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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therine Jun 17. 2020

Son of God 하나님의 아들

요3:16/ 마3:16-17/ 요14:7-11/ 요일3:8/ 요일4:15

한홍 목사님 4월 27일 설교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무려 49번 등장한다. 예수님 자신도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하신 적이 많으셨다.


1. 우리와 차원이 다르신 능력과 지혜


가끔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는 상식선에서 예수님을 믿고 있을 때가 너무 많다. 그러나 믿음 없는 세상 사람들도 그 정도는 믿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공자, 맹자, 석가모니 정도의 훌륭한 위인이셨다 정도는 누구나 납득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인간들 중에 가장 위대한 존재가 아니시고 그 누구와도 비교가 불가한 하나님 자체이신 것이다. 성경책 또한 논어같이 좋은 말을 모아놓은 책이 아니고 지혜와 능력이 축약된 살아있는 스토리이다.


요일 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올려드려야 할 고백이 어떠한지를 나타내 주고 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그 격차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이다.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전지전능하심이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생각하며 무의식 중에 너무나 쉽게 예수님의 무한한 능력과 존귀하심을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한다는 것은, 좋으신 분이라는 뜻을 넘어 만유의 주재이신 예수님을 고백하는 것이란 걸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굶주린 사람들을 보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을 때는 본인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군중을 먹일 수 있는 계획과 힘이 다 있으신 건데, 당시 제자들의 반응을 보라. 빌립이 툭 나서서 '200 데나리온이 있어야 전부 입에 풀칠이나 하겠습니다.' 하고 말했었다. 인간적인 해결방법으로 의견을 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신 게 아니라 우리의 순종이 필요하신 분이다. 주님은 200 데나리온을 가지고 그렇게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하게 하실 NGO단체 리더가 아니시다. 그분은 이미 수백만이 넘는 백성들을 광야에서 배부르게 먹인 경험이 있으신 분이다. 그분에게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과 회의하려고 하고 하나님을 도우려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원하시는데 말이다.


나사로가 죽은 지 사흘 만에 에수님이 오셨을 때, 그의 누이들이 뭐라고 했었는가?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텐데.' 하고 말했었다. 누이들은 예수님을 마치 허준처럼 뛰어난 의사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좋은 의사를 넘어선 분이시다. 그는 죽은 자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우리와 차원이 다른 분이시다. 문제를 접근하는 레벨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던 제자들이 풍랑에 휩싸였었다. 이 제자들은 어부로 잔뼈가 굵은자들인데도 사색이 되었던 걸로 봐서 정말 큰 풍랑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주무시고 있었던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던 것이다. 그러데 깨어나신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 풍랑보다도 먼저 제자들을 꾸짖으셨었다. 후에 풍랑을 잠잠하게 하셨다. 오죽했으면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었겠는가. 예수님도 같이 배의 노를 잡고 노력해 주셨어야 했는데 왜 주무시고 계셨던 걸까? 예수님이 리더신데 배가 뒤집힐 것 같은 순간에도 왜 주무시고 계셨느냔 말이다. 그리고 애쓰고 있는 제자들의 외침이 왜 야단맞을 일이었을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본인을 아직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지 않는단 걸 아시고 그들을 나무라셨던 것이다. 그것이 이유이다. 그냥 단순히 뛰어난 스승으로만 보니까 위험의 순간에 사색이 된 제자들이 안타깝고 답답하셨던 것이다. 패닉에 빠진 제자들이 어이가 없으셨을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과 그냥 기도하는 것은 이처럼 태도의 차이, 온도의 차이가 난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길 원하신다. 진짜 믿음 안에서 패닉에 빠지지 않길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제자들이 그것을 온전하게 믿어주지 못했다. 또한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놀랐다'라고 한다. 영어성경에서는 이 놀라움을, '충격받았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당시 군중들은 랍비의 설교와 가르침을 많이 들었던 자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충격을 받을 정도로 놀라고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차원이 다른 설교였던 것이다. 세상에 똑똑한 엘리트들은 참 많다. 그러나 예수님과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예수님은 너무나 심오한 진리를 아이들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풀이해주신다.


아무리 잘 써진 책도 두, 세 번만 읽으면 지루해지는데 성경은 평생을 읽어도 날마다 새롭다. 하늘의 은혜가 내 삶을 풀이해주기 때문이다. 읽을 때마다 다른 나의 삶이 성경 안으로 녹아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 기도함으로써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다니엘은 기라성 같은 지혜자들과 권세자들 틈에 있었지만 날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함으로 그들 중에 가장 뛰어 날 수 있었다. 항상 시험을 보면 나머지 사람들보다 열 배가 뛰어났다고 한다. 이것은 1등 2등 정도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차원이 다른 분임을 믿는 것,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차원은 길이와 넓이만 있는 평면 세계이다. 거기에 높이가 더해져 입체가 되면 3차원이 되는 것이다. 만약, 2차원에 살고 있는 네모에게 그가 살고 있는 종이를 앞뒤로 뚫는 연필이 장애물로 탁 꽂혔다고 생각해보자. 네모는 이게 연필 인지도 모를 것이고 후진하거나 돌아가거나를 방법으로 강구할 것이다.


그런데 3차원에 살고 있는 사람은 연필을 뽑거나 네모를 들어서 연필 앞으로 보내줄 수 있다. 자동차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비행기와 견줄 수가 없듯이 2차원의 세계에서 아무리 노력하고 고민해도 3차원의 해결방법을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열심히 노력해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열심히 하는 사람과, 기도하는 사람의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요즘 열심히 안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와 다른 차원이신 하나님의 손을 잡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그 차원으로 올라갈 수 있다. 어떤 문제를 바라보고 어떻게 이 일을 해결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고민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고민하실 일이다. 하나님의 뜻인가가 중요할 뿐이다.


우리가 이미 여러 번 듣고 알고 있는 홍해 사건만 봐도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하나만으로도 벅찼는데 전차부대까지 겹쳐서 그들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눈앞에 넘실거리는 바다와 뒤에 성난 전차부대와 같이, 열심히 한다고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들이 바로 우리 삶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개입하셨을 때 백성들은 바다를 안전하게 건넜고 적들은 수장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분을 우리의 주로 고백할 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신 분께 우리 삶을 통째로 넘겨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감탄할 준비만 하면 된다. 살아있는 믿음이다. 성경의 모든 기적 중 믿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고 우리 또한 기적의 주인공인 것이다.


2. 차원이 다르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믿음과 순종을 드릴 것


아무리 이해가 안 가도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그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과정을 가장 잘 한 사람이 '베드로'가 아닐까 한다. 베드로는 아이큐가 그렇게 높은 사람 같지는 않다. 바울서신과 베드로전서를 비교해보면 차이가 좀 나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왜 귀하게 사용하셨는가, 베드로는 이해를 못해도 하나님의 아들을 인정하는 믿음이 있었고 행동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만나셨을 때 어떤 사건이 있었는가. 그날은 평생 뱃사람이었던 베드로가 전날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는데도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날이었다. 빠삭한 전문가 베드로에게 아침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깊은 데로 가서 다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다. 처음 보는 사람이 그렇게 얘기하니 베드로의 기가 찰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자존심이 있지, 척 보기에도 목수 같은 사람이 와서 그물을 깊은 데로 가서 다시 던지라니. 밤새도록 했던 작업을 말이다. 고기의 '고'자도 모를 것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는. 그런데 그날 베드로는 분명 예수님의 모습에서 어떠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단순한 목수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마음을 누르고 한번 시키는 대로 해본 것이다. 그렇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다시 한번 내린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위대한 믿음의 선택인 것이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해야 한다. 궁시렁은 거릴지라도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찢어질듯한 그물을 보며 베드로가 뭐라고 외쳤었는가. '우와, 당신 고기잡이 협회 회장감이야!' 이러지 않았다. 베드로는 부들부들 떨면서 엎드려 고백했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는 알았던 것이다. 똑같은 바다에서 없던 고기떼가 생겼다는 것은 단지 물속을  짚어내는 인간의 수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베드로는 뛰어난 인간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본인 앞에 서계시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처음부터 베드로는 어렴풋이 그런 느낌이 있으니까 믿음으로 그물을 던졌던 것이다. 그런 베드로니까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자기도 걷겠다고 했지, 도대체 누가 그런 생각을 했겠는가. 베드로보다 훨씬 아이큐가 높은 도마나 빌립은 따지기를 좋아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빌립에게 말씀하셨었다. 너의 차원을 벗어나서 믿음의 세계로 가야 한다고 말이다.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이 빌립에게 주셨던 말씀이다. 이처럼 다 '이해하고'나서 믿으려고 하면 평생 못 믿는다. 믿음은 행동이다. 여러 번 얘기했지만, 다시 묻겠다. 비행기가 승객을 태우고 중력을 이겨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역학을 다 이해해서 비행기 타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못 믿는 것은 우리의 생각안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해를 시켜주고 싶어도 안 되는 것이다. 그저 믿고 따라오게 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일 때가 있는 것이다. 현대 과학이 정말 많이 발달했지만 아직도 설명하기 어려운 자연현상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다 분석하고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가. 이제는 '내가 이해 못하는 차원의 해법이 있겠구나'하고 믿어야 한다. 그렇게  삶을 맡겨야 한다. 하나님이 믿음을 원하실 때 우리는 회의를 너무 많이 한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원하실 때 우리는 걱정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성품


위대한 제국을 이룬 사람들 중에 2세들이 잘못해서 다 말아먹은 사례가 굉장히 많다. 힘을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절제할 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의 부, 권력 따위를 넘어선 절대권력이 있는데도 함부로 휘두르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그 능력과 지혜를 남용하거나 오용하신 적이 없다. 이것이 예수님의 위대함이다. 나라안에서 총기규제만 안 해도 범죄율이 높은데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어떤 작은 능력이라도 인간에게 있었다가는 분명 지구가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능력을 남발해보라고 유혹했었다. 슈퍼히어로가 되어보라고 유혹했었다. 돌들이 떡이 되게 해 보라고 했었다. 식량문제를 해결하면 세계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 했다. 높은 데서 뛰어내린 후에 죽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이 황제로 받들 것이라고 유혹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셨다.


이미 하늘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능력이다. 마귀들이 알아본 능력이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그 힘을 휘둘러서 자기를 입증하실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살리는 데에도 그 슈퍼파워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마 27: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슈퍼파워를 한번 보여줘 봐라, 그러면 믿겠다 말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예수님은 옳다구나 능력을 쓰시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그때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셨었다면 우리 모두는 우리의 죗값을 지고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구원하길 포기하신 것이다. 절대 파워를 쓰지 않으신 것이다. 너무나 무기력하게 죽으신 것이다. 어느 누가 이런 선택을 할까. 작은 칼만 하나 쥐어줘도 막 휘두르고 싶어 하는데 말이다. 절대 능력이 있는데 자기 목숨을 잃는 순간까지도 그 파워를 절제한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능력과 그분의 지혜가 얼마나 높으신지를 반증하는 것이다.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늘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하셨던 것이다. 월드컵이라는 목표가 있는 선수는 동네축구하면서 힘 빼지 않는다. 다른 일에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가장 집중해야 할 한 가지에 모든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품이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성품이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세상에서 제일 최악의 상황이 자기 힘을 절제할 줄 모르는 악한 자가 힘을 가지는 것이다. 절대 능력을 오직 예수님께서만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물 위를 걸으셨던 사건도, 사실 유대 사람들 제일 많이 모인 날 가장 해가 밝은 시간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한번 걸으셨으면 상황 끝이었는데도 예수님은 그러시지 않으셨다. 그 기적은 의도적으로 절제하셔서 제자들에게만 보여주셨다. 천군 천사를 불러 로마군과 보여주기 식 전쟁을 하실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으셨다. 그는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시고 보게 하시고 듣게 하셨다. 그분이 베푸신 기적 중 쇼맨십으로 행하신 것은 없는 것이다. 온유하신 분이셨고 우리가 닮길 원하신다.


4.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심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내 삶의 유일하신 분이다. 그분이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고 내 필요를 다 온전하게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문제에 함몰되지 말고 죄에서 나를 구원하신 그 예수님께 내 삶의 문제들까지 전부 다 내어드려야 한다. 나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시려고 예수님은 모든 것을 집중하셨고 마지막까지 절제하셨던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컵일지라도 감정 전문가가 1억만큼의 가치를 매기면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듯이 예수님께서 존귀하게 보고 계시는 내 삶을 귀하게 여기고 이제 그만 주님께 내 존재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5. 하나님의 아들은 어둠의 권세를 멸망시키러 오심


예수님이 가셨던 곳마다 귀신 들린 자들이 비명을 질렀었다. 마귀들은 알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의미를 알고 있었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죄=마귀이다. 마귀를 죽이지 않으면 죄의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다.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 세상 권세를 잡고 있는 마귀는 가짜 왕이다. 진짜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이미 승리하셨다. 우리는 그 뒤를 쫓아가야 한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우리의 평강을 위해 싸우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싸우셨고, 우리의 인생을 위해 성령을 주셨다. 우리가 싸우는 전쟁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기도할 뿐이다.


6.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께로 우리를 연결시켜 준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


영어 성경에 보면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라고 말한다. 정관사 the가 길과 진리와 생명이란 단어 앞에 붙어서 '내가 곧 유일한 길, 유일한 진리, 유일한 생명'이라는 뜻인 것이다. 플랜 B는 없다. 하나님의 모든 축복과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 나에게 온다.


예전에 미국에서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는 총기 소지 검사를 한 후 이름을 적어놓고 커다란 홀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대통령의 업무가 워낙 많기 때문에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저녁이 되어 업무시간이 끝나면 기다리던 사람들은 다시 돌아갔다가 다음날 다시 오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때도 고위층에 아는 사람이 있는 사람들은 먼저 순서를 새치기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나이가 지긋한 참전군인 한 명이 전쟁의 아픔으로 직업을 구할 수 없는 문제를 대통령과 상의하고자 며칠 동안 기다리고 있었을 때였다. 그날은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 틈새로 누가 데려왔는지 작은 남자아이가 그 넓은 방을 뛰어다니며 혼자 재미나게 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아이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이 참전군인은 집에 두고 온 막내가 생각나 이 아이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주고 질문도 하며 이왕 기다리는 거 재미있게 기다리자는 마음으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그날도 군인의 순서는 오지 않았고 돌아갈 시간이 되어 어깨가 축 쳐진 군인이 아이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찰나, 갑자기 아이가 군인의 손을 잡아끌며 '내가 대통령 만나게 해 줄게요.' 하고 말했다. 이 군인은 이 방을 나서기도 전에 아이가 제지당할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그곳을 지키고 선 대통령의 비서들과 경호원들이 모두 웃으며 길을 내어주더라는 것이다. 드디어 대통령의 집무실의 문이 활짝 열리고 링컨 대통령의 모습이 보였을 때 아이가 크게 외쳤다. '아빠! 이 군인 아저씨랑 같이 저녁 먹어요! 이 아저씨 좀 만나주세요!' 하고 말이다.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 왜 우리가 모든 기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끝내야 하는지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 이름 하나로 모든 복잡한 절차들을 다 건너뛰고 하늘의 임재 앞으로 바로 갈 뿐 아니라 너무나 기쁘게 하나님이 마음을 열어 맞이해 주시는 것이다. 아들이 손잡고 데리고 온 그 군인을 링컨 대통령이 기쁘게 식사에 초대한 것처럼 말이다. 그 부탁이 합리적이어서가 아니다. 아들이 손을 잡고 데리고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아버지 앞에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맞이하여 주시는 것이다.


요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다. 우리의 행동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기준과 차원이 다르다. 예수님 때문이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나의 모든 생각과 경험을 내려놓고 보배로운 예수님의 이름에 힘입어 행동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이성적인 논리를 내려놓아야 한다. 차원이 다른 믿음으로 승리하여야 한다.


https://www.godpeople.com/?GO=tv_detail&tv_mv_no=18056

https://www.youtube.com/watch?v=N1-8wfBRG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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