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14:6-15/ 수15:13-19 한홍 목사님
최근 통계를 보면 40년과 비교했을 때 평균 기대수명이 많이 상승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우리나라는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는데, 기업들은 정년퇴직을 앞당기고 있다. 성경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퇴직 후의 삶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약속의 땅으로 이민 간 것은 75세 때였었고, 이삭을 낳았을 때는 100세였다. 모세는 80세를 넘긴 후에 200만 이스라엘을 이끌고 출애굽 하여 40년 동안 백성들을 이끌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나이를 초월하여 사람들을 이끄신다. 세월이 사람을 늙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가 진정으로 그를 늙게 만드는 것이다. 아직 젊은데도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무기력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 또 나이가 들었는데도 젊은이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새로운 미래를 도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
갈렙은 광야 40년 세월을 거쳐서 가나안 정복전쟁에 이르기까지 100년 가까운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불신하고 불평하는 백성들 가운데서도 독야청청하는 하나님을 향한 매일 성장하는 뜨거운 믿음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향해 영원한 청년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7년에 걸친 정복전쟁이 마무리될 즈음에 갈렙이 여호수아 앞으로 나왔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출애굽 1세대를 살아남은 유일한 인물인데 비록 여호수아가 총 지도자였지만 그는 아마 믿음의 친구 갈렙을 존경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 갈렙이 여호수아 앞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구를 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수 14:6 그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7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갈렙은 지금 히스토리 리뷰를 하고 있다. 가나안에 열 두 정탐꾼을 보냈을 때 어떠 일이 있었는지를 얘기해 주고 있다. 정탐하고 돌아와서 두 명을 제외한 열명은 아주 부정적인 이야기를 전했던 사건 말이다. '아낙 자손의 거대함 앞에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라고 말하는 정탐꾼 때문에 백성들은 정작 본 적도 없는 아낙 자손을 두려워하며 불평하기 시작했다. '왜 애굽에서 나왔을까, 모세가 원망스럽다, 하나님이 원망스럽다.' 이때 갈렙이 나섰었다.
민 13: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살벌한 그 상황 가운데 웬만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저런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열 정탐꾼들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여론을 이끌어놓았기 때문에 틀린 얘기여도 다수가 압도적인 분위기로 그것을 맞다고 우기고 있으면 왕따 당하기 싫어서라도 반대 의견을 제시하기 어렵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갈렙은 용기를 내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고 선포했다. 누군가는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비겁한 중립을 지키지 말고 우리는 하나님의 편을 들어야 한다. 갈렙의 말은 짧았지만 힘이 있었다.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갈렙이라고 무서운 아낙 자손을 보지 못했겠는가? 그러나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압도하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무엇을 보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눈으로 보느냐 이다. 믿음이 없이 문제를 보니 다들 문제에 움츠러들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갈렙도 똑같이 아낙 자손을 보았지만 그는 위축되지 않았다. 어떤 약속의 땅도 프리패스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반드시 무서운 장애물들을 거쳐서 가야 한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갈렙처럼 그 장애물들 앞에서 위축되지 않는다. 문제를 직시하지만 문제를 압도하시는 하나님을 보기 때문이다. 다른 정탐꾼들이 거인 같은 아낙 자손만 보고 완전히 움츠러들었을 때 갈렙은 아낙 자손 위에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다. 하나님의 임재를 본 사람은 문제가 더 이상 문제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가슴에 뜨거운 용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보지 못하면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겁쟁이가 될 수밖에 없다.
갈렙은 젊었을 때부터 문제를 보기 전에 하나님의 위대함을 먼저 묵상하는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이 평생 그의 인생을 승리로 이끄는 힘이 된 것이다. 우리도 젊은 청년의 때부터 그런 습관을 가져야 한다. 문제를 보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는 그런 습관. 바로 이 자세가 우리를 승리로 이끌 것이다.
이 열두 정탐꾼들은 각 지파에서 능력을 검증받은 인물들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대기업이나 좋은 회사에 취업할 수 있는 고 스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적인 스펙과는 전혀 다른 것을 가지고 갈렙을 높이 평가하셨다.
민 14: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그 마음이 그들과 달랐다'는 표현을 영어성경에서 보면 'Caleb has a different spirit'이라고 표현한다. '영'이 달랐다는 것이다. 영적인 근원이 있다. 보이는 액션 뒤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근원, 영의 근원이 있는 것이다. 불신하는 백성들 뒤에는 좌절하게 하고 낙담하게 하는 악령이 있었다면 갈렙의 뒤에는 성령이 있었다. 갈렙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시고 부활의 영이시다. 성령 충만한 사람 옆에는 생명이 살아난다. 성령 충만한 사람 옆에 있으면 놀랍게도 복잡한 상황이 심플해지고 답답한 상황도 시원하게 해결되는 것 같다. 뭐든 될 것 같다는 긍정적인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사람과 대화하고 있으면 두려움이 사그라들고, 염려와 근심이 자취를 감추고 말할 수 없는 영적인 평화가 나를 지배하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아이디어도 항상 새롭게 나오고 생각이 항상 신선하다. 영혼이 어린아이처럼 맑고 깨끗하고 보혈의 능력이 그 안에서부터 생성된다. 이 성령 충만했던 갈렙과 같이 우리도 매 순간 성령에 감동되어 움직이는 사람이길 기도한다.
청년 시절의 갈렙이 나이가 들어 중년이 되었을 때 그는 멋있는 '인내심'을 갖춘 사람이었다. 출애굽 1세대의 불신으로 인하여 약속의 땅 진입이 무려 38년이나 늦춰졌다. 그 세월을 그들은 광야, 사람이 살 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 보내야만 했다. 솔직히 갈렙에게 있어서 이 시간은 억울했을 수도 있다. 솔직히 다른 사람들은 불신해서 그렇게 되었다지만 자기와 여호수아는 담대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었는데 왜 같이 돌아야 하는지 인정할 수 없었을 수 있다. 공평하게 하시려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차 안에 두셨다가 바로 가나안 안으로 들여보내 주시기라도 하셨어야 했다. '나는 할 수 있다고 했는데, 할 수 없다고 한 쟤네들하고 왜 같이 벌을 받아야 하지? 38년 동안 이게 무슨 고생이냐' 불평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사람 때문에 자기 꿈이 뒤로 밀려난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38년을 인내하고 참아냈다. 남들 때문에 나에게 올 복이 뒤로 밀려난 것 같아 보여도 너무 분해하지 않아야 한다. 때로는 나도 사고 쳐서 남의 꿈을 뒤로 밀려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도자란 다른 사람의 잘못을 같이 어깨에 짊어지는 사람이다. 억울한 것을 견딜 수 없으면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갈렙의 그 푸르른 청춘은 광야에서 지나갔다. 마라톤 경기에서 가장 힘든 순간은 처음과 끝이 아니라 중간 부분이다. 거기는 손뼉 쳐주는 청중도 없고 단조롭고 숨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은 순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 기간을 참고 견디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우리의 인생도 대부분 이 중간기를 버티는 데 사용된다. 이 기간은 성숙기이자 시련기이기도 하다. 당장이라도 가나안을 치고 들어갈 수 있었던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갈렙에게 있어서 이 광야의 시간을 견딘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 14: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갈렙의 고백을 보라. 그 긴 시간을 갈렙이 견딘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견디게 해 주셨다. 살아있는 것은 살려두시기 때문인 것을 믿어야 한다. 이 억울한 인고의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하나님께서 갈렙에게 '자, 갈렙! 오늘도 힘차게 버텨보자!' 하고 응원해주셨기 때문인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어떻게든 잘 되겠지'가 아니다. 상황마다 힘을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 바로 힘의 근원인 것이다.
수 14: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축복의 말씀을 전해주었더니 청년 갈렙이 그 말씀을 딱 붙잡고 의지했다. 가슴에 새기고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그 말씀을 묵상한 것이다. 먼지 쌓일까 보고 또 보면서 말씀을 의지한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말씀의 사람이다. 말씀과 성령은 쌍둥이 같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말씀을 허투루 듣지 않는다. 아멘으로 받고 그 말씀을 소중하게 여긴다. 만약 우리가 어떤 말씀을 매일 묵상하고, 의지한다면 그 말씀은 우리의 것이다. 같은 설교를 들어도 어떤 사람의 인생은 변하는데 어떤 사람의 인생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말씀을 가슴에 받지 않아서 이다. 오늘의 본문 여호수아 14장 9-12절에도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는 구절이 계속해서 나온다. 갈렙은 말씀을 철석같이 붙드는 사람이었다. 말씀을 흘려들으면 안 된다. 딱 붙잡고 내 것으로 선포하여야 한다. 이것이 내게 이루어질 것이다 믿어야 한다.
병 속에 나쁜 공기가 깃들었다면 깨끗한 물을 부어버리면 된다. 우리 안에 절망이 있고 근심이 있다면 소망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초대해야 한다. 저런 종류의 악한 것들은 내 힘으로 쫓아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흡수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절망이 사라져 버렸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날마다 말씀이 홍수처럼 들어오게 해야 한다. 이 말씀을 듣고 귀하게 여기고 선포하여 말씀을 우리 삶 안으로 들어오게 해야 한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삶 안으로 들어오실 것이다. 그래서 갈렙은 이 인고의 세월을 말씀을 붙잡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모세가 죽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최고 어른은 이제 여호수아와 갈렙이다. 실력이나 나이나 모든 것에서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전혀 뒤처짐이 없는데 하나님의 후계자 선택은 여호수아였다. 갈렙이 섭섭하지 않았겠는가. 내가 어디가 부족한가, 불평할 수도 있었지만 갈렙은 단 한마디도 불평하지 않았다. 7년 가나안 정복 전쟁 동안 갈렙은 여호수아를 도와 이인자로써 전쟁들을 다 치러낸다. 갈렙이 어떻게 이렇게 불평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을 붙잡았던 것이다. 원래 나이가 들수록 명예나 권력에 욕심이 더 날 수 있다. 그런데 갈렙에게는 그런 면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45년 전에 그의 가슴속에 새긴 피보다 진한 말씀이 그의 생각과 감정과 삶 안에 살아있었던 것이다. 왜 우리가 남을 질투하게 되는가, 왜 일인자와 이인자를 놓고 다투고 경쟁하게 되는가? 자기에게 주신 비전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 이웃의 것을 탐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갈렙은 여호수아가 갈 수 없는 자신에게만 주신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수 14: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그도 알았다. 이 산지가 얼마나 크고 견고한지를. 헤브론이었다. 매력적인 땅도 아니었다. 해발 927m, 높은 요새를 지키고 있는 거대한 아낙 자손은 평균 신장이 2m가 넘는 네피림의 후손들이었다. 가나안 최고의 전사들이었다. 이 무시무시한 땅을 갈렙이, 그 나이에, 왜 그토록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우리가 갈렙의 최측근 참모라면 어땠을 것 같은가. 기가 차지 않았을까? 지금 갈렙은 여호수아 버금가는 큰 어른이고, 그가 세운 공로가 얼마나 많은지 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을 것이다. 갈렙은 지금 백지수표를 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호수아에게 어느 땅을 찍어도 그에게 다 주게 되어있는 것이다.
똑똑한 참모 같았으면 아마 갈렙에게 '비옥한 이스라엘 평야 달라고 그러세요!' 하고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아니면 '갈릴리 호수 달라고 하세요! 거기서 수산권만 우리가 잡아도 끝내줍니다!' 했을 수도 있다. 이미 다 토벌되어 정복할 적이라도 없는 곳을 달라고 했을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헤브론은 무서운 곳으로, 우리가 지금 정복하다가는 유다 지파가 전멸당할 수도 있는 무서운 곳입니다!' 하고 말렸을 것이다. 왜 굳이 그 땅을 다시 정복하려 하냐고 어르신에게 되물었을 것이다. 이게 웬 무모한 비전이냐고 물음표를 제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갈렙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헤브론이야.' 하고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비전이기에 타협이 되지 않는 것이다. 비전은 편하고 좋은 것이 아니다. 세상적인 잣대로 크고 작음을 잴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이 내게만 가라고 주신 맞춤형 사명이다.
헤브론은 공격하려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데 갈렙이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땅을 원했다. 하나님께서 찍어주신 길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기로에서 자기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결정해야 할 때 갈렙처럼 선택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들은 두려움의 휩싸여서 결정할 때가 많다. 이 일이 얼마나 어렵지? 내가 얼마나 희생해야 하지? 안전하게 내 능력만큼 해낼 수 있는 정도에서 스탑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한다며, 이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기적도 없고 승리도 없고 영광도 없다. 우리를 위해 예비한 약속은 축복이지만 쉽지 않을 뿐이다. 편하지 않을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는 분이시지만 우리를 온실에서 키워주시는 분은 아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지만 안전을 추구하는 분은 아닌 것이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종이 되고 나서 한 번도 안전하게 살아본 적은 없는 것 같다고 웃으며 덧붙이셨다. 항상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서 밀어붙이셨단다. 하나님을 믿는 삶은 모험의 삶이다. 모든 문제에서 격리된 삶이 아니라 험한 물 위로 그분을 바라보는 믿음의 발을 내딛는 것이다. 헤브론과 같은 무서운 땅을 85세의 노인 보고 정복하라는 것은 무모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다. 약속을 믿고 도전하기 때문에 갈렙은 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수많은 청년들이 그를 따를 수 있었다. 젊었을 때 도전정신이 강하던 사람들도 나이가 들면 좀 묵묵해 지기 마련이다. 절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마귀는 항상 우리에게 조그마한 성공 안에서 안주하라고 한다. 주저앉아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라고 한다. 그런데 그 유혹을 끊어야 한다. 성경에서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이 영웅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믿음의 모험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디아나 존스 영화만 봐도 그렇다. 최고의 보물을 찾아 들어가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장애물들을 겪어 내는가. 어떤 보물도 모든 사람의 손이 닿는 푸른 초원에 예쁘게 놓여있지는 않는다. 아무나 갖고 가시라고 놓여 있는 것은 보물이 아닌 것이다. 그것을 위해 목숨을 몇 번씩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간절하지 않은 자들을 걸러내기 위함이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 탐욕으로 그것을 가지려는 자들을 걸러내기 위함인 것이다. 헤브론은 험산 준령의 요새로 아낙 자손이라는 장애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 장애물 때문에 놀라서 돌아가버렸다.
중요한 것은 그 장애물이 욕심으로 탐하는 자를 막기 위한 것이지 나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장애물이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으로 주신 땅의 영적인 가치를 보고 나아가는 것이다. 갈렙이 왜 그렇게 헤브론을 열망했는가? 그것은 그가 청년 때 정탐꾼으로 그 땅을 보았을 그때 영적인 눈으로 그 의미를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헤브론은 600년 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첫 예배 장막을 세운 곳이다. 하나님이 그의 천사들과 아브라함을 만나주신 곳이며 처음으로 아브라함이 돈을 써서 아내 사래의 무덤을 만든 곳이다. 그리고 그곳에 믿음의 조상들이 줄줄이 잠들어있다. 갈렙은 이 땅을 하나님의 축복이 들어오는 땅으로 보았다.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흐르는 땅으로 본 것이다.
갈렙은 이 땅을 정복하는 자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땅의 후손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하는 자,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것이라고 딱 알아본 것이다. 쉬워서 마음에 든 것이 아니라 축복의 통로인 것을 본 것이다. 우리도 선택할 때 그렇게 해야 한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쉬운 것, 쉬운 길이 아니라 영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갈렙의 선택을 기뻐하셨다.
갈렙은 85세가 되어도 계속 성장하는 사람이었다. 벤자민 립이라는 사람은 평생 중국에서 선교하다가 70세에 은퇴했지만 80세에 헬라어를 다시 배워 헬라어 성경을 들고 100세가 될 때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선교의 열정을 불어넣는 설교를 했다. 갈렙이 많은 나이가 되어도 이렇게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던 비결 중 하나는 젊었을 때부터 쌓아온 영적 내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85세 하루아침에 신앙이 좋아져서 '한번 해볼까?'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젊을 때부터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다. 날마다 말씀을 붙잡고 수십 년을 걸어왔던 사람이었다. 청년의 때부터 이런 내공을 쌓아서 결정적인 순간을 대비해야 한다.
수 15:14 갈렙이 거기서 아낙의 소생 그 세 아들 곧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고
갈렙은 한 번의 전쟁으로 아낙 자손을 말 그대로 쓸어버렸다. 다른 이스라엘 민족들은 훨씬 약한 적들을 상대하면서도 지지부진하면서 완전히 승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갈렙은 가장 무섭고 강한 적을 깨끗하게 몰아냈다. 우리에게 영적인 실력이 있으면 어려운 적도 쉽게 몰아내는 것이다. 갈렙의 승리는 완전했다. 그가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따랐다는 구절이 오늘 본문에 나온다. 영어성경에서는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따랐다고 표현되어있다. 9절에 보면 청년 갈렙의 온전한 순종을 지도자 모세가 인정해주는 구절이 나온다. 민수기 14장 2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도 갈렙의 온전한 순종을 인정하셨다. 먼 거리에서 적당히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전심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드물다. 갈렙은 정말 드문사람이었던 것이다.
전심으로 따른다는 것은 온 마음이 흠뻑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적셔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불같은 순종은 불같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거나 요리하거나 할 때 꾀부리지 않고 전력을 다하는 것처럼 말이다. 갈렙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니까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한눈팔지 않는 것이다. 진짜 사랑하면 초지일관하게 된다. 모든 영역에서 그는 항상 하나님의 리더십을 따라갔던 사람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움직였다는 말이다.
12절에 보면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헤브론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하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헤브론 산지는 지금 아낙 자손들이 가지고 있지 여호수아가 가지고 있는 땅이 아니었다. 갈렙이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판국에 여호수아에게 허락을 구한 것이다. 그의 영적인 축복이 필요했던 것이다. 왜? 하나님이 세우신 영적인 권위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주신 비전은 하나님께서 공동체를 통해 확인시켜 주신다. 축복해 주신다. 그래서 총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해 갈렙의 전쟁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가 그 일에 흐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역의 영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갈렙이라도 이 일을 해낼 수 없다. 그래서 갈렙이 겸손하게 친구지만 영적 지도자였던 여호수아의 축복을 구한 것이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갈렙'의 히브리 뜻은 '충성스럽고 빠르게 주인의 마음을 잃어서 지혜롭게 철저히 순종한다'라는 뜻이다. 갈렙의 인생이 딱 그의 이름과 같았다.
수 14:15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전쟁이 그치게 하는 사람은 예수의 영광이 있는 사람이다. 우리의 가정과 마음, 모든 관계 가운데 전쟁이 그치게 되기를 바란다.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 자손에게도 그 평안이 흘러가게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날엔 많은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려고 애쓰는 부모들이 많다. 그러나 90%의 검증된 확률로 되물려진 재물은 한세대 안에 다 탕진된다. 오늘 본문의 갈렙처럼 믿음과 도전정신을 물려주어야 한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뤄가시도록 격려해야 한다. 갈렙은 후에 정복한 땅들을 레위인들에게 다 나눠주고 도피성으로 제공하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은 갈렙인 것 같지만 후에 그의 지파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축복하시는지 모른다.
유다 지파에서 다윗왕이 나오고 그의 왕국이 시작되는 거점도시가 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신다. 헤브론을 공략하는 자, 아브라함의 후계자가 될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갈렙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축복하셔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 지파에서 나온 것이다. 원래 갈렙은 출신이 비천했다. 그는 이스라엘 출신이 아니라 그니스 사람 출신이다. 에서가 그의 조상인 것이다. 이방인이었다. 애굽에서 히브리 사람들과 섞여서 노예생활하고 있다가 출애굽 할 때 같이 섞여 나왔는데 갈렙이 살던 지역에 살던 히브리 노예들이 유다 지파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가 유다 지파의 일원이 된 것이지 갈렙의 유전자는 순수 유다 지파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갈렙 당대에는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의 에브라임 지파에게 모든 조명이 다 비치던 시대였다. 조연 같았던 그의 삶과 지파가 주인공으로 상승했던 임계점은 헤브론이었다. 갈렙이 헤브론을 선택했던 그 순간 그와 가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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