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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therine Jun 12. 2020

Lord 주

롬10:9/ 빌2:9-11/ 골1:13-14 한홍 목사님

예수, 그리스도만큼이나 우리는 '주'라는 이름을 정말 많이 사용한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세 가지가 '할렐루야, 아멘, 주여' 이 세 단어라고 한다. 통성기도 할 때 한국교회는 '주여!' 외치고 시작한다. 우리나라는 사람의 이름 뒤에 그 사람의 호칭을 나타내는 직급을 붙인다. 예를 들어 홍길동 박사, 홍길동 목사, 홍길동 대령 등과 같이 말이다. 그런데 영미권 나라들은 직급을 이름의 앞에다 붙인다. 닥터 한, 프레지던트 한 처럼 말이다. 즉, The Lord Jesus Christ 라는 이름의 가장 앞에 있는 'Lord'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 주인 되신다는 뜻이다.


Lord 주

= 헬라어 큐리오스 (Kyrios)

= 라틴어 도미너스 (Dominus)


당시, 노예제도가 있었던 시대에서 종들이 그들의 주인을 '도미너스'라 불렀다. 이것은 나의 모든 것을 소유한 주인님께 예를 갖춰 부르는 호칭이었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 말씀의 의미가 중요하다. 구원이 가지는 영적 의미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로,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주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하고 얘기했다. 그런데 오늘 로마서 본문에서는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구원의 조건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이 세 가지 시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가야 한다.


구원

= 과거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신다. (칭의)

= 현재 진행형,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도록 도우신다. (성화)

=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의 구원


로마서 10장 9절 말씀은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는 자들에게 한 말씀이었다.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이들에게 미래형 구원을 얘기하는 것 같지도 않아 보이는 이 구절은, 현재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며 예수님과 함께 누릴 수 있는 기쁨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그러려면 우리의 입으로 주를 시인해야 하고, 실천하며 살아야 함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입술로 고백하는 신앙이 굉장히 중요하다. 머릿속에 담아두지 말고 누구 앞에서든지 예수님을 시인하며 고백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은 우리가 정체를 숨기는 007 크리스천이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인 되신 그리스도를 자랑스럽게 선포하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선포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주군과 삶의 인도자가 바뀌었다는 것을 떳떳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이 말씀은 우리가 전에는 흑암의 권세 아래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다가 예수 믿고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 권세를 잡고 있는 마귀는 진짜 주인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 반역하고 천국에서 타락한 잔인하고 추악한 자이다. 그래서 그가 권세 잡고 있는 이 세상이 이토록 혼란스럽고 어두운 것이다. 이전에는 우리도 그 가짜 주인 밑에서 통치받고 살았었다. 그러다가 예수 믿는 그 순간에 자유를 얻고 벗어나게 되었다. 그 순간에 우리가 속한 왕국이 바뀐 것이다. 우리가 섬기는 주인이 바뀐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안에 속하였고, 우리의 왕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를 쉽게 놔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옛사람을 벗어버리기가 너무 어렵고 힘이 드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믿음으로 그 시험을 뚫고 나가야만 한다. 우리가 가짜 주인 밑에 있을 때는 그러려니 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우리는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신약성경 당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맹세였다. 로마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와 같은 성경들은 막강한 로마 제국 앞에 눌려 있었다. 그 나라의 왕들은 고약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왕으로 군림하는 것도 모자라 자기가 신이 되고 싶어 했다는 점이다. 자신을 본뜬 형상까지 만들어 백성들로 그 앞에 절하게 했다. 왕은 신이라 실수가 없다며, 왕에게 거역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라 했다. 특히 초대교회 당시 1세기 후반부로 가면서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라는 황제 숭배 사상을 노골적으로 강조했는데 이때 '도미너스'라고 자신을 칭하게 했다. 그때는 온갖 신들이 많았고 다른 신들도 다 허용하면서 자기 이름 앞에다 '주인님' 하나 붙이라는 명령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들이 섬기던 다른 우상들도 허용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달랐다. 그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섬기지 않았다. 소아시아 지역에 살았던 성도들은 처음부터 죽을 것을 각오하고 왕을 신으로 숭배하지 않은 것이다. 로마는 이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너희 신들을 다 허용해줬는데 내 이름 앞에 '주' 하나 붙여주는 게 그렇게 어렵냐며 교회들을 향해 대가를 지불하게 했던 것이다.


황제의 신격화에 반대한 사람들은 장사가 금지되었고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기독교인들은 다 쫓겨났다. 일반 시민에게는 1%의 세금을 징수했는데 황제 숭배를 거부한 기독교 인들에게는 50%의 세금을 징수했다. 감옥에 가두고 구타하고 굶기고 죽이기도 했다. 크리스천 아이들은 학교에서 놀림당하고 쫓겨났다. 그렇게 버티다가 체포되면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당했는데 당시 추방은, 로마 제국 밖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했고 그러려면 사람이 살 수 없는 사막이나 광야로 나가야만 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지하교회인 카타콤으로 숨어들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는 초대교회 기독교 인들과 같은 상황을 살아가면서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 있는지 깊게 돌아보아야 한다. 그 고백의 무게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통성기도 하며 너무나 쉽게 외칠 수 있는 이 이름이, 당시에는 성도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외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유일한 주인으로 고백하는 맹세는 나와 내 주변 사람들에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다. 지금도 이슬람권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각자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모두가 주님 따르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뜻이다.


예전에 일본 작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히또'라는 아이가 있었다. 아주 모범적인 아이였는데 히또만 유일하게 학교에서 신앙을 가진 아이였다. 점심시간에 히또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항상 식사기도를 정성스럽게 감사기도를 드렸는데, 히또를 놀리다 못한 아이들이 선생님들에게 히또가 날마다 귀신을 부르는 기도를 한다며 고자질을 했다고 한다. 안 그래도 기독교에 배타적이었던 선생님들이 교장선생님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고 교장선생님은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 히또를 불러내서 그 문제를 따지기 시작했다. 정말 귀신을 부르는 기도를 밥 먹기 전마다 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히또는 귀신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 예수님께 감사기도 한 것이라 말했다. 교장선생님은 히또에게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기도해보라고 시켰고 히또는 떨지도 않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침착하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쳤다. 너무나 그 기도가 침착하고 담대했기 때문에 모두가 숙연해졌다고 한다. 그 순간에 교장선생님이 무릎을 꿇으며 얘기했다. 사실은 본인도 크리스천인데 적대적인 분위기 때문에 한 번도 남들에게 밝힌 적이 없었다고. 본인의 마음을 돌아볼 수 있게 한 히또에게 고맙다며, 앞으로는 자신도 이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시인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저희 것임이라'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에 부끄러움 없이 동참하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세상에서 욕먹고 핍박당하고 쫓겨난다 할지라도 그것을 감수하겠다는 결심이다. 보통일이 아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별로 잃을 것이 없는 상황에 쉽게 하는 고백이 아니어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에 적대적이고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 담대하게 주로 고백하는 것, 사람 힘으로 될 일이 아니다. 사람 힘으로 할 수 있었다면 베드로가 넘버 원이었을 것이다. 수제자 베드로는 충성 맹세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었다. 십자가 사건 전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다 나를 부인할 거라 하셨는데도 베드로는 자기는 다를 거라고 했었다.


눅 22: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고백을  때는 아마 베드로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충성은 사람의 힘으로   있는 충성이 아니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주제 파악을 시켜주기 위해  밤이 가기 전에 특히 너는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실제로  일은 일어났다. 베드로의 부인은 총칼을  로마 병사 앞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닌 제사장의 계집종 앞에서 정신없이 부인했던 것이다. 그는 세상의 압박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비굴 해질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결심을 마귀는 아무렇지도 않게 부셔 버리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 그것은 사람 힘으로 되는  아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고 바뀐다. 그 후로는 서슬 퍼런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한 번도 주님의 이름을 부인한 적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는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제자들도, 현재의 우리도 다 연약한 인간이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이 적대적인 세상 앞에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령 충만해야 한다. 오직 우리 안의 성령께서 붙들어 주셔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입술로 주라 시인하는 것은 절대 순종을 고백하는 것이다. 주기도문 초반에 뭐라고 나오는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말은 하늘 뜻을 땅에서 반드시 순종하겠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을 도미너스라 칭하는 백성들의 맹세인 것이다. 어떠한 명령이 떨어져도 언제나 나의 대답은 '예스'일 것이라는 삶의 자세가 바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절대적인 순종이 잘 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입술의 고백과 같이 내 삶 또한 절대적인 순종을 향해 나아갈 때 영적인 파워를 가지게 될 것이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사람 만이 구원의 능력을 100% 누리며 살아가는 삶이 될 것이다. 그게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정한 주인이 되기를 원하신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 안 믿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다. 소아시아 교회에서 이미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셨던 말씀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 어떤 영역은 자기가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이중적 크리스천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압박인 것이다. 말씀에서 얘기하는 '문'은 내가 주인 노릇 하려고 잠가놓고 있는 곳들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식 교육문제, 어떤 사람은 부동산 관리,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 사업 경영에서 예수님의 의견보다는 내 철학, 내 가치대로 하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영역에서는 예수님을 주인이 아닌 객으로 모셔놓고 있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그러니까 삶에 능력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말로는 예수가 내 삶의 주인이라고 하면서 실제는 그렇지 못한 방들 앞에서 오늘도 예수님은 노크하고 계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는 구절을 영어성경에서 보면 현재 진행형이다. 과거형도 미래형도 아니다. 주님이 젠틀하셔서 문을 부수고 들어오시지 않음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의 인격을 존중하셔서 밖에서 계속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주여, 주여!' 외칠 때마다 어쩌면 주님은 '내가 너의 삶의 진정한 주인이 맞지?'하고 물어보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문을 연다'라는 것은 숨김없이 다 내어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권리와 내 생각과 내 뜻대로 행하고 싶은 숨은 이유와 감정들 억울함 들을 모두 내려놓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을 의미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런 나에게 들어오신다고 하셨다. 마귀가 떠나고 영광의 능력이 우리 삶을 주도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만찬은 최고의 축복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그 안에 다 차려져 있다. 주님의 만찬 자리에 함께 앉아있는 자에게서 마귀는 한걸음에 도망갈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내 인생에 주인으로 고백하고 작은 한 부분까지도 예수님께 순복 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노예의 삶이 아니라 축복 그 자체의 삶이 될 것이다. 기적의 삶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불순종하고 있는 삶의 영역이 순종의 삶이 되도록 조정하신다. 그 작업을 도와주신다. 나를 위해서. '다른 영역은 다 포기했지만 이건 안됩니다'하는 영역을 남겨두지 말라. 예외조항은 하나님의 공격을 받을 뿐이다. 총체적인 포기에 관심이 있으시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사랑하셔서 관심 있게 항상 주목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If he is not the Lord of all, he is not the Lord at all'이라는 말이 있다. 그분이 우리 '모든 영역'의 주인이 아니시라면 어떤 한 영역에서도 주인 되시지 않은 것과 같은 뜻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베스트를 주시고 싶어 하신다. 너무나도 우리에게 사랑을 주고 싶어 하신다. 어쩌면 우리가 쥐고 있는 그 영역이 우리 삶에서 가장 회복되지 않은 부분이다. 하나님은 그 부분을 너무나도 회복시켜 주시고 싶으신 것이다. 숨통이 트이려면 우리 인생의 아킬레스건, 내가 쉽게 양보하지 못하고 감정이 올라오고 속이 상하는 바로 그 영역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나는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내 걱정, 내 억울함, 내 분노에 대가를 주고 해결하기 위해 보상해 주기 위해 애를 쓰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잠시 뒤로 미뤄놓고, 예수님은 뭐라 말씀하시는지 묻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께 드린 영역에서는 잘하고 있는 바로 그 과정을 유독 나를 힘들게 하는 영역에서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은혜가 내 삶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 주님께서는 내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가기 시작하실 것이다.


야곱의 인생을 조정하기 위해 환도뼈를 쳐서 불구자를 만드셨던 것처럼 말이다. 열심히 사역하던 요나에게 원수의 땅을 명하셨을 때 '주님, 노!' 하고 정반대 방향으로 튀었던 그가 고래 뱃속에서 삼일 밤낮을 회개한 뒤에 니느웨로 갔던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 삶을 조정하는 모양이 그렇게 나이스 한 것은 아니다. 환도뼈가 부러지고 물고기 밥이 되는 것이 '은혜'인 것이다.


우리가 살던 그 자리에 머물면서 동시에 순종의 삶을 살 수는 없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그대로 있으면서 민족의 조상이 될 순 없었다. 다 짐 싸고 이민을 가야만 했듯이, 획기적인 변화와 조정, 옛사람을 다 떼어놓고 떠나는 영적인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늙은 야곱이 요셉과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베냐민을 내려놓아야 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한 입술의 고백을 삶의 고백이 되도록 우리 삶을 끝까지, 세밀하게 조정하실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조정의 시간을 생략하고 순종의 길로 갈 수 없다. 우리를 정말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그렇게 인도하실 것이다. 그 과정이 힘들고 어려워도 믿음으로 가면 놀라운 축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 때 주어지는 영적 프리미엄이 있다.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만물이 복종하게 하시는 권위를 주셨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천군 천사와 마귀들까지 다 복종해야 하는 권세를 주셨다. 마귀는 잠시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세상 권세를 휘두를 수 있는 힘을 받았지만 이 힘과 예수님이 받으신 권세에는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마귀가 받은 힘이 예수님의 권세 앞에서는 꼼짝을 못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키가 190cm 정도 되는 거구의 선수들이 농구를 하다가 왜소한 체구의 심판이 분 휘슬에 모두 동작 그만 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심판 파울을 선언하면 그들은 아무리 힘이 좋아도 꼼짝없이 경기에서 아웃인 것이다. 심판에게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영적 권위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주셨다. 마귀가 아무리 힘이 세도 예수님이 휘슬 불면 동작 그만이다. 꼼짝을 못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으로 딱 고정시켜 놓으면 그곳에, 그 사람에게, 그 영역에 마귀는 손을 댈 수 없다. 동작 그만이다. 주님의 권위가 우리를 보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래서 마귀가 자꾸 우리가 주님께 대들고 그 권위 밖으로 나가기를 선동시키는 것이다. '야, 너 언제까지 주님 명령 따르면서 살래, 네 인생은 네 마음대로 살아야지'하고 속삭이는 것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비밀을 알지 못해서 순간에 마귀에게 넘어가 버리고 만다. 이것이 마귀가 가장 기뻐하는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권위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마귀가 우리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결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끌려다니는 인생이 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가치관과 시간과 자녀와 재능과 재물과 모든 것들을 주님께 복종시켜야 한다. 그래야 왕 되신 주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보호해주실 수 있다. 우리의 인격을 존중하셔서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에 역사하셔서 백성 된 우리의 모든 것을 지켜주시고 사랑으로 보듬어주신다.


입술로 '주'라 시인하는 것은, 이처럼 대단한 일이다. 우리의 모든 삶에서 마귀의 장난질이 떠나고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가 임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 고백의 힘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말씀에 힘이 있는 것이다. 자녀 된 우리에게도 말에 힘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입술로 고백할 때 하늘의 영광이 움직이고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축복하시고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지시는 것이다. 내가 책임지고 살 때보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훨씬 좋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이미 세상의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삶을 통해 보여주지 않았는가.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고백을 통해 영광 받으신다. 우리가 주권을 포기하고 예수님께 안기려 애를 쓸 때, 그 고백을 지키기 위해 기도하며 나아갈 때 부족하지만 이 모습들이 아버지께 큰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영적인 세계에서 천군 천사들이 기립 박수를 치고 대적 마귀가 힘을 잃고 아버지의 마음에 큰 기쁨이 오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칭하는 이름의 뜻을 잘 알고, 그 호칭 안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의 무게를 깊이 알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어느 순간에도 이 이름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신앙을 향해 세상은 핍박하겠지만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주 : 충성과 순종의 고백 (예수님의 보호하심)

예수 :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그리스도 :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 십자가 보혈의 능력과 권세




https://www.godpeople.com/?GO=tv_detail&tv_mv_no=17805


https://www.youtube.com/watch?v=ktNSXHarQk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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