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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therine Jun 03. 2020

무너지는 성벽

여호수아 6:1-27 한홍 목사님

이스라엘 백성들의 첫 전장지인 여리고 성은 정말 쉬운 곳이 아니었다. 고지대에 있었던 이 성은 웬만한 공성 장비가 없이는 성을 함락시키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성의 한쪽은 깎아지는 듯한 절벽이 있었고 다른 한쪽은 숲이어서 공격을 할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어려움에도 반드시 여리고 성을 정복해야 하는 것은, 최대의 수자원인 오아시스를 가진 데다 가나안의 북부 동맹과 남부 동맹을 나눠 차례로 궤멸시키려는 작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그런 곳이 우리 삶에도 있다. 그러나 직면하여 반드시 넘어가야 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광야 시절과 가나안에서의 전투 양상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공격해 오는 적들을 방어하는 전쟁을 했었던 광야 전투가 성들을 하나씩 점령해가는 공격형 전투로 바뀐 것이다. 가나안의 적들이 훨씬 강한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격 쪽에 서있었다. 이것은 마치 월드컵 때 우리나라가 독일이나 브라질 팀을 상대로 공격 축구다 말하는 황당함이다. 하나님이 하셔서 그렇다.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마귀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공격하는 군대이지 방어하는 군대가 아닌 것이다. 아무리 강한 여리고 성도 이제 공격을 받아내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세상을 보며 두려워하지 말라. 교회가 공격하는 쪽이지, 세상이 공격하는 쪽이 아니다. 한국 교회가 어렵다 어렵다 하면서 너무 위축되어 있는 모습을 본다. 교회가 살아남기만 하면 잘하는 거다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실점도 득점도 하지 않고 끝까지 가겠다는 침대 축구와 같다. 얼마나 재미없는 생각인가. 그것은 마귀가 불어넣은 두려움이다. 교회는 살아남기 위해 있는 곳이 아니다. 우리는 생존이 아니라 승리를 위해 전진하는 하나님의 군대로 태어났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1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요단강을 건너기 전 기생 라합을 통하여 들었던 여리고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제 요단강까지 건너온 시점에서 그들의 마음은 갑절의 두려움에 몰락당해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영적 전쟁에서 마귀를 올려다보고 두려워하면 안 된다. 실은 마귀가 우리를 더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니까 문을 꽉 걸어 잠그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떨고 있는 마귀가 아직 도망가진 않았다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버티고 반항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를 믿되, 전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보라.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다'라고 하셨다. 아직 싸움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분명 미래의 사건인데 과거 완료형으로 말씀하신다. '승리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우리는 이기기 위해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이긴 싸움이라는 것을 우리도 확인하고 적에게도 확인시켜주러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하고 담대해야 한다. 


3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신의 한 수'라는 단어가 있다. 절대적인 대치 상황에서 한 번에 상황을 역전시켜 버리는, 사람들은 꿈도 못 꾸는 그런 방법. 성벽을 부술 특전 무기를 주신다던지, 성의 약점을 알려주시며 그쪽으로 특전부대를 침투시키라든지 하는 그런 전략들 말이다. 나는 보통 하나님 앞에 내가 생각하기에 멋진 복수, 역전, 구원을 바라고 기도할 때가 있다. 멋있는 작전 명령을 기대했을 여호수아는 아마 침묵하고 성벽을 돌라는 말을 들으며 머리가 돌 지경이었을 것이다. 여호수아도 이 작전명령이 황당했을 텐데, 전해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땠겠는가. 여리고는 서초구의 2/3 정도 사이즈라고 한다. 훈련받은 군사들이 잰걸음으로 돌면 3시간이면 다 돌 수 있는 크기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야습도 안 하고, 성벽을 돌다가 돌격 앞으로도 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여리고 성 사람들도 아리송했을 것이다. 무서운 마음과 조롱하는 마음이 함께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엿새를 그들은 그렇게 침묵 가운데 긴장했다 늦추기를 반복했다.


하나님의 영적 전략 첫 번째는, 언약궤이다. 여리고 성을 돌 때 그냥 돈 것이 아니다. 언약궤 뒤에 군대가 섰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 그분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다. 말씀의 리더십을 따를 때 승리가 오는 것이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감정과 생각과 경험에 빗대어 판단하면 안 된다. 그때가 바로 말씀에 의지할 때이고 그때가 기도할 때이다. 말씀 앞에 자신을 철저히 복종시켜야 한다. 그것이 승리로 향하는 길이다. 언약궤가 앞장섰을 때 요단강도 갈라지지 않았는가. 이제 말씀이 앞서 성벽을 돌고 있으니 여리고 성도 무너질 것이다. 요단강에서 여리고로 문제는 바뀌었지만 해답은 하나다. 하나님의 말씀.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면 승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적 전략 두 번째는, 순종과 인내의 테스트이다. 완전 무장한 이스라엘의 대군에게 이 일을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가를 생각해 보라. 그들은 요단강을 하나님의 은혜로 건넌 후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져 있다. 비록 공성 장비는 없었지만 군사력만 60-70만으로 여리고 성 인구보다 많은 수였다. 이때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진격, 앞으로!'가 더 쉬웠을 것이다. 이들은 화끈하게 나가서 전쟁하며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싶었을 것이다. 힘이 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뱅글뱅글 돌기만 하는 것,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화끈한 행동만이 믿음의 순종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기다리라고 하실 때가 있다. 힘이 있는데도 안 쓰게 하시는 때가 있다. 무엇이 이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가? 말씀을 향한 신뢰이다. 참고 기다리는 동안 여리고 성 사람들도 한몫했을 것이다. '야, 이 겁쟁이들아, 공격은 안 하고 맨날 거기서 뭐하냐'라고 모욕을 주며 그들을 얕보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말씀에 순종할 때 이런 세상의 조롱과 비웃음이 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조롱했었는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인내로 참고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은 잘 참고 있다고 박수 쳐주지 않는다. 그럴지라도 그것을 견뎌내야 순종이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그 약속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여리고 성은 서서히 무너지지 않았다. 사, 나흘 정도 되었을 때, 벽에 금이 두두둑 가고, 벽돌도 몇 개쯤 툭툭 빠지고 그랬다면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도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봤지? 이제 조금 있음 너흰 끝이야' 이렇게 격려도 되었을 것이고, 여리고 성 사람들도 겁을 집어먹었을 텐데, 야속하게도 마지막 날까지 돌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 날 일곱 바퀴가 다 찰 때까지 아주 작은 징조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인내'란 그런 것이다. 눈에 아무 증거도 보이지 않지만 마지막 5분까지 견디는 것. 여기서 '일곱'이라는 수에 주목해야 한다. 일곱째 날, 일곱 바퀴, 일곱 양각나팔. 하나님의 완전 수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때'가 찰 때까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완전을 이루어 가고 계시는데 우리의 성급함으로 일을 망쳐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방법으로 인간의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시간에 하는 것이다. 뛰어난 선생님에게 춤을 배울 때 그 스텝을 하나하나 따라가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리드에 발맞춰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진짜 순종은 그런 것이다. 자기의 경험과 생각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마지막 5분까지 버티는 것이다. 그러면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1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칠 일 동안 거룩한 침묵을 요구했다. 이것은 군령이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어기면 죽음에 처해진다. 그렇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돌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내리신 명령이다. 그들이 왜 광야에서 38년을 더 헤매었는가.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세우시는데 마귀는 말로 우리를 무너뜨린다. '이게 뭐야, 칼이라도 한번 휘두르고 이겨야 진짜 승리지, 저 여리고 사람들이 하는 말도 일리가 있어, 여호수아가 겁을 먹은 게 분명해.' 이런 말을 누군가 하기 시작했다면 삽시간에 온 부대로 전염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입을 막으셨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침묵하고 기도해야 한다. 입술을 통해서 우리가 흔들리기 쉽기 때문이다.


침묵하고 성을 도는 동안 여리고 성 안에서는 어떤 말들이 오고 갔을까, '요단강을 가르고 넘어온 부대잖아. 우리보다 병력도 많은데 왜 공격하지 않지?' '엄청난 신이 도와주는 부대잖아, 왜 아무 말도 없이 성 주위를 돌기만 하는 거야? 왜 우리가 이렇게 조롱하는데도 가만히 있는 거야?' 패닉에 빠졌을 것이다. 세상은 힘이 조금만 있어도 휘두르고 내리누르려 한다. 복종시키려 하고 자기가 왕이 되려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다. 그분의 군대도 마찬가지다. 힘이 있는데도 과시하지 않는다. 인내하고 순종하면서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인다. 그럴 때 여리고는 움츠러들었다. 그럴 때 세상이 두려움에 떠는 것이다. 


17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18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않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19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첫 번째 의미는 다 죽이라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남녀노소 가축까지 다 죽이라는 것이다. 잔인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여리고는 아무 죄 없이 순박하게 살아오던 백성들이 아니었다. 그 땅을 차지하기까지 수많은 피를 흘려온 민족이고 자신의 아이들까지 우상숭배를 위해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로 오던 민족이다. 폭력과 음란이 극에 달한 곳이었다. 그 땅은 짐승들까지도 깨끗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악을 향한 분노를 보이셨던 것이다.


두 번째 의미는,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염될까 봐 염려하셨던 까닭이다. 불쌍하지만 구제역이 발생하면 그 지역의 가축들을 다 살처분하지 않는가. 그게 확산될까 봐 염려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그 땅의 죄악이 전역으로 확산될까 염려하셨다. 이 성읍이 얼마나 죄악이 가득 찬 곳이었는지, 여호수아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성을 향해 한번 더 저주한다. 누구든지 이 성을 재건하려는 자가 있다면 첫 삽을 뜨기도 전에 아들이 죽고 둘째 아들까지도 죽을 것이라는 내용의.


이 곳은 온 가나안 민족들에게 경고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경고가 되어야 했다. 죄를 지은 민족에게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가 되어야 했다.


13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행진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진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니라


두 가지 나팔이 있다. 하나는 전투 때 사용하는 날카로운 은 나팔이고, 또 하나는 예배 때 이용하는 양각 나팔이다. 그런데 전투에 나와서 예배 때 사용하는 양각 나팔을 불게 했다. 이것은 인간의 전투력으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이다. 이 전쟁은 예배자가 하는 영적인 전쟁이라는 확실한 증거이다. 침묵했어야 하는 이유를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배자'는 인간의 소리를 줄이고 하나님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다. 예배가 살아있는 개인, 교회, 가정 함부로 못 건들인다. 예배가 살아있을 때 우리는 여리고를 무너뜨릴수 있을 것이다.


이 양각 나팔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축제요 잔치의 나팔이었다. 죄로 가득찬 이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기위해, 어떠한 권세라도 다 끊어지고 열려야 한다는 하늘의 영광을 알리는 것이었다.


시편 24: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어둠 권세의 닫힌 문을 열어젖히는 하나님의 양각 나팔인 것이다. 동시에 크게 소리치는 백성들은 승리한 군대가 내지르는 함성이었다. 전쟁이 다 끝나고 난 후가 아닌 공격중에 이 함성을 지르라는 것은 승리는 약속된 것 이었음을 뜻한다. 우리는 믿음의 실상,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미리 선포한다. 그 선포를 하며 나아갈때 실로 전쟁중에 이미 무너져버리는 적군의 상태를 보게될 것이다. 


여호수아는 전쟁을 앞서 여러번 기생 라합과 그 집에 있는 가족 모두를 살려주라는 말을 대대 전체를 향하여 여러번 다짐시키는데, 이 구원이 가지는 영적 의미가 크기 때문에 그렇다. 아무리 패역한 곳일지라도 하나님은 죄인의 회개와 돌이킴을 귀하게 보신다. 모든 것이 무너질때에도 십자가만은 끝까지 남아 우리를 도울 것이다. 

라합의 창문에 길게 내려진 붉은 줄은 바로 그 십자가를 상징한다. 우리의 마음과 모든 순간속에 저 십자가를 의지해야한다.


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우리에겐 복잡했던 여리고 성. 그러나 성경에서는 한 문장 언급될 뿐이다.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홍해가 갈라질 때도, 요단강이 갈라질 때도 그랬다. '물이 갈라지고 길이 생겼다.' 우리에겐 큰 문제가 하나님에게는 '전혀' 큰 일이 아니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를 스트레스 받게 하는 일, 우리를 낙담하게 하는 그 큰 일이 하나님 앞에서는 단순간에 끝나버리는 일인 것이다. 넘실거리던 물이 갈라지고 길이 난것 처럼. 그 오래된 역사를 가진 성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것처럼. 


강했던 여리고 성벽. 그것은 강점이었지만 그것이 무너져내렸을때 그것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그들은 한번도 성벽이 무너져 내릴것이라 생각해 본 적 없을 것이다. 인간의 공성 장비에만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들의 모든 작전은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세워진 것이었다. 설마 그들이 가장 자랑하던 여리고 성이 산과 하늘을 진동케 하시는 전능자의 손에 의해 지진으로 무너져 내릴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가장 믿고, 가장 자신만만해 하는 것을 흔들어 놓으실 것이다. 그것부터 무너뜨려 놓으실 것이다. 그때 모든 입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폴 톰슨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여리고 성 전투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 그것은 진짜 적은 여리고 성 백성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 싸움은 하나님의 백성들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를 파괴시키기 위하여 온 힘을 집중하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만으로 여리고를 간단히 없애버리실 수 있었다. 진짜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상대로 한 것이지, 여리고를 상대로 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를 무너뜨리려고 하셨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정복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가장 큰 영적 전쟁은, 가장 단단한 여리고 성벽은 나의 마음속에 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여리고는 우리의 두려움이다. 우리의 분노이다. 상처이다. 열등감이다. 교만이고, 과거의 어떤일에 대한 죄책감이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이다. 우리 마음의 여리고는 항상 불안해 하는 마음이다. 포기하고 도망가려는 마음이다. 우리 마음의 여리고는 돈 욕심이다. 음란이다. 슬프고 우울한 마음, 아무도 나를 쳐다봐 주지 않는 다는 마음, 형제를 원망하고 비난하고 곡해하는 그런 마음이다. 알면서도 어쩔줄 모르고 있었던 마음속의 여리고 성벽을 반드시 무너뜨려야 한다. 이 여리고성을 넘어야 우리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다. 


기억할 것은, 혼자 여리고 성벽 앞에 서있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말씀이 앞서고 있다.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명령에만 잘 집중하면 된다. 두려워 할 것 없다. 이미 승리한 싸움이다. 영적전쟁이라는 것, 하나님께서 이끌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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