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나의 두 번째 꿈은 사과장수 였다.

엄마 호강시켜드릴꺼야

by 오잘줌마

1990년 나는 1종 보통 운전면허를 땄다. 내 나이 스물셋이었다. 내가 1종 운전면허를 도전한 건 사과장사를 해서 엄마 호강시켜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번에 운전면허에 합격하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내 이야기를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여자가 험한 일하면 못써. 곱게 직장 다니다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야지” 나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 떄문이었다.


아버지는 밥을 참 맛있게 드시는 분이었다. 숟가락 소복이 쌀밥을 담아 입에 넣으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는 밥을 맛있게 먹는 남자를 보면 지금도 아버지 생각이 난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직장을 오래 다니시지는 않았다.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지만, 딱히 기술이 있지도 않았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인가 아버지는 우리집에서 멀지않은 곳의 공사장에서 야방을 보셨다. 도구방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말을 들었다. 밤새 공사장의 도구를 지키는 일이다. 아버지께서 도구방 일을 하실 때 엄마가 도시락을 싸주시면 어둑한 길을 걸어 아버지께 도시락을 갖다 드리러 간 적 있다. 아버지는 도시락을 두고 가라고 하셨지만 나는 기다렸다가 빈 도시락을 가지고 왔다. 아버지는 밥을 맛있게 드셨다. 밥을 조금 남겨서 나에게 먹으라고 하셨지만 나는 집에서 먹었다고 먹지 않았다. 아버지가 보자기에 도시락을 동여매 주시고 조심히 집에 가라고 어느만큼 배웅을 해주셨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어두운 도구방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안쓰러워보였다.


겨울에는 건축일이 많지않으니 아버지는 겨울에는 주로 놀았다. 동네 아저씨들과 화투를 치고 술에 취하는 날이 많았다. 엄마는 눈이 쌓인 겨울에도 리어커 가득 과자를 싣고 학교 앞 문방구에 과자를 배달하셨다. 갈색 털신을 싣고 미끄러운 길을 리어커를 끌고 맡은 구역을 배달하는 일을 하셨다. 하루는 내가 다니는 중학교 앞 가게에 배달하러 오신 엄마를 하교하는 길에 마주쳤다. 엄마는 눈짓으로 그냥 가라고 했고 나는 친구들과 떠들면서 집으로 왔다. 가끔씩 아버지는 술에 취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엄마에게 트집을 잡아 다투셨다. 몇 번 이런 일이 있다보니 나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고생하는 엄마가 가엾어서 돈 많이 벌어서 호강 시켜드리겠다고 결심했다. 나이 들어서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사과장사하면 돈 많이 버냐고 물었다. 어이없다는 듯이 말이다.


사람은 경험한 선에서 생각하게 되는 거 같다. 내가 국 민학교 다닐 때 엄마는 과일 행상을 하신 적 있다. 집에서 걸어 중앙시장 청과물 상회에 가서 과일을 떼어 동네 가로수 길에서 파셨다. 나는 가끔 엄마를 따라가기도 했다. 엄마는 계절에 맞는 과일을 사서 함지박에 담아 보자기로 덮어두곤 청과물 한쪽 구석에 있는 과일을 따로 챙기셨다. 상한 과일을 주워서 우리가 먹었다. 복숭아는 어른 엄지손가락 만큼 갈색으로 물러있는 게 있었고, 참외는 곤 내가 났다. 참외는 속이 곯아서 파내고 먹어야했다. 나는 지금도 싱싱한 참외도 속을 파내고 먹는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과일은 최고 좋은 것을 먹는 게 좋다. 신혼 시절에 남편 월급의 반 이상을 저축하느라 생활비를 아껴야했다. 알뜰한 남편은 퇴근해서 떨이과일을 사러 몇 골목을 지나 과일을 사러 가자고 했다. 그때마다 나는 슬펐다. 하지만 형편을 알기에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한참 지나서 “나는 안 좋은 과일을 먹으면 슬퍼진다”고 말했더니 “개코같은 소리”라며 말을 막았다. 어릴 적 내가 본 돈 버는 일은 엄마가 하신 과일행상과 과자배달이었다. 어린 마음에 과일 파는 게 돈을 잘 버는 걸로 보였는지 나는 트럭을 사서 사과장사해서 엄마 호강시켜드리는 게 나의 두 번째 꿈이었다. 하지만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첫 번째 꿈은 아주 잠깐 꾸었었다.


1983년 8월 나는 전자회사에 입사했다. 주야 근무를 했다. 전국에서 중학교를 갓 마친 여공들이 컨베이어 벨트에서 나오는 제품을 쉴새없이 작업하는 일이었다. 화장실에 가려면 조장언니나 체커에게 부탁해야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일이었다. 이때 내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다. 나는 뾰루지가 자주 났다. 현장에 배치될 때 턱아래 눈에 띄게 크고 붉은 종기가 났었다. 누군가 화학약품이 좋지 않을 수 있다면서 나를 다른 업무를 하는 곳으로 안내했다. 완제품을 포장하는 일이라서 고약한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나는 얼굴이 동그랗고 볼이 발그스레 하다고 주임님들이 ‘미스 사과’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는 인사를 잘한다고 언니들이 예뻐했다. 일 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일도 잘한다면서 뽑혀서 ‘checker’ 라는 직책?을 받았다. 조장을 돕는 일이었다. 나는 체커가 되면서 컨베이어 라인에 앉지 않아도 되었다. 일은 수월했다. 완료된 제품을 확인하고 제출하는 일을 했다. 5년 쯤 근무한 것 같은데 힘든 기억이 별로 없다. 주야근무라 낮에 잠을 자지 못하면 졸린 것 빼고는 크게 힘든 일도 없었다. 동료들이 야식이 먹고 싶다고 하면 회사 담장 뒤에 있는 토스트 트럭에 가서 몰래 제품 담는 박스에 토스트를 사서 잠깐 쉬는 시간에 창고나 바깥에서 먹기도 했다. 야간 근무때 먹었던 육개장 사발면은 국물을 남지기 않고 나눠 마시기도 했다.


전국에서 올라와서 우리는 기숙사에서 생활을 했다. 하루는 복희라는 아이가 나에게 말했다. 자기 엄마가 생선행상을 해서 고생하는데 아버지는 술주정하고 속상하다고 하면서 울었다. 나는 말없이 이야기를 들었다.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참 이야기 하고 나서 그 아이가 말했다. “언니는 청소년 상담사가 되어도 잘할거 같아요” 청소년 상담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위로하고 힘이 되는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청소년 상담사’ 내가 잠깐, 아주 잠깐 꾼 첫 번째 꿈이었다. 어쩌면 나는 첫 번째 꿈을 이룬 것이다. 나는 십오년째 리더십 강사로 일을 하고 있다. 주로 만나는 대상은 대학생과 ceo 이다. 지금은 대학에서 외래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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