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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therine Jun 02. 2020

하나님의 쉼표

여호수아 5:1-15 한홍 목사님

1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 모든 왕들이 요단강의 기적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 반면 이스라엘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타이밍으로 볼 때 지금이 최적이었다. 군사적으로 봤을 때 전쟁을 해야 한다면 바로 지금이, 적기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전혀 다른 작전 명령을 내리신다.


2 그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갑자기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할례를 명하신 것이다. 할례의 기원은 700년 전 아브라함에게로 올라간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 약속해주셨고, 그 징표로 모든 이스라엘 남자아이들은 태어난 지 8일 안에 생식기에 할례를 받아야 했다.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된, 하늘에 속한 특별한 존재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말씀에 순종하며 살라는 표징이었다.


4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5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 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7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할례는 지켜지고 있었다. 그런데 가나안을 코 앞에 두고 그 계획이 광야로 틀어져 버린 후에는 지켜지지 못했던 것이다. 연장된 광야길에서 태어난 2세대들은 할례를 하나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는 거룩한 징표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백성들이 할례 받을 순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할례를 잠시 중단시키셨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며 하나님의 징계도 공식적으로 끝난 이 시점에 다시 할례를 받게 하신 것이다.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길갈'은 히브리 원어로 '굴러가다'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수치를 뒤로 굴러가게 하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출애굽을 한 것은 40년 전인데 왜 이제야 그 시절의 수치가 떠나가게 하시는지 궁금해진다. 이유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데 아무리 종 문서를 불태운다 하더라도 그들의 몸 안에 배어있는 노예근성과 나쁜 습관들을 제하여 버리기까지 기다리셨던 것이다. 자신감 없는 마음, 이웃사람들을 탓하고, 무기력하게 살아왔던 그들의 삶이 진정으로 변화할 때까지 훈련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이름은 있었지만 자격은 갖추지 못했던 그들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다.


당시엔 진통제도 제대로 된 약도 없었을 것이다.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 할례를 받은 사람의 수는 60만에서 70만의 장정들이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모든 전투 병력이 무기력하게 다 누워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고통 속에 누워있는 동안 그들 안에 잔재해있는 노예근성과 죄의 본성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400년 노예생활의 흔적을 광야 40년을 통해 끊어내는 것, 옛사람을 완전하게 끊어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 결단을 해야 자유와 능력이 오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할례는 신약시대에 세례로 연결된다.


골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함께 장사되고,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는 것이 할례와 세례의 중요한 정신이다. 옛사람이 죽고 성령의 새사람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 죽음과 부활의 정신이다.


옛사람의 완전한 죽음, 세상의 군사 작전이 아닌 하나님의 오더를 받는 민족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과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옛사람은 죽었다. 성령의 새 사람으로 살 것이다. 삶의 모든 단계 단계들마다 이 정신을 되새기고 선포해야 한다.


또한 이 사건은 엄청난 믿음의 테스트였다. 적장이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이 이스라엘 백성을 전멸시킬 타이밍이었다. 이때 하나님이 적군들의 마음속에 엄청난 두려움을 심어주시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몰살당했을 것이다. 어차피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가나안에 살고 있는 왕들과 여리고 성의 전력 앞에 비교도 안 되는 전력이었다. 바꿔 말해, 하나님 없는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교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함께하시면 모든 것이 된다. 인생의 힘든 고비고비들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의지해야만 한다. 진짜 하나님을 믿는다면 무장한 적 앞에서 모든 무기를 내려놓고 나의 생명까지 내어 맡길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의 테스트이다.


할례만큼 중요한 유월절 성수, 율법에 따르면 오직 할례를 받은 백성만이 유월절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가데스바네아 반역으로 할례를 받지 않아 왔던 38년 동안 유월절 예배도 없었던 것이다. 정복 전쟁 직전,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유월절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절기를 다시 지킨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40년 전 출애굽 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지키는 이 절기는,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가 죽음의 천사로부터 그들 모두를 살렸고, 바로의 마지막 고집을 꺾어 버렸던, 철옹성과 같은 애굽에서 그들을 탈출할 수 있게 했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들의 건국 역사는 어린양의 보혈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독립전쟁을 통해 해방을 쟁취한 것이 아니다. 예수 어린양의 피로써 독립할 수 있었다.


마귀가 옛사람의 잘못을 빌미 삼아 우리를 협박할 때, 두려움이 몰아칠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보혈에 빚진 자.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고 자유함을 얻었다. 마귀가 더 이상 나를 협박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죄는 세상 어떤 힘으로도 끊을 수 없다. 교육으로도 돈으로도 불가능하다 오직, 어린양의 보혈로 가능하다. 과거의 끔찍한 일들이 생각날 때마다 어린양의 보혈에 의지해 새로운 정체성을 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과거의 죄로부터 완전한 해방,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모든 전쟁에선 승리가 되는 어린양의 보혈에 의지해야 한다.


보혈은 능력이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하늘의 능력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회의하고 노력해도 안 되는 일들이 보혈을 선포하면 풀어지고 해결될 때가 있다. 어린양의 피는 우리를 덮고 보호한다. 살아있는 교회는 항상 십자가를 설교하고 그 은혜를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마귀는 사람 많은 교회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보혈이 흐르고 있는 교회는 두려워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면한 전쟁은 창과 칼에 달려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원수 마귀가 우울하고 악한 생각들, 부정적인 낮은 생각들을 심으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보혈을 선포하고 그 함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보혈의 찬양을 부르고 보혈의 은혜 아래 거해야 한다. 자녀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하루하루를 위해 보혈을 선포하면 하나님께서 앞서가시며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


11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12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할례와 유월절 의식은 다시 시작되게 하셨는데, 만나는 그치셨다. 하나님은 참 우리 인생에 뭐를 더하실 때가 있고 빼실 때가 있다. 만나는 풀 한 포기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여 살린 하나님의 생명 양식이었다. 매일 내리던 만나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의 곡식을 먹은 그다음 날부터 그쳤다. 그리고 타이밍을 보라.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가 막 추수철이 시작되었을 때이다. 이 추수철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굶어 죽었을 텐데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인생을 완벽하게 인도하신다. 그래서 먹여 살리는 것이 통치의 기본인데, 여호수아와 모세는 한 번도 그런 문제로 머리를 아팠던 적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다. 실로 그렇다. 그 방법은 달라질 수 있어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농사를 짓고 땀 흘려 소산을 먹어야 했다. 하나님은 축복을 주실 때 믿음의 수준에 따라 패턴을 달리하신다. 점점 믿음이 성숙할수록 혼자 힘으로 설 수 있도록 영적으로 성장시키시는 것이다. 가나안 땅은 영적인 군대,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다. 우리의 믿음의 수준을 돌아보아야 한다.


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총사령관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모두 준비시켜 놓고 홀로 여리고 성 가까이 나갔다. 여호수아는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200만의 백성들을 매 순간 기억하고 있었다. 기적처럼 요단강을 한 걸음 한 걸음 건너왔지만 본 게임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전쟁을 체험했지만 공성전은 처음이었다. 고대 전투에서 평야 전투와 공성전은 하늘과 땅 차이다. 해발 200m 위에 있는 여리고 성, 더군다나 외성과 내성이 견고하게 둘러싸고 있는 견고한 성이었던 여리고를 바라보며 공성 장비가 없었던 여호수아는 홀로 생각에 잠겨 끙끙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높은 여리고 앞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진 것이 너무 적었기에 여호수아는 아마 절망감에 사로잡혀 가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때 한 사람이 칼을 들고 여호수아 앞에 서 있었다. 감히 총사령관 앞에서 칼을 빼들고 서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여호수아가 누군지 모르거나, 적군일 수 있었다. 그는 담대하게 물었다. '우리를 위하는 자인가, 적을 위하는 자인가?' 이 질문은 우리 모두의 질문 이기도 하다. '여당이냐, 야당이냐' '우리 편이냐, 아니냐' '전라도냐, 경상도냐'. 우리는 옳고 그름의 문제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편인지 아닌지를 자주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생각이 아니라고 하신다.


14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수아는 적군 아니면 아군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제3의 군대인 하나님의 군대가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의 영적인 파워 앞에 여호수아는 칼을 떨어뜨리고 엎드렸다. 이것이 경배의 모습이다. 여호수아는 바로 알아보았던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이를 천사라고 해석하는데, 천사들은 말씀 안에서 예배를 받지 않는다. 예배를 하려 하면 자기들은 천사라고 손사래를 치는 것이 그들이다. 즉, 예배를 받으셨다는 것은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바로 하나님 그 자신이셨던 것이다. 여호수아가 워낙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니 금방 알아보았던 것이다.


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어디서 많이 들었던 말이다. 40년 전 모세에게도 하셨던 말씀. 하나님의 리더가 세워지는 것에는 패턴이 있다.  패턴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과 동격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다. 무릎 끓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어느 편인지를 따지지 말고 눈을 들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보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항상 '하나님 내 편 돼주세요'이다. '하나님 확실하게 나 좀 도와주세요.'와 같은 기도를 더 이상 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를 맞추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하나님 편인가, 그것 하나만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느 한쪽 일방적으로 편들어 주시는 분이 아니다. , 이스라엘도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 징벌하실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여호수아는 그때 깨달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부릴 수 있는 도깨비방망이가 아니구나. 하나님은 나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지휘관이 되려고 오신 것이구나. 중요한 것은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내 삶이 절대적으로 무기력한 존재임을 남김없이 인정하는 데에 있다. 여호수아는 지휘권과 책임감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넘기고 자유해졌다.


여리고 성을 자기가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밤에 고독이 시작되고 잠이 달아나지만 하나님께 삶의 핸들을 내어드리면 그때부터 마음에 강 같은 평화, 회복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의 불행은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된다고 붙잡고 있는데서부터 시작된다. 가정, 자녀, 삶, 모든 것, 지휘권을 넘긴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때부터 평안이 내 삶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에 가까이 다가가 눈을 들어 여리고를 보지 않고 그 위에 더 크신 하나님을 보았던 여호수아처럼 우리도, 문제 자체를 기피하지 말고 가까이 다가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전심을 다해,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기를 평안해질 때까지 하여야 한다. 문제 위에 더 크신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온 천지 위에, 여리고 위에도 좌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눈을 들어 그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문제를 너무 많이 보고 있으면 우울하고 힘만 빠진다. 서럽기까지 하다.


강을 건너 최적의 전쟁 타이밍에 하나님은 쉼표를 찍으셨다. 유월절 예배까지 약 열흘 정도의 시간을 다르게 사용하셨다. 우리가 보기에 전쟁하기 최적의 타이밍이었던 그 시간이 하나님 눈엔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할 타이밍이었던 것이다. 진짜 적은 여리고의 높은 성벽이 아니라 옛사람의 잔재를 끊어내야 할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약속의 땅 전쟁은 힘이 센 민족이 약한 민족을 몰아내는 일반적인 전쟁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거역한 민족을 몰아내는 영적인 전쟁이다. 빛의 군대가 되려면 자기 안에 있는 어둠을 먼저 몰아내야 하는 것이다.


https://www.godpeople.com/?GO=tv_detail&tv_mv_no=13181


https://www.youtube.com/watch?v=DSLwTiMfP_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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