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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못난인형 Apr 08. 2020

추억의 장소, 부천시 원미동


허름한 슬레이트 집, 집 앞에 자그만 텃밭, 열아홉 마지기의 논이 우리 집 전 재산이었다. 자식을 줄줄이 다섯이나 낳고도 술과 화투 치는 재미에 날 새는 줄 몰랐던 아버지가 등록금이며 육성회비, 자잘한 돈이 한창 들어갈 중고등학교생이 셋이나 되고 아래로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두 명이 동생이 치고 올라오자 하루아침에 정신을 차렸다. 만약 그때 상경하지 않고 여전히 화투판에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더라면 몇몇 친구들처럼 중학교 졸업 후에 공장에 가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1979년도에 적은 돈으로 그나마 방을 얻을 수 있었던 곳은 작은 이모가 시집와 살던 경기도 부천시 원미동. 우리 가족이 이불 보따리만 들고 상경한 79년도는 물론 90년대 초만 해도 중상동은 논밭이었고 원미동도 복숭아밭 천지에 집이 별로 없었다. 인구에 비해 주택수가 부족했기에 자그만 방 한 칸에서 우리처럼 무작정 상경한 가족들이 개미 떼처럼 모여 살았다. 


부흥시장 입구 장미연립은 처음 상경해서 00이네와 한 집에서 살았던 곳, 금강시장 입구에 1층은 장마 때 비가 들이쳐 물을 퍼내던 곳, 그 옆에 집은 큰 방을 지나면 또 다른 방이 나왔던, 구조가 특이했던 곳. 원미산 가는 길에 보이는 허름한 2층 집과, 아래로는 우리가 살았던 지하방을 연상시키는 곳도 보인다. 


영화 '기생충'을 보며 원미동에서 가장 부자이던 염사장네에서 일하시던 부모님 모습이 떠올랐다. 원미동이란 동네에 어울리지 않게 넓은 잔디마당을 품은 2층 양옥집에서 우리 가족은 기생하며 살았다. 엄마는 가사도우미로, 아버지는 부천시 환경미화원으로(엄마의 입김으로 후에 경비원으로 자리를 옮겨 주기도 했다). 


결혼해서도 엄마에게 아이들을 맡기느라 오랫동안 원미동을 벗어나질 못했고 그곳에서 친구를 사귀고 아이들을 키웠으니 원미동이 제2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요즘 재개발로 인해 오며 가며 보았던 예전 집들이 많이 없어졌다. 추억을 떠올릴 기회도 그만큼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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