 4인방은 그날 밤 나름 성공적인 정착을 자축하며 축배를 들었다.


사실 나는 악동 4인방 안에서 근심과 걱정의 아이콘이었다."근데 우리 어디서 자?"라는 나의 한 마디에 친구들은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와이파이를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세 명의 느긋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걱정꾼은 아직 일 년이나 남은 장기여행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20여 년 넘게 바뀌지 않았던 여행 성향(고집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이 단 몇 개월 만에 180도 변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제 여행을 갈 때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무계획 여행자들과 일 년여를 여행하고 나니 그동안의 여행을 돌아볼 기회가 많았다. 여행 뒤 찾아오는 공허함에는 나도 모르는 새에 이런 전제가 함께 했다. '다시 못 올지도 모르니까 많이 봐 둬야 해', '지금이 아니면 안 돼'라는 식의 욕심. 글을 써오던 나는 무언가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욕심과 호주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보다 많이 알아야 한다는 강박이 마음 가득 있었고, 친구들은 그런 내게 돈도 버는데 다음에 또 오자라는 말을 밥 먹듯이 했다. 한동안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라는 카피가 유행했을 때, 격하게 공감했다. 그리고 다이어트를 위해 치킨을 끊듯 좀 더 편안한 여행을 위해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마치 내일도 이 거리를 걸을 것처럼



알랭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여행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임을 말한다. 어떤 여행을 할지, 어떤 여행이 될지는 전적으로 여행자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그동안 늘 여행을 대할 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이라는 강박에 시달렸다. 목적지 자체에 집착하다 보니 어딜 가도 즐길 수 없게 됐다. 그리고 바다는 바다고 산은 산이요라는 식의 무의미한 여행이 계속됐다. 사실 한 발치만 물러서서 보면 바다 너머로 산이 보이고 산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여행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워킹 홀리데이를 다녀오고 몇 개월이 지난 후 독자 기자단을 모집하는 모 여행잡지 지원서에 이런 말을 쓴 적이 있다.

"여행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매일 걷던 집 앞 길도 여행을 떠나는 날 걸으면 여행길이 된다."


이제 내 모든 여행 전제로 '현지인처럼'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마치 내일도 이 길을 걸을 것처럼 미련 없는 여행을 추구하고 있다. 매번 새로운 여행지를 찾는 습관을 버리고 같은 장소를 여러 번 가는 여행을 즐기는 것도 같은 이유다. 1년간의 무계획 장기여행과 여러 번의 실패를 겪은 후 여행을 가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고, 여행하고 있는 그 시간에 목적을 두는 것이 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사람마다 저마다의 여행이 있고 그 안에 여행 철학이 있다. 다만, 예전의 나처럼 '반드시'라는 것에 얽매여 지금 걷고 있는 길에 반짝이는 보석을 발견하지 못하는 여행은 되풀이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매일 걷는 길이 오늘따라 특별하게 보이는 그 반짝이는 무언가를 찾는 여행을 위해 집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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