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대로라면 다음주 월요일에 할 일을 당겨서 오늘 해내려고했다. 아침 공복에 노트북을 켰다. ppt를 수정하다가 대용량 하드디스크를 열었다. 찾으려던 자료가 뭐였는지 잊어버리고 이것저것 열어보느라 시간이 한참 지났다. 다음에는 메모지에 #검색어를 적어놓고 정보를 찾아야겠다.
3주차 수업 녹화를 미리 해두어야 월요일에 만날 같이가치 팀과 오랜만에 대용량 수다를 떨고 소량의 아이디어 피드백을 할 수 있다. 오후에는 주방 수전 as가 오기로 했다. '오늘 할수 있을까'
남편이 전화를 했다. 이른 아침에 출근하다가 귀가하는 아이를 봤다고 어쩔꺼냐고 했다. 아침에 깨웠는데 출근 잘했으면 된거아니냐고 했다.
"당신한테 말하는 내가 잘못이지"
전화를 뚝 끊는다. 공감하고나서 판단하거나, 둘이서 딸아이 흉을 한바가지 봐줬어야 하는건가? 갑자기 배가 고프다. 한 달전 쯤부터 냉장고를 열면 입맛이 사라진다. 채소칸에서 시들어가는 부추와 쪽파가 보인다. 정읍 둘째형님이 주신 쪽파라서 버리면 안된다.
초록창에 검색했다. 쪽파랑 부추도 냉동보관가능하단다. 파 한줌과 부추 한줌에 부침가루 한 국자를 풀어 채소전을 부쳐서 점심을 대체했다. 서재에서 나올 때는 나에게 맛있는 아점을 먹이려 했는데 포기했다.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자" 심지어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했는데 성공하지못했다.
'부침개는 왜 이렇게 눅눅하게 된거야.' 맛대가리없는 표정이 거울 없는 나에게도 보일지경이다. 부추랑 쪽파를 승덩숭덩 썰어 지퍼백에 넣고 공기도 가득넣어 냉동실에 넣었다.
'나가자'
수업 녹화하기엔 시간이 애매하고 몸도 무겁다. 녹화는 내일하고 걸으러 나가자. 날씨를 검색하니 영상 10도가 넘고 창 넘어숙지산에 햇살도 좋다. 우리집만 어둡다. 내가 파 다듬는 동안 햇살 30분이 우리집에 다녀갔나보다.
걷기 시작하고 얼마 후 웃음소리가 들렸다.할머니랑 손자가 나누는 대화가 정겨워얼른 뒤돌아서 찰칵 도촬했다. 사진을 확대해서보니 누워있는 두 아이 모습이 너무나 평화로워보인다. 얼굴이 자세히 나오지않아서 다행이다.
조금 더 걷다가 민하언니를 만났다. 매트필라테스를 같이 하는 언니다. 내 수요일 일정으로 3월 한달을 쉬고 있다. 선아샘도 보고싶다고 두 번이나 말했다고 한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언니는 만보를 걸으려고 산길을 돌고돌며 오르막길은 뛰어간다고 한다.
숙지산은 맨발걷기 좋은 나즈막한 우리동네 앞산이다. 산에 매일 오시는 아저씨 두 분이 맨발걷기 길을 정돈하셔서 점점 더 예뻐지고 있다. 나는 아저씨들을 만나면 인사를 한다. "길을 걷기좋게 예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맨발로 걸으면 걸음이 느려진다. 작은 돌맹이도 잘못 밟으면 '아야' 소리가 크게 나온다. 나는 언제부턴가 신발을 신고 걸을 때도 돌맹이가 보이면 주워서 가장자리에 놓게된다. 날이 따뜻해지니까 거미가 나왔다. 바닥을 보고 걷다보니 거미를 피해 발걸음을 옮긴다.
맨발로 걸으면 오감에 좀 더 집중하게된다. 신발이라는 도구를 벗고 맨발로 땅을 디디면 차분해지는 기분이다.
양지 바른 곳 나무에 아기새 주둥이같은 새순이 나오기 시작했다. 땅에는 쑥과 돌나물이 삐죽 나온다. 남편이 사무실 근처에서 찍은 홍매화를 가족톡에 올렸다.
기분이 가라앉을 때는 일어나서 걷자. 걸으면서 햇살맞이, 햇살 맞으며 걷기. 운이 좋으면 딸아이가 좋아하는 전라도식 돌나물무침 해줄 한웅큼 돌나물을 뜯을 수 있겠지. 봄볕에는 며느리 내보낸다는데 썬크림은 잘 발라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