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22-23/ 사7:14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라는 뜻이다.
마 1: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은 정혼자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천사의 말을 꿈에 듣고 마음에 근심하던 요셉에게 주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우리가 알고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은 우리가 가까이 하기에 크고 강하신 분이었다. 너무나 멀리 계신 분이셨다. 일부러 의도치 않아도 존재 자체가 너무 크고 대단하신 분이기에 그렇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사자가 아무리 다정다감하게 말해도, 토끼가 인상쓴것 보다 무섭게 느껴지는 것처럼. 또 거인이 아무리 자세를 낮추고 말해도, 부피가 너무 커서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듯이 말이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을때, 정말 젠틀하게 말씀하셨는데도 지진이 나는것 같아 두려워했었다. 그들의 눈을 땅에서 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자신을 나타내실때 꼭 먼저 하시는 말씀이 있으셨다. '두려워 하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라.' 그래도 기본적인 목소리가 천둥소리같고 폭포소리같으신 하나님을 안무서워할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만날수있는 방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크고 강하신 하나님께서 작고 작아지셔서 베들레헴의 나사렛 예수로 오신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로마의 왕족으로 태어나셨다면, 인간으로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거리감이 있었을 것이다. 거대한 병력을 거느린 위대한 장군으로 오셨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작은 땅 유대, 그 곳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던 것이다. 그 날밤, 말구유에 누워 잠자고 있는 아이에게 누가, 두려움을 느끼고 마음의 거리감을 느꼈겠는가.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볼품없고 낮은 자도 거리낌 없이 다가갈수있는 그런 존재로 오신 것이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지만 우리가 편하게 다가갈수 있는 분이다. 주님은 인간이셨기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셨다. 동시에 하나님이셨기에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오천명을 먹이실수도 있으셨다. 인간이셨기에 내게 물을 달라는 목마름을 느끼셨지만, 하나님이셨기에 물위를 걸으셨다. 인간이셨기에 십자가 고통을 그대로 다 느끼시고 돌아가셨지만, 하나님이셨기에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면서 동시에 우리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실수 있는 분이시다. 임마누엘의 예수님은 함부로 할수없지만 또 누구나 다가가 이야기를 할수있는 다정한 분이시다.
임마누엘은 위기의 시대에 주는 위로의 이름이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실 위에 먼저 읽은 마태복음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말씀이다. 이 말씀을 예언 할 당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외세의 침공으로 무참하게 고통받던 시기였다. 이게 하나님이 돌보시는 나라가 맞나 할정도로 총체적인 난국에 빠졌있었다. 당시 유대 왕은 아하수에르였는데 악하고 무능해서 상황을 나아지게 하는 것이아니라 오히려 더 악화시키는 리더십이었다. 그래서 나라의 교육, 정치, 종교 문제가 총체적인 난국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 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메세지가 바로 임마누엘 예수님의 탄생이었다. 국가 지도자가 너무나 타락했고 나라의 정세가 혼돈과 혼란에 빠진 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이름이었던 것이다. 미래를 예측할수없는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소망의 이름이 임마누엘 이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도 하나님께서 친밀하게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 바로, 임마누엘 인것이다. 하나님은 예전에 계신 분이 아니다. 지금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분이다. 높고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가장 낮고, 가장 어두운 순간 우리 옆에서 문제의 한 가운데로 함께 걸어가 주시는 분인 것이다. 그래서 임마누엘이 주는 메세지는 간단하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가 병원 수술대 위에 누워있어도, 군대에 가도, 외국에 나가도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수많은 대적이 우리를 에워싸고 공격해올지라도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 내가 너무 힘들고 내가 너무 어려울때 그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누구보다 큰 사랑의 마음으로 내 옆에 서 계신다. 이 세상에서, 아니 이 세상이 측량할 수 없는 크고 강한 존재가 세상이 나를 등진것 같을때 내 옆에 서계신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가도 나는 항상 네 옆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주님은 약한 내 옆에서 든든히 곁을 지켜주신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때에도 그 돌들을 다 막아주시면서 옆에서 떠나지 않으신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우리 위에서 군림하시는 분도 아니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분도 아니다. 그분은 우리 곁에 서서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고통을 경험으로 이해하시는 분이시다. 힘들때 비슷한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하는 위로는 듣기조차 싫다. 그래서 가끔 대통령이 연설하는 것을 들으면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를 하고 있다고 느껴질때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30년을 사셨다. 로마나 그리스가 아닌 가장 가난한 나라 유대땅에서 가장 천대받던 시골동네 나사렛, 그곳에서도 가장 천대받던 목수로 30년을 사신 것이다. 흙수저의 삶, 하루종일 힘들게 일하고도 간신히 입에 풀칠하는, 그렇게 설명될 삶을 사셨다. 멀쩡한 제품을 가지고 와서 환불해달라고 하는 진상 고객도 겪어 보셨다. 직장 동료와 상사 사이에서 부대끼는게 무엇인지, 믿는 사람에게 발등 찍히는것이 어떤 것인지 경험하셔서 알고 계신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가짜 불법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히고 억울하게 가시면류관을 쓰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다 경험하신 것이다.
히 2: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을 주님이 다 몸으로 겪어보셨다. 왜? 그래야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실수 있고 공감하실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할때 우리의 처절한 심정을 다 헤아릴수 있으시며 유일하게 그 시험을 이기고 나아갈 수 있는 길잡이를 해주실수 있는 분이시다. 미리 겪어보셨기 때문이다.
예전에 콜로라도에 살았던 한 청년, 대니가 있었다. 그는 어느날 그 지역에서 손에 꼽히는 콜로라도 절경을 보기위해 유능한 가이드를 따라 길을 나섰다. 거의 다 와갈때쯤 아주 긴 동굴을 통과해야 했었는데 동굴로 들어가기 전 가이드는 대니에게 여러번 당부했다고 한다. '이 동굴은 끝에서 점점 좁아질거야, 아주 어두울거고, 그치만 끝까지 날 믿고 따라와야해. 나는 이 길을 끝까지 가본 사람이야. 날 믿어야 해.' 그렇게 출발하여 동굴의 끝으로 갈수록 정말 나중에는 사람이 땅에 바짝 엎드려 기어가야 할 정도로 좁고 어두운 길이 수십미터가 이어졌다고 한다. 폐쇄공포증이 없던 사람도 생길 것만 같은 그 길안에서 대니는 두려움이 엄습해 살려달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러자 바로 앞에서 가고있던 가이드가 계속 목소리를 내며 '내가 아까 얘기했지 대니, 나를 믿어야해. 나는 너를 버리고 혼자 가지 않을거야. 나는 이 길을 끝까지 가본 사람이야. 나를 믿어야해.' 하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 목소리에 의지하여 그 좁은 길을 끝까지 간 대니는 동굴이 점점 넓어지는 것을 느낄수있었고 마침내 아름다운 콜로라도 절경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를 아주 적절하게 나타내고 있다. 너무 어두워서 앞서 가고 있는 가이드의 형태조차 보이지 않을때, 우리는 그분의 목소리에 계속 의지해야 한다. 그럼 그분이 주시는 평강이 우리 마음의 평안을 지키실 것이다. 그분의 은혜가 우리를 치유할 것이다. 그분의 능력이 우리에게 길을 내 주실 것이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의 짐을 함께 져 주시면서 고난가운데서도 복 주시는 분이시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고 계신 멍에는 두 마리의 소가 함께 끌어야 하는 모양을 말한다. 즉 우리 삶의 모-든 상황과 여건 가운데 같이 짐을 지고 가시겠다는 뜻이다. 옆에 서서 보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함께 이겨내자고 하시는 것이다. 나의 마음이 기쁨과 평안으로 잠잠하여져서, 부족한 내 능력으론 할 수 없는 일까지 주님 주시는 능력으로 해결하며 주님께 영광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장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요셉이다. 사실 요셉의 삶 전반부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제대로 느낄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친 형제들에게 팔려서 이역만리 타국에 노예로 팔리고 또 자리잡고 살만하니까 보디발 아내에게 모함을 당해 성폭행 법으로 감옥에 갇혔다. 요셉의 17살 부터 30살까지는 거의 악몽과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요셉 삶의 전반부에는 하나님이 멀리 계셨고 30살에 총리가 되고 나서부터는 함께 계신것 같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오히려 요셉의 전반부에서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는 말이 더 많이 나온다. 후반부가 아니다. 별은 항상 있지만 밤에 빛나는 것처럼 요셉이 겪은 모든 고통을 하나님이 같이 지고 가셨던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그 긴장과 스트레스로 가득찬 노예생활 하루하루를 힘들었지만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함께 지나며 절망하지 않을수 있었던 것이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성공을 주셨다고 나온다. 고난을 함께 겪어 나가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우리에게 고난의 마침표, 성공을 주시는 것이다. 사막안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게 하시는 분이다. 즉 '형통'은 '잘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다. '문제 가운데서 그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챔피언의 영광이 있는 것이다. 영웅은 모든 고난을 이기고 형통하여 영광을 발하는 것이다. 축복 가운데서도 밋밋한 인생이 있는가 하면 고난 가운데서도 형통한 삶이 있다. 하나님은 능동적으로 개입하시는 분이다. 요셉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인해 고난가운데서도 은혜를 누렸다. 중요한 것은, 모든 저주와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시는 분은 오직 임마누엘 하나님 한분 뿐이라는 사실이다. 고난가운데서도 신비한 은혜를 누릴 것이다.
우리가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진정으로 누리기 시작하면, 세상 사람들, 내 주위의 사람들이 그 평안의 근원을 알게 되기 시작한다. 보디발이 그랬고 바로왕이 그랬다. 그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요셉을 통해 요셉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느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노예로 몇달을 굴리면 비굴해지고, 소망이 없어지고, 무기력해 졌을텐데 요셉은 겸손하고 지혜롭고 순결했다. 무슨일을 시키든 열배 스무배로 잘해냈다. 이것은 정상적인 것을 넘어선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일어날수없는 기적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산전수전 다겪은 보디발 장군과 바로왕은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한눈에 알아봤다. 임마누엘의 고백을 주변 불신자들로 부터 하게 하셨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환난 가운데 우리를 지켜 주시는 분이다.
단 3:24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예수 안믿었던 느부갓네살 왕이 풀무불 속에서 다니엘과 함께 하고 계시는 빛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불신자의 입을 통해서 정확하게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에 던져지는 것을 막아주시지는 않았다. 우리의 기도가 보통 그렇다. 고난으로 부터 지켜달라, 고난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한다. 나는 병에 안 걸렸으면 좋겠고 사업이 안망했으면 좋겠고 마음을 힘들게 하는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기 싫다고 기도한다. 산이 옮겨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눈떠 보니 산이 그대로 있다. 그렇게 기도했는데 고난이 온 것이다. 그러나 보라. 하나님은 풀무불 속에서 함께 하심으로 다니엘과 세친구를 지켜주셨다.
사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하나님은 우리 앞의 불을 치워주시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가 불 안으로 들어갈때 같이 들어가셔서 기적을 체험하게 하신다. 물 안으로도 들어가게 하실 때가 있지만 그 안에 함께 계시면서 물이 우리를 침몰하지 못하게 은혜로 막아주신다. 이것이 은혜이다. 이것이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다. 고난을 왜 막아주시지 않았느냐고 기도하면 알게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힘든 시기를 바로 옆에서 함께 하시며, 힘들었으나 죽지 않고 지금의 내가 있게 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임마누엘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성경에는 '거룩'이라는 단어가 347번 나온다. 그런데 그 맥락이 항상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얘기하는 맥락에서 나온다. 대표적인 말씀이 레위기에 나온다.
레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죄로 부터 자유해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나와 함께 걷고 계시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항상' 의식하는 것이다. 중독을 이겨내야 겠다고 금방 무너질 사람의 결단을 하기보다 내 옆에 계신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계속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골목길에서 불량배들을 만났을 때 아버지가 함께 계시면 너무 든든하다. 그런데 그 아이가 조금 자라서 불량식품을 사먹으려고 골목길로 빠졌을때도 아버지가 함께 있다고 생각해보라. 든든했던 아버지의 존재가 얼마나 부담스럽게 느껴지겠는가. 마찬가지다. 내가 힘들때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복음이시다. 그런데 내 멋대로 하고싶을 때는 하나님이 잠깐 다른곳을 봐주셨음 좋겠다고 생각한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나의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압박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시 139: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뛰어봤자 벼룩이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 우리와 딱 붙어 계신다. 순종의 삶을 살때는 엄청난 은혜와 기쁨이다. 그러나 조금만 불순종의 삶을 바라는 순간 얼마나 압박으로 다가오는가. CCTV 200개 달아놓은 것보다 더 무서운 말씀이 되는 것이다. 구약의 요나가 이것을 체험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때 우리를 멈춰세우시고 돌이키시는 분이신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야 한다. 어떤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데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부담스럽다? 잘못된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결정을 했는데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거북하다? 잘못된 결정을 한 것이다. 어떤 말을 했는데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슬퍼하실 것 같다? 틀린말을 한 것이다. 그래서 뭘 하든지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어떻게 느끼실지를 생각하며 행하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거룩함이 없이 임마누엘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며 안된다. 그 분이 부담스럽고 거북한 상태에서 함께하고 계시면 실패할 것이고 망하게 될 것이다.
사사기에서 자기 멋대로 살던 백성들이 블레셋 군과 전쟁을 하게 되었을 때, 법궤'만' 가지고 나갔다고 승리할 것이라 자부했지만 결국 대패하여 법궤를 빼앗겨 버렸던 것처럼 삶의 거룩은 내팽겨치고 신경도 쓰지 않는 상태에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보호만을 바란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항상 하나님을 묵상하며 그분과 교제해야 한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움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게 해주신다. 위대했던 모세의 후임자로 여호수아는 두려웠다. 그는 담대한 인물이었음에도 전임자의 명성이 너무 컸고, 기다리고 있는 가나안 적군은 너무 큰 반면에 인솔하고 있는 백성들은 너무나 약했기에 두려웠다. 수심이 가득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역시나,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위로하시고 격려해주셨었다.
수 1:5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모세와 비교하지 마라, 모세와 함께 했던 내가 강했던 것이다. 이제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너와 함께 하는 나를 믿는 것이다.' 말씀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나올때 마다 같이 붙어나오는 말씀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두려워 하지 말라, 적이 그렇게 세지 않다.'가 아님을 기억하라. '두려워 하지 말라, 너도 힘을 내면 할 수 있다.'가 아님을 기억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라고 하셨다. 임마누엘의 약속이야 말로 모든 두려움을 이겨낼 수있는 해법이다.
두려움은 내가 가진 자원보다 문제가 더 크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다. 내가 가진 인맥, 돈, 실력이 문제에 비해 택도 없을때 생기는 감정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동안 헤메인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었다. 그 곳은 '불경기'가 아니라 '노경기' 아예 '무경기' 였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그 곳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40년은 커녕, 단 나흘도 버티기 힘든 곳이었다. 그런 곳이 광야이다. 그러나 믿음 하나로 40년을 살아 남았다. 우리도 임마누엘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를 따르겠다는 결심으로, 그런 자세로 모든것을 이겨낼수있다.
이것이 세상과 교회의 다른 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세계가 패닉에 빠지고 각 나라의 지도자들도 방법을 몰라 근심이 가득한 이때에 임마누엘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위로와 격려를 보여줘야 할 때 인것이다. (아래 링크 영상 37분에 나오는 영상을 보길 추천한다. 이 영상은 미국에 살고있는 교회 지인이 한홍 목사님께 공유한 영상으로, 목사님과 새로운 교회 팀이 한글 자막을 달아 공유한 영상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과 우리의 다른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패닉속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하고 침착할 것이다. 내것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돌아볼 것이다. 옆에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믿고 느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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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_nsDTev4y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