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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therine Jun 04. 2020

승리의 땅에서 패배하다

여호수아 7:1-26


우리 삶에 간혹, 위대한 성공 뒤에 실패를 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우승한 팀은 교만해지는데 다른 팀들은 승리를 위해 더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의 지도자 여호수아, 기적의 요단강 도하와 여리고 성의 말도 안 되는 함락 이후, 오늘 우리는 아이성에 패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다. 


성공만을 한다면 찾아내기 어려웠을 어둠의 요소들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 패배는 이러한 요소들을 제거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쩌면 성공의 때 보다 실패했을 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7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


여리고 성을 함락시킨 후, 백성들의 사기는 높아졌고 가나안 온 족속들의 마음은 녹았다. 아이성은 여리고성으로부터 북서쪽으로 1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으로 주민 수가 만 이천 명 밖에 안 되는 작은 성이었다. 소문은 날개의 날개를 달고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기세를 몰아 파죽지세로 전쟁을 하여 빨리 끝내버리면 될 줄 알았을 것이다.


1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 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지난번 전장지인 여리고 성의 모든 것을 온전히 바쳐야 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다 죽여서 죄가 이스라엘에 전염되지 않도록 해야 했고 불에 타지 않는 모든 물건들은 다 하나님의 전에 바쳐야 했다. 가나안의 첫 관문지로, 십일조였다. 그다음 전투부터는 전리품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간이 범죄 했다.


아간은 고대 바벨론에서 생산된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과 은, 금등을 훔쳤다. 24절에 처벌당하는 아간의 소유들을 보면 그는 가난한 자가 아니었는데도, 온전히 바쳐야 했던 물건들을 탐냈던 것이다. 욕심이 장성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다. 가난이 문제가 아니라 욕심이 문제인 것이다. 명문 유다 지파의 족장이면서도 순간의 죄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아간의 범죄는 자신과 가족과 하나님만 아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 전체에게 진노하셨다. 한 사람의 죄를 전체의 죄로 보신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를 이스라엘 전체가 치르게 하셨다. 


더 중요한 것은 여호수아를 비롯한 지도자급의 리더들이 영적으로 먹구름이 잔뜩 드리운 이 전쟁의 낌새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전쟁준비만 열심히 했다. 하나님의 군대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있는데 아무도 알지 못했다. 우리가 이렇게 무지하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의 태풍을 보지 못한다. 이 싸움은 아간의 죄로 인해 이미 지고 시작한 싸움이었다. 하나님께 범죄 한 채로는 그 어떤 인간적인 준비도 하나님 앞에 허사가 되어버릴 것이다. 


2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여호수아는 자신도 정탐꾼 출신이라 적진의 동태를 살피고 작전을 세우는데 상당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적진의 기세를 살피는 것은 좋다. 문제는 기도도 하지 않고 정탐꾼부터 출발시켰다는 것에 있다. 이때까지 여호수아는 이렇지 않았다. 여리고 성때 그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과 독대하면서 그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전쟁에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기를 기다렸었다. 그런데 아이성 전투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려 했다기보다, 그가 자신감에 차서 하나님께 말할 타이밍을 드리지 않은 것 같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감정적으로 흥분해 있었고 자신감에 차 있었기에 물을 겨를이 없이 전쟁 준비를 해나간 것이다. 우리도 그렇다.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무시하진 않는데, 삶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바쁘다는 핑계로 슬프다는 핑계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만히 앉아서 듣지 않는다. 


만약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전쟁을 시작하려 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만약 작전회의를 하기 전에 장로들과 여호수아가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회를 했더라면 그들 안에 있는 아간의 죄를 알려주셨을 것이다. 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싸움은 시작하기도 전에 진 싸움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을 것이다. 앞으로 전개될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기도는 타이밍이 생명이다. 망하고 나서 기도하지 말고 시작하기 전에 기도해야 한다. 고통의 멍에를 벗으려고 나아오지 말고 시작 전에 기도해야 한다. 눈에 보기에 쉬워 보이는 일도 기도해야 한다. 아니, 그럴수록 기도하고 더 물어야 하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 눈에 쉬워 보이는 아이성이 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행동하기 전에 충분히 기도해야 한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기도로 수습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방법이다. 


인생의 실패는 100% 기도의 실패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기도 안 하고 보낸 정탐꾼들은 돌아와서 이, 삼천 명만 올라가도 승리는 충분히 우리 편이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이런 통계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아이성 일만 이천 인구의 전투 병력이 삼천 명쯤 된다고 예측하는데, 문제는 아이성이 해발 500m에 위치한 주위가 좁은 골짜기로 형성된 요새였다는 것이다. 군사 전문가들 말에 따르면 그들에게 익숙한 지형을 이용해 전투를 할 경우 공격하는 쪽은 수비하는 쪽 병력의 세배에서 다섯 배에 이르는 병력을 요한다고 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 오천명에서 이만 명 정도의 병력을 준비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이런 보고를 할 수 있었고 명민한 여호수아는 갈등 없이 이 보고를 받아들였던 걸까. 모두가 여리고 성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들어야 할 말이 아니라 듣고 싶은 말을 했던 것이다. 


오래전 가데스 바네아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있어 패배주의에 휩싸였었다. 그리고 지금은 터무니없이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백성들을 볼 수 있다. 이 양극단 모두 건강한 믿음이 아니다. 싸워 보지도 않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문제지만, 어제의 승리에 도취되어서 기도 없이 덮어놓고 승리를 확신하는 것도 큰 문제이다. 자신을 확신하면 안 된다. 자기를 믿으면 안 된다. 자기를 보면 안 된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여리고 성의 승리는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잊지 말라. 교만이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신 일을 내가 했다고 착각하는 것. 그래서 교만해진 사람은 분별력을 잃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별력을 잃고 눈에 보이는 데로 걸었다. 


4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5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아이성을 향해 진격했던 이스라엘 백성 삼천 명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수수깡처럼 쓰러졌다. 죽은 삼십육 명은 싸우다 죽은 것이 아니라 후퇴하다 죽은 사람들이다. 믿을 수 없는 패배였다. 전사자는 삼십육 명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입은 심리적인 충격은 몇 만 명을 잃은 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날 백성의 마음이 물처럼 녹아 내렸다고 나온다. 집단 트라우마에 빠진 것이다. 


패배를 잘 받아들이는 것이 다음 단계로 향하는 관문이 된다. 과연 그들이 질서 정연하게 싸우고 잘 퇴각했기 때문에 전사자의 수가 적었던 것일까? 아니다. 이것 조차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피해를 극소화해주셨던 것이다. 전멸할 수도 있었지만 지켜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시키시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들을 회개와 회복의 자리로 부르고 싶으셨기 때문이다. 패배의 순간에 있는 것 같을 때, 그 정도로 그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죽을 수 있었는데 다치게만 하신 것에 감사해야 한다. 죽을 뻔했지 죽지 않았다. 


강한 상대에게 지는 것은 이해라도 가지만, 약한 상대에게 져버린 여호수아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는 것 같다. 이곳은 광야가 아니라 약속의 땅이다. 승리가 약속된 땅이다. 이 땅에서의 패배가 안겨준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함께 옷을 찢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하루 종일 통곡하며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쓰며 하나님께 통곡했다. 우리가 실패했을 때, 스스로 그 원인을 분석하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 앞에 가서 물어야 한다. 실패했을 때 기도하지 않으면 실패는 실패로 끝난다. 상처만 남기고 끝날 것이다. 그러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영적으로 설명을 해주신다. 우리는 이 상황 절대 분석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설명해 주셔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수아의 기도는 시기적절했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전쟁 전에 이렇게 자신을 낮추고 기도했더라면  전쟁 후에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세상 지도자들은 일이 틀어졌을 때 화풀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한다. 여호수아가 세상적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면 정탐꾼들을 다 불러냈을 것이다. 그들 모두를 죽였을 수 있다. 선봉으로 앞장섰던 장군 또한 군법회의에 불러내어 죽였을 수 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고 자신과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먼지를 쓰고 기도한다. 책임자는 그 자신이라는 것이다. 실패했을 때 남에게 책임 전가하면 안 된다. 부하들이 했어도 결정은 리더가 했다. 책임은 리더가 져야 하는 것이다. 리더가 책임을 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그때부터 문제가 해결이 된다. 비겁한 리더는 결코 상황 해결하지 못한다. 


7 이르되 슬프도 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8 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9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여호수아의 기도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묻어난다. 우리의 모습과 같다. 기도 안 하고 가서 사고 쳐놓고 돌아와 오히려 원망하는 것이다. 망하고 나면 꼭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우리에게 그러실 수 있냐고. 여호수아는, 정말 왜 패배했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승리의 땅에서 왜 패배했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분명 영적 원인이 있을 텐데, 그 이유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해가 떨어질 때까지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회개하며 기도하게 두셨다. 나에게도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 회개와 회복의 시간. 나의 한계를 인정하는 시간. 나의 자아가 부서지는 시간. 이런 영혼의 몸부림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주시는 것이다. 마침내 석양이 질 무렵,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10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여호수아가 딱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군대가 승리하길 원하시지 이렇게 처참하게 패배하여 땅에 엎드러져 있길 원치 않는다. 사자처럼 담대하고 당당하게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하나님의 장수가 패배자로 땅에 엎드러져 먼지를 뒤집어쓴 채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일어나라, 이만한 일에 네가 그렇게 주저앉아 있어서야 되겠느냐."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신다.


11 이스라엘이 범죄 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3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단순히 통곡하며 기도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신다. 회개가 하나님의 마음을 열지만은, 이제 취해야 할 액션이 있는 것이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엎드렸느냐." 이 말씀은, "여호수아, 너는 마치 내가 행동해야 할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지금 행동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바로 너다."라는 뜻이다. 백성을 정결하게 하라는 것은, 너희 가운데 있는 죄를 처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눈물 어린 회개기도를 보고 감동받으셨지만 그것은 서론이었다. 문제의 원인이었던 죄를 여호수아가 제거하길 원하셨다. 하나님을 진노하게 한 영적인 암 덩어리를 여호수아가 제거하지 않으면 문제를 풀리지 않을 것이다. 


여호수아는 이백만 백성들을 모두 평야에 도열시켰다. 각 지파의 수령들만 앞으로 나와 하나님의 제비뽑기를 시작한 것이다. 유다 지파가 뽑혔다. 이 지파는 이스라엘의 허리와도 같아서 왕을 배출하는 지파였다. 유다 지파만 해도 십만이 넘었었는데 그중에 다시 족장들만 제비뽑기를 했다. 반나절은 넘게 걸린 하나님의 수사망이 드디어 아간을 지목했다. 성경은 죄가 반드시 너를 찾을 것이라고 했다. 죄를 설렁설렁 넘길 수 없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추적해 오신다. 이것의 심각성을 인지해야 구원의 은혜를 현실적으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범인이 죄를 자백하고 아간과 온 가족이 공개 처형당한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소유들 까지도 불에 태워 버린다. 비참한 결말이다.


우리 안에 불태워야 할 아간은 없는가, 나의 편의를 위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할 것을 훔치고 있진 않은가 돌아봐야 할 것이다. 기생 라합은 아무것도 없었던 비천한 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을 택했기에 모든 것을 얻은 여인이 되었다. 아간은 명문 가문의 족장이었지만 하나님을 택하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잃고 파멸했다. 


아간의 가족 전체가 처벌받은 것을 보라. 성경은 아비의 죄를 아들에게 묻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간의 온 가족이 함께 그 죄를 공모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까 다 죽인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도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가족과 이웃들의 죄도 묵인해서는 안된다. 가족은 서로를 향한 거룩한 견제를 해야 한다. 우리는 한 몸이고 한 교회이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안일한 생각을 버려야 하고, 우리 가족만 잘 될 것이 아니라 옆에 가족들도 다 바로 서야 하는 것이다. 성도의 교제란 이런 것이다. 형제의 좋은 부분만 볼 것이 아니라 죄의 길로 가는 것 같을 때 잡아주고 질책해 줘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얘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를 아간의 길에서 나오게 해야 하는 것이다.


기도하며 우리 안에 아간과 같은 자가 없는지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아간은 죄를 짓고 처형당했다. 그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은혜로 아간과 다를 바 없는 우리지만 매일매일 회개하며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항상 감사해야 한다. 날마다 주님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전쟁 초기에, 아이성을 상대로 한 패배는 힘든 일이었지만 예방주사와 같다. 아간이 죽은 자리에 돌무더기를 쌓고 기념하라고 하셨다. 기억하라고 하셨다. 거룩이 없는 승리는 없다. 빛나는 내일을 원한다면 너희 모두는 스스로를 정결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뺄셈을 통해 덧셈을 하시는 분이시다. 이들은 아픈 경험을 했지만 이 예방주사를 통해 7년의 정복전쟁 중에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는다. 우리 안의 죄악을 제거하시면서 회복과 승리를 주시는 것이다. 



https://www.godpeople.com/?GO=tv_detail&tv_mv_no=13268


https://www.youtube.com/watch?v=Ul5qwfBeH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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