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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민 Sep 16. 2024

나의 평행우주들에게

애 둘, 그것도 세 돌도 돌도 안된 애 둘 아빠가 추석을 끼우고 10일의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날이 갈수록 말이 늘어 정신적으로 나를 갖고 노는 첫째와 날이 갈수록 혼자 걷는 걸음수가 파파팍 늘어 체력적으로 나를 갖고 노는 둘째를 두고 말이다. 힘없는 월급쟁이가 어쩌겠냐만 그래서 처음 이 출장 계획을 들었던 올 초에는 쿨하게 다녀오라고 했지만 지금 와서 몸과 마음의 에너지 모두 끌어 쓰고 있는 나는 정말이지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잘 다녀오라고 쿨하게 보냈지만 시차를 두고 날아오는 남편의 안부 메시지를 모조리 씹고있다. 영상통화도 데면데면, 말로는 나 화 안 났어 하지만 말투와 어조 그리고 플로우가 극도로 날카롭고 무미건조해서 누가 봐도 화난 게 뻔히 보이는 나는, 그래서 바닥 같은 내 모습을 보는 게 너무너무 괴로운 나는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육아와 가사 그리고 명절 이슈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 며칠 전부터 와계시는 시부모님이 잠든 시간 혼자 몰래 술을 마시는가 하면(지금도...) 낮시간에는 늘 잔잔하게 불행하다는 분위기속에 나의 뇌와 마음을 담궈놓고 있다. 그게 내게 얼마나 해로운지 너무 잘 알면서도, 실제 그 악영향을 이래저래 느끼는 순간 깜짝깜짝 놀란다. 정말 해로운 일이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이 잔잔하게 불행한 분위기 속에서의 잠영을. 


비정상적으로 덥고 습한 날씨도 한몫한다. 종일 잔잔하게 찝찝하고 습하다. 며칠 전부터 콧물을 흘리는 아이들 때문에 에어컨을 못 켜는 상황까지, 대체 내게 왜 이렇게 잔인한가, 올해 추석은. 심지어 붙어있는 연휴야... 너무 길어... 돌아버리겠어... 정말 이상한 이유를 갖다 붙인 채로 남편을 미워하고 돌아오면 쏘아붙일 장문의 시나리오를 쓰길 며칠째, 이 지난한 편두통을 끝내고 싶은 마음에 남편에게 솔직히 말했다. 이번 출장에서 돌아오거든 나에게 적어도 2박 3일의 휴가를 달라고. 양가 부모님의 도움 없이, 오직 남편 너의 힘으로 나의 자유시간을 만들어 달라고.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받는다는 건 결국 양가 어머니들이 고생하는 게 너무 뻔하고 그럼 나는 또 미안한 마음에 온전한 휴가를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그리고 너도 똑같이 해봐야 정신 차린다는 진짜 더 깊은 뜻이 있기도...)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나의 치사하고 지질한 망나니파워가 바닥을 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이제 끝났어. 다 솔직하게 토해냈다. 이제 나 혼자 조금씩 회복할 일만 남았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세 번째이자 오늘의 마지막 샤워시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너무 힘들어서 그렇지 사실 크게 보면 내가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거의 가진 셈이라고, 지금 인생이. 아주 사소한 선택들이 이어진 거라 조금이라도 거기서 빗나갔다면 도저히 만날 수 없었을 것이 지금의 시간이라고. 내가 선택한 나의 가족과 그 덕에 만난 나의 아이들 그리고 작은 우연들이 이어져 만난 동시세계까지. 이 두 가지가 없이 살아가고 있을 이 넓은 우주 어딘가에 있을 다른 버전의 나님들. 입사 후 왔던 기회를 잡아 보통의 성공이라 불리는 자리에 갔을지도 모를 나, 연수 동기로 만나 세상에 이렇게 나와 잘 맞는 사람이 있다니! 감격스러웠던 시간을 보낸 누군가와 가정을 꾸렸을지 모를 나, 퇴사를 하자마자 생각했던 지금과의 다른 진로를 선택해 또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모를 나. 사회초년생이었던 20대 중반에서 시작한 상상의 가지는 분기점의 수가 어마어마했다. 


나머지 평행우주의 내가 모두 좋은 선택만 하고 성공적인 결과만 얻었다고 가정을 했어도, 어떻게 갔어도 결국 우리 아이들과 지금까지 내가 써온 시들은 만날 수 없었다. 물론 그 어느 평행 우주에서도 누군가를 만나고 다른 아이들을 만나고 다른 시를 썼을 수 있겠지만, 지금의 아이들과 지금까지 나의 시를 아는 이상, 정확히 딱 이들이 아니라면 의미 없다 느낄 정도로 나의 지금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고 있다. 


이만큼의 사랑을 확인한 나, 우당탕탕 2024 추석 미국 대 출장 소동은 아주 먼 훗날 내 기억에 어떻게 남을까. 오늘 한 생각, 그리고 지금 쓰는 글로 미뤄 짐작하자면 지질한 바닥을 치고 조금은 올라간 상태로 기록될 것 같다. 그래도 다행이다. 바닥에서 남는 게 아니라서. 


이 잔잔하게 불행한 분위기 속에서의 잠영을 끝내고 이제 물 밖으로 나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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