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고 다니니 사이비만 붙던데요
야근을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집중을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상사가 툭 말을 던진다.
"표정이 왜 이렇게 심각해~ 좀 웃어."
나는 화들짝 놀라 거울을 확인했다. 내 표정이 그렇게 심각했나? 그래 일터에서 너무 경직된 표정은 좀 그렇지. 좀 웃자.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것을, 야근을 마치고 퇴근을 하려는데 그는 굳이 또 내 신경을 긁었다.
"저기 OO 씨 좀 봐. 웃고 있으니까 얼마나 좋아. 좀 웃어."
"하... 이게 그냥 제 원래 표정이에요."
가뜩이나 야근으로 피곤해있던 나는 귀찮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그때부터였을까 그와 나의 사이가 일그러지기 시작한 것이. 지금은 그의 얼굴을 볼 필요가 없는 사이가 됐지만, 당시에는 고민이 많았다. 그냥 좋게 좋게 넘어갈걸 그랬나 후회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밤 9시까지 야근을 하면서 입가에 잔잔한 미소까지 띠며 일을 해야 한다는 그의 강요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나의 미소를 당연히 받아 마땅한 서비스쯤으로 여긴다.
그들은 말한다. 웃으면 복이 온다고. 억지웃음을 짓는 것만으로도 행복 호르몬이 뇌에서 분비된다는 과학적 팩트도 주섬주섬 들이민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내 감정을 생각하는 감수성 풍부한 사람들이었다면 굳이 웃으라고 강요하지 않을 테지. 그들이 나에게 웃음을 강요하는 진짜 이유는 그저 나의 무표정이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째서인지 나의 호의적인 태도와 상냥함은 그들에게 있어 스스로 얻어내야 하는 것이 아닌 당연한 권리가 된다.
그들은 웃지 않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너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 웃지 않는 걸 보니 나에 대한 호감이 없는 것 같아. 미소를 지음으로써 내가 너를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좀 증명해봐. 본인 스스로가 호감 가는 인간이라는 확신이 없으니 괜히 남들에게 애교가 없다니, 싹싹하지 않다니 코멘트를 달아가며 강제로 미소를 요구한다.
그들이 간과하는 게 있는데, 웃지 않는 인간이란 애초에 없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저 저마다 다른 미소 포인트가 있을 뿐이다. 나로 예를 들자면 저 멀리서 아장아장 걸어오는 비숑을 봤을 때, 기차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봤을 때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온다. 그쪽이 비숑만큼 귀엽지 않아서 내가 미소를 안 짓는 게 어찌 내 잘못이겠나.
더불어 그들은 말한다. 넌 웃을 때 더 예쁘다고. 언듯 보면 단순한 칭찬인 것 같지만 사실 이 말은, '너는 사람들에게 분명 예뻐 보이고 싶겠지? 그런데 웃는 모습이 예쁘니까 더 웃어줘'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맞는 말이다. 웃는 얼굴이 아무래도 호감이 가고 긍정적인 사람을 옆에 두고 싶은 건 당연한 이치리라. 여기에 우리가 때때로 '일부러' 웃지 않는 이유가 있다. 잘 보이고 싶지 않으니까. 괜히 웃어줬다가 상대가 잘못된 시그널로 받아들이고 사적으로 연락하는 게 무서우니까. 다가가기 쉬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줬다가 하고 싶지도 않은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 게 귀찮으니까.
정리하자면,
1) 로봇도 아니고 항상 웃는 얼굴을 장착하고 있는 게 더 이상하다.
2) 나에게 웃으라고 하는 인간들은 내가 행복하길 바래서 그런 말을 한다고 하지만 진짜 내 감정에 관심이 있었다면 웃으라고 강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3) 내가 웃지 않는다고 내가 행복하지 않은 건 아니다.
4) 설사 기분이 안 좋아서 웃고 있지 않다고 해도 그것 역시 전부 내 감정이고 나는 내 감정을 느낄 권리가 있다.
5) 상황에 따라 우리는 때로 웃지 않음을 일부러 '선택' 한 것이다.
나도 웃고 다니려고 노력해봤다. 하지만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다녔던 나에게 되돌아온 것은 자신을 보고 비웃는 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의 차가운 반응과 원체 웃는 상도 아니면서 얼굴 근육을 혹사하다 보니 얻은 입꼬리 경련뿐이었다. 더불어 내 가짜 웃는 얼굴은 도쟁이와 사이비를 끌어들이는 마법의 자석이었다. 미소는 가끔 위험한 인간들을 꼬이게 한다. 정말이다.
사랑스러운 직장 동료 언니가 내 자리에 초콜릿을 하나 두고 갔다. 쓰윽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진심으로 나를 위하는 사람은 명령으로 미소를 강요하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내 웃음을 이끌어낸다. 누군가처럼 항상 에너지가 넘치고 생기발랄한 인간이 아닌지라 나는 한정된 내 미소를 아껴두려 한다. 그 미소는 오직 존재 자체 만으로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어서 누가 툭하고 내린 강요에 내어줄 재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