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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therine May 22. 2020

돌봄#8 치유를 막는 인지왜곡(1)

예수님을 보는 도마의 관점/ 믿는 자가 다른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것

요한복음 10장, 예수님과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하다 분노한 유대 사람들 때문에 자리를 피하게 된다. 신성모독이 이유였다. 오늘 나에게 주신 말씀은 그 바로 다음장인 요한복음 11장,


11장 1-6절을 보면 어떤 병자,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인 마리아와 마르다가 소개된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그녀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던 여인이다. 그들은 오빠가 병들자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그 소식을 전하는데 문제는, 8절이다.


요 11: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아마 제자들은 놀랐을 것이다. 설마 진짜 가시겠어, 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예수님과 동행했던 제자들 중 '도마'의 발언에 주목해 보자.


요 11: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도마는 왜 저런 말을 했을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는 예수님을 너무 사랑해서 '혼자 가시는 것을 볼 수 없다'는 마음. 둘째로는 비약적인 인지왜곡. '예수님은 항상 너무 말이 안 되는 희생을 요구하시네', '큰 선을 위해 나와 제자들의 목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가?', '그래, 나 하나 밀알이 되어서 썩어지는 게 복음이라면 그래야겠지' 이와 같은 생각의 끝에 16절과 같은 발언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같은 상황, 내가 도마였다 상상해보자, 내 마음과 생각 속에도 인지왜곡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현재 호주에서 유학생 생활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빼고는 타국에서의 삶이 단 하루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만큼 닻을 내리지 않은 조각배가 된 것만 같다. 얕은 바람에도 휙 뒤집어질 것처럼 불안하고 부서지기 쉬워 보인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하나님과 함께 걸은 광야 같다.


다짐했었다.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자. 나에게 보내주시는 훈련대장들을 잘 겪어내자. 그 가운데서 성장하고 광야 학교를 졸업하자.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주님 정하신 기한이 찰 때까지 훈련받았던 것처럼. 요셉이 주님 말씀하실 때까지 그의 삶에 짙은 흔적을 남기고야 마는 고난들을 그의 손으로 끊어내려 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내 삶의 목표는 돈이 아니다. 명예도 아니다. 나는 더 깊이 있는 내 삶의 존재 목적을 알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세상의 성취들은 내게 동기부여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배열하신 광야라면, 그 길을 걸을 때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많이 지쳤다. 두 눈을 감아도 하나님의 이름만 입안에서 맴돌 뿐 나는 내가 왜 지쳐버린 건지, 이번 훈련의 강도가 단지 세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16절의 도마와 같은 발언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지쳤다. 분명 하나님 안에서 '진짜' 위로하심을 받아왔다면, 아니 받고 있다면, 그 수많은 훈련대장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나는 이렇게까지 지치지 말았어야 한다. 상대의 행동과 언행에 상관없이 내가 하나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런 상태라면 말이다. 


김유비 목사님은 16절 도마의 말을 통해 인지왜곡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도마는 예수님께서 4절에 말씀하신 것을 놓쳤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의 전쟁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임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흑백논리로 생각은 전개되었다. 이곳은 안전한 곳이고 유대 지역은 위험한 곳이다. 더 심한 인지 왜곡은 도마 자신이 예수님을 지켜드리고 있다는 착각이었다. 


이거다. 도마와 같은 인지왜곡. 그 왜곡된 생각이 예수님을 비틀려 보이게 했던 것이다. 실은 예수님이 그 관계 가운데 나를 지키고 계셨고 지금도 지키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게 오늘 아침,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나의 마음에 자리한 의문을 풀어주셨다. 


부쩍 이런 묵상을 많이 하고 있다. 죽는다는 것, 자아를 내려놓는다는 것, 믿는 자로써 억울한 상황 가운데 책략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그대로 순종하여 고통당하는 것 말이다. 그 상황에서 파생되는 아픔과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께서 받으실 영광의 무게에 대하여. 레위기 5대 제사의 번제 제물이 되어 나의 전부를 올려드린다는 것은 진실로 나의 육체가 지배당할 정도의 마음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걸까 하고. 궁금했었다.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이런 상황과 환경을 허락하시고 무엇보다 기막힌 타이밍에 주님 뜻을 알려주시고 세상의 어떤 선생님도 어떤 목사님도 하실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원리를 깨닫게 하심에 감사드린다. 

앞으로는 내 힘으로 나의 어떠함으로 아주 작은 하나라도 단 한순간도 버티려고 하지 않기를, 그런 시도조차 생각조차 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모태에서부터 나를 계획하시고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이렇게 한걸음 더 알아가면서 더욱 사랑받게 하시니 감사하다.


https://www.godpeople.com/?GO=tv_detail&tv_mv_no=15678

https://www.youtube.com/watch?v=VOMRdY76BJ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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