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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잘 Mar 12. 2024

43. 깨볶다가 세일러문

고마운 셋째 형님은 아직도 삐졌나

오래 서서 꽤 한참을 볶았다고 느껴졌었다. 수십 번 볶는 동안.


타이머를 맞추어 시간 재보니 15분 정도 걸린다.


측정하면 예측가능해서 수월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레시피.


"이 쪼그만한 게 씻을 게 어딨어?"


씻지않고 그냥 볶았다가 돌 씹혀서 다 버렸다는 작은언니가 생각났다.


"언니~깨는 땅에서 거두잖아. 흙과 돌이 들어가니까 씻는거야."

 

사실 나도 처음엔 잘 몰랐었다.




내가 신혼때 초록한 시금치가 깨끗해보여서 휘리릭 삶고 슬슬 씻어 무쳤다.


"아! 돌"


"어머~형님 죄송해요"


"앗~"


"형님 죄송해요"


"올케 미안하지만 그만 먹을께"


째 시누님 산바라지 해드리다가 미안해서 나는 한동안 시금치 무침에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 형님이 물미역을 초고추장 찍어 먹고 입맛이 돌았다고 했다.


나도 임신 8개월이라 배가 불렀지만, 우리 단칸 신혼집 방이 뜨뜻하다는 이유 하나로 시누님 산후조리를 자청했었다. 1월에 조카가 태어나고 3월에 우리 첫 아이가 태어났다.


갓 태어난 조카가 기저귀 발진이 생겨서 욕실에 빨래판 놓고 앉아 면기저귀 빨아서 장농 손잡이랑 단칸방에 걸 수 있는 데는 어디든 하얗고 긴 기저귀를 걸었다. 내 배도 남산만했지만 셋째 형님이 좋아서 힘든 줄 몰랐다.


 "쟤를 맡기고 내려가려니 니가 밥이나 잘 챙겨줄란지 모르겠다"


시어머니께서 시골로 내려가면서 입맛 없어서 밥 안먹는 형님걱정을 하면서 나에게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눈물이 쏟아지려해서 화장실로 가는데 "엄마도 참" 하는 형님 목소리가 들렸다.


27년 전 추석에 막내아가씨가 시골에 내려와서 셋째 형님이 주셨다고 선물 상자를 건넸다. 시어머니께 보여드렸더니 '좋겠구만' 한마디 하셨다. 그때 나는 둘째 아이를 임신했었다.


"올케, 없는 집에 시집와서 엄마랑 식구들에게 잘해줘서 고마워."


나는 형님의 칭찬을 '앞으로도 잘해달라'는 말로 해석하고, 시어머니가 야속할 때마다 팔찌를 더듬었다. 세일러문 팔찌라 불린 내 팔찌를 조카 경미가 탐냈다.


결혼생활 수십 번 아니 수백번 싸우고 지지고 볶는 동안 '그만살까' 수천 번을 생각했다. 그래도 감사한 일이 삶 곳곳에 묻어있다니, 나 지금 행복한가보다.


지금 행복하면 과거 아픈 일들이 추억이 되지만, 현재 행복하지 않으면 과거 별 일 아닌 것 같은 일도 더 서럽고 아프다. 그래서 내가 주부 대상 강의할 때 '기어이 행복하세요' 라고 부탁한다. 단짠한 인생 레시피.


외출할 일 있으면 오랜만에 세일러문 팔찌를 착용해야겠다. 세일러문 팔찌를 차면 나는 마음이 숙연해진다. 옥수동 셋째 형님은 잘 계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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