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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therine Aug 16. 2020

아론의 축도

민수기 6장 22-27 한홍 목사님


'내려놓음'이 뭘까 항상 생각한다. 내 겉옷을 빼앗는 강도에게 속옷까지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은 뭘까 항상 고민한다. 내려놓음이 나를 잃어간다는 뜻은 아닐까 너무 궁금했다. 이 길이 맞는 건지 순간순간 사무치게 고민했다. 특히나 사람 관계에서.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때마다 비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여러 번 선택의 기로에서 주춤거렸다. 최소 만 번이상 주춤거렸을 것이다. 다이빙대 위에서 뛰어들지 못하고 발만 동동. 응원하던 사람들 다 돌아가고 이런 나를 지켜보는 분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세 분 뿐이었다. 온전히 그리고 완전하게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주님안에서 내가 영원히 안전할 것이라는 본능적인 내어맡김, 무방비 상태로 함께 있어도 내 존재가 어떠한 종류의 상처 하나 없이 영원히 안전할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없었던 것 같다. 이제야 알겠다. 망설이고 망설이며 여러 번 두들겨 본 후에도 못 하면 어떡하나 자신없었던 내가, 최소한 내려놓는것이 맞다고 결정하기까지 당사자도 몰랐던 존재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알고계셨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시작이 반이 되도록 하실 수 있기에 기다리셨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망설이며 준비했다. 달팽이가 보드란 나뭇잎처럼, 껄끄러운 돌바닥도 매끄럽게 기어가듯이 그렇게. 요즘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이 '믿는다'는 한 단어면 충분한 것 같다.


요한복음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게 되면 아주 뜨거운 감동을 받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헌신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훨씬 더 애틋하고 크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이다. 혹 신앙생활을 해나갈수록 그런 하나님께 뭔가 더 해 드려야 한다는 중압감에 사로잡힌다면 그건 옳지 않다. 흰 백발의 나이 지긋한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에 앉아계시다가, 우리가 조금만 잘못하면 '쯧쯧, 넌 좀 더 잘할 수 있는데' 하시며 야단치기로 작정하고 계신 분 같다면, 틀렸다.


하나님은 참으로 사랑이 많으신 분이다. 우리가 이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심판이 아니라 축복이다. 그 마음이 너무나 잘 표현된 것이 오늘의 본문이다.



민 6: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하나님께서 축복의 메시지를 모세와 아론을 통해 전달하셨다. 모세는 왕과 다름없었고 아론은 백성의 대표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두 최고 지도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백성들을 축복하신 것이다. 직접 하지 않으시고 영적 지도자들을 통해 축복을 훌려보내신 것이다. 왜? 이 질문 자체는 오류가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고 싶으시기 때문이다.


요즘은, 모든 권위가 땅에 떨어진 안타까운 상황을 많이 보게 되는데, 그 이유는 잘못 쥐어진 권위를 막 휘두른 경험과 그에 따른 상처들 때문에 그렇다. 그렇지만 상처 때문에 권위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모세와 아론 또한 부족한 점들이 많은 자들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셨다. 마찬가지다. 영적 지도자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흘러온다.


하나님의 권위는, 백성들을 군기 잡고 그들 위에 군림하여 야단치고, 명령하고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백성들을 축복하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자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권위자라면, 그 사람 옆에 가기만 해도 하나님의 축복된 임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과 대화하기만 해도 힘이 나고 눈빛만 봐도 다시 살맛이 나고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목회자와 장로가 바로 이런 영적 지도자다. 부모는 가정의 영적 지도자이고, 모임의 리더는 그 모임의 영적 지도자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축복을 내 옆 사람에게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존재만으로도 축복의 통로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모세는 왕으로써 아론은 대 제사장으로써 백성들을 축복했다. 지금은 모세도 아론도 없지만, 예수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 주님은 우리의 왕이시며 영원한 대 제사장이시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다. 예수님과 교제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에너지가 우리를 다시 채울 것이며 그분의 축복이 우리 삶으로 흘러들어 올 것이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인생은 가뭄 속에서도 축복의 강물이 끊기지 않는 인생이다. 예수님을 떠나면 축복도 중단된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의 손을 놓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마음대로 살고 싶어도 주님과 함께 동행해야 한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축복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영어 성경에 보면 'This is how you are to bless the Israelites.'라고 나온다. 즉, 어떻게 축복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코칭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축복'하면 너무 좋아한다. 뭔진 상관없이 '복'을 바란다. 그런데 무조건 좋고 화려하다고 축복이 아니다. 인간적인 방법과 욕심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따를 때 그것이 받는 자에게도, 통로가 된 자에게도 축복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우리가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복이 아닌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가 유행했던 시대만 봐도 알 수 있다. 큰 재력을 관리할 능력과 마음자세가 되지 않은 자에게 갑자기 재물이 모이고 쌓이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그 사람의 삶을 망쳐놓지 않았던가.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지 않는가. 부모의 서포트를 받아 실력보다 높은 해외 명문대에 입학했다가 열등감만 커지고 인격적으로 상처만 난 채 돌아오는 학생들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까, 축복은 때에 맞게, 사람에 맞게, 형편에 맞게 하나님의 지혜대로 흘러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자신을 위해 축복할 때 마음대로 기도한다고 대수가 아니다. 깊이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축복의 결을 인지할 수가 없다. 대패질도 나무 결을 따라 밀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코칭은 필수요건이다.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또한 이 축복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24절에서 나오는 '네게'는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가시는 그분의 백성들을 향한 말씀이셨다. 일반 은총이 있다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특별 은총'도 있는 것이다. 어린양의 보혈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허락된 축복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혈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확신한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복이 항상 예비되어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우리를 다루실 때는 일반 사람들을 다루실 때랑 다르다.


우리에게 축복을 주실 아버지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빽 없다고 서러워할 필요 없다. 가장 확실한 빽이 우리를 든든히 지키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축복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다.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잠깐 힘들다고 해서, 지금 잠깐 사업이 어렵다고 해서 지금 잠깐 시험에 떨어지고 배신당했다고 해서 세상 다 끝난 것처럼 기 죽고 상처 받은 상태 그대로 있으면 안 된다. 어깨 쫙 피고 다시 일어나 하늘의 전능자를 바라보고 힘차게 앞으로 다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였다. 우리가 나만 복 많이 받았다고 자기도취에 빠지면 안 되는 이유이다. 내 옆의 형제들과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크고 풍성하기 때문에 우리가 다 나눠 쓰고도 남음이 있다. 세상에서는 남의 것을 뺐어야 내가 잘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계산법은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 집 자녀뿐만 아니면 남의 집 자녀들을 위해서도 중보하고 기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아들과 딸이 있다면 최소 그들의 신랑 신부가 될 다른 두 명을 위해서도 같은 마음으로 중보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 교회만 잘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나라에 선한 영향력을 주는 선한 교회들이 일어나기를 함께 기도해야 한다.


24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복을 줄 것이라고 선포하셨다. 하나님은 한 번도 빈말을 하신 적이 없다. 말씀하셨으니 이루어질 것이다. 복 받고 싶은 우리 마음보다 복 주고 싶은 하나님의 마음이 더 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가지신 모든 것을 총 동원해서 주실 것이다. 필요하다면 말이다. 이미 단 하나뿐인 독생자 예수님을 주신 분이시다. 필요하다면 그분은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보다 더 완벽하게 우리의 필요를 채우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갈길에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해 놓으셨다.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것은 우리의 불순종과 믿음의 부족 밖에 없다. 결코 하나님의 인색함 때문이 아니다. 담대하게 그 축복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축복의 레벨은 돈, 명예, 자식의 번성, 순조로운 사업 이 정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24절에서 말씀하시는 축복은, 물론 그런 것들도 포함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한 총체적인 은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의 축복까지 다 포함한 것이다. 영적인 부분이 받쳐주지 않는 그저 눈에 보이는 축복들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과도 같다. 금방 무너질 것이다. 삶의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지혜의 축복,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관계의 축복, 악한 사람들을 피할 수 있는 분별의 축복, 시시각각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명철의 축복, 말씀을 깊이 깨달을 수 있는 영성의 축복들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우리가 다 예측할 수도 없는 완전한 축복인 것이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준비가 안된 사람에게 눈에 보이는 큰 축복이 임하면 그것은 재앙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훗날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7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 땅을 조금씩 조금씩 차지하게 하셨다. 한꺼번에 확 주지 않으셨다. 경영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토지를 주면 그 땅이 황무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큰 축복을 맡겨버리면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져 버린다는 것을 그분은 정확하게 이해하고 계신다. 그래서 그것을 조율해서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때는 믿음과 함께 인내가 필요하다.


따라서 주님은 내게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잠깐 고난과 시련을 허락하신다. 광야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의 전 단계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그런 의미에서 고난도 포장된 축복이라 볼 수 있다. 시험을 한번 떨어졌다가 통과한 사람은 다르다. 사업을 한번 망해봤다가 일어난 사람은 다르다. 이 고난의 시기를 지나온 사람은 깊이가 있고 성숙이 있다. 지혜가 있고 겸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의 광야를 지나고 있을지라도 그 기간조차 우리에게 포장된 축복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럴 때일수록 스스로를 향해 선포해야 한다. '나는 지금 넘치도록 큰 축복을 받고 있다!' '축복의 수위를 조절해서 받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항상 우리의 기대를 초월한다.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깜짝 서프라이즈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꿈이 더 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과 불신앙을 혼동하며 안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시대의 다니엘로, 느헤미야로 쓰시고자 꿈꾸시는데 우리가 스스로를 향해, '내 앞가림이나 잘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처음엔 그랬었다. 그저 한 명의 아이만을 바랬을 뿐이었다. 근데 하나님은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을 거라고 하셨다. 그가 열방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 하셨다.


예레미야 말씀에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던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여줄 것이다' 우리가 기도한 만큼만 보여주신다고 하셨는가? 아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기도할 생각조차 못하던 차원의,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기도는 우리가 알지 못하던 축복을 열게 하는 축복의 열쇠이다. 우리는 기대해야 한다.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지키시기 원하신다. 히브리 원어에서 '지킨다'는 단어는 철저하게 주의를 기울여서 아주 신중하게 보호한다는 말을 의미한다. 어떤 장소에 대통령이 방문한다고 하면 2,3주 전부터 어떤 일이 행해지는가? 모든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피며 폭탄의 여부, 외부사람의 침투 가능성이 될만한 동선들, 그날 대통령과 함께 그곳에 있을 모든 사람들의 신분을 두 번 세 번 체크하고 당일날도 철저한 통제 아래 행사가 진행된다.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경호대 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주의를 우리에게 기울이고 계신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빈 구석까지, 우리가 놓친 그 부분까지 하나님은 지키실 것이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우리를 헤치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서운 적들과 대치했던 경험이 여러 번 있다. 무기도 훨씬 발전되었고 수도 훨씬 많은 그런 적들을 상대해야 했던 순간이 많았는데 그 모든 교활한 순간들을 지나 기적처럼 그들은 살아서 약속의 땅에 안전하게 들어갔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덕분이었다.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이 보호하심의 축복이다.


빈털터리로 에서의 칼날을 피해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던 야곱에게 하나님이 어떤 약속을 주셨었는지 생각해보라.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우리가 어디를 가냐 안 가느냐 보다, 어떤 일을 하느냐 마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느냐 안 하시느냐이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주님의 빛이 나와 함께 하시면 안전하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위험수위가 높아져만 간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돈으로도, 기술로도 완벽하게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인터넷 보안과 테러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자하는 돈이 어마어마하지만 그래도 테러는 자행되고 해킹은 빈번히 잘만 일어난다. 인간은 우리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 위험한 곳에 가지 않는다고 안전해지는 게 아니라서 그렇다. 진정한 '안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지키시느냐'이다.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다. 그분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공격받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계신다. 주기도문에도 나오듯 하나님은 우리를 '악한자'로부터 구원하길 원하신다. 우리에게 항상 그것을 기도하라고 알려주신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지막으로 하셨던 기도도 마찬가지다. '저들을 악한 자들로부터 보호해 주시옵소서.' 그 주님의 기도가 지금도 우리를 지키고 계심을 믿는가? 우리가 기도 많이 해서 우리가 잘나서 마귀를 이기는 것이 아니다. 보혈의 보호막이 우리를 끝날까지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잠들어도 하나님은 24시간 우리를 지켜 보호하시기 때문에 마귀가 성난 사자처럼 영혼을 찾아 헤매어도 우리에게 치명타를 못 가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는 길에 천로역정과 같이 수많은 영적 공격이 가해질 테지만 그때마다 내가 뭘 실수한 것 아닌가 고민할 필요 없다. 하나님 잘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엄청난 영적 포텐셜을 가진,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악한 자들이 공격해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담대해야 한다. 위축되지 않아도 된다.


마귀는 더러운 중상모략과 교활하고 급 낮은 거짓과 위선으로 우리를 괴롭게 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몸에 묻는 진흙을 다시 던지려 하지 말고 주님의 은혜의 빛 앞으로 나와 몸을 말리고 쉬면 된다. 그리고 그 더러운 것들을 말끔하게 툭툭 털어버리면 그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다. 간신히 지켜주시는 것이 아니다.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듯, 공격당하기 전에 적의 심장부를 공격해 주실 것이다. 말씀과 성령으로 기도로 능히 이기게 해 주신다. 교회는 살아남는 게 목적이 아니라 부흥이 목적이다.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를 원어 그대로 풀면, 'He will smile at you'이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향해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으실 것이라는 것이다. 걸음마를 막 뗀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미소처럼, 120% 이상 만족한 넉넉한 미소로 우리를 바라보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세상은 우리를 비꼬아 보고 차별하지만 하나님은 만족과 기쁨으로 우리를 바라봐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 부른다. 은혜는 사람의 선행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다. 돈이라고 다 돈이 아니다. 사람이 주는 돈과 하나님이 주시는 돈은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지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말 세게 하는 사람들 겁나서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왜 조폭들이 욕을 잘하고 몰려다니는가? 겁나서 그런 것이다. 두려움이 계속 증폭돼서 그러는 것이다. 사람들도 그렇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있다. 다들 남보다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두려움에 눌려있다. 다 잘살고 있는 척하고 있지만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잡아 주셔야 한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한다. 하나님이 살려 주셔야 한다.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셔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두려움을 떠나게 한다. 절망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기쁨과 소망이 밀물처럼 채워진다. 그러므로 삶에서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한눈팔지 말고 은혜의 강가로 나와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루 기도하지 않으면 그날 하루에 예비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큐티하는 시간은 우리의 희생이 아니다. 받은 복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준비되는 시간이고, 풍성한 하루를 지내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다. 다니엘은 이 것을 알고, 하루 한 번이 아닌 세 번 주님의 은혜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받을 자격이 없는데 너무 잘해주시는 것, 나보다 선한 사람이 많은데 나를 선택하셔서 여기까지 이끌고 와주신 것, 바로 이 거룩한 불공평함이 내가 받은 은혜이다. 사랑받을 조건이 안되는데 사랑해주신 것, 그것이 은혜이다. 내가 노력한 것 이상, 내가 경영한 것 이상의 열매를 누리고 있다면 감사해야 한다. 흘려보내야 한다.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 더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내가 이 모든 것을 누리고 있지? 물어야 한다.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확실한 은혜이다. 하버드 대학교 1학년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학교 전산실에서 오류로 합격이 아닌데 합격통보가 되었다는 전화를 받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럴 때가 분명 있다. 내가 이 정도 수준이 안되는데, 내 정체가 탄로 나면 어떡하나 의심이 들 정도로 분에 넘치는 은혜를 받았을 때. 그 복을 순전히 은혜로 알 때 오만하지 않은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은혜는 당연히 받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받는 것이다.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5절에서 나왔던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의 의미는 미소를 띠고 바라보신다는 의미였다. 26절의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는 전 구절보다 조금 더 강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특별한 관심, 애착을 가지고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로 육군사관학교를 들 수 있다. 졸업반 생도들을 볼 때 수십 년간 그들을 배출해내고 양육한 교관들은 학생들을 바라만 봐도 누가 대령까지 갈지, 누가 몇 년 하다 예편할 학생인지 대충 보인다는데 거의 90% 정확하다는 것이다. 수십 년간 생도들과 장교, 장군들을 봐온 리더들이 선택한 장군감 재목들은 졸업 후 나라에서 관리하는 것 자체가 달라진다고 한다. 다양한 경험을 시키기 위해 강한 부대에 보내기도 하고 통솔력을 키우기 위해 허술한 부대에 보내기도 하는데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육사 시절 성적이 좋았는데도 왜 이런 역경이 있는지 본인도 영문을 모를 때가 있다고 한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비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서 나를,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관리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걸작품이자 장군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타락하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관리하신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기도하고 내 앞길을 정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챙기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내 삶과 가정의 문제를 걱정하고 기도하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께서 먼저 걱정하시고 챙기시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돈문제로 고민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고민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분과 항상 교제하며 동행하는 사람들은 기가 막히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시는 그분의 앞선 챙김을 느끼며 살아간다.


깊이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위로가 필요할 때면 연락이 잘 안 오던 사람이 갑자기 전화해서 기도해주겠다고 할 때도 있다. 나에게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전혀 뜻밖의 사람들, 환경들을 통해서 답을 주시기도 한다. 내가 당장 먹을 양식이 필요할 때 전혀 뜻밖의 까마귀가 와서 오늘의 양식을 주기도 한다. 어떤 분이 내 뒤에서 나를 관리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매일매일 디테일한 부분을 신경 써주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감격하고 감동하게 된다.


시편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하나님이 이렇게 특별하게 자기를 관리하고 있으시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마음에 안정감이 온다. 주의 평강이 가득한 것이다. 자기가 자기 인생을 계속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삶은 전쟁이다. 평강이 없다, 마귀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진 평강을 빼앗으려 한다. 온갖 불신과 불만을 계속 속삭여서 두렵게 만든다.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누리기 위하여 날마다 몸부림치며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기도의 자리로 예배의 자리로 타협하지 말고 나아가서 마귀의 염려 바이러스를 죽여야 하는 것이다. 기도가 살아나야 한다.


빌립보서 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에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은 공수표를 쓰신 것이 아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 안에 거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축복 안에 있다. 어떤 힘든 상황일지라도 우리의 선포와 믿음의 고백은 그래서 중요하다. 다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지금 축복 가운데 서 있음을 믿는 고백이 참 중요하다. 이것은 맹목적이고 근본 없는 고백이 아니기에 그렇다.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체험한 믿음에서, 그 말씀을 토대로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적 리더라면, 언어가 굉장히 중요함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가정에서 사업장에서, 항상 축복의 말을 선포하고 흘려보내고, 격려해야 한다. 덮어놓고 격려한다고 버릇 나빠질까 걱정할 필요 없다. 전혀 없다. 버릇이 나빠질 정도로 누군가를 향해 축복을 선포해 본 적도 없을뿐더러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속성이 그렇게 되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으로 축복해야 한다. 기도로 축복해야 한다. 단점보다 강점을, 장점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계속 축복의 강물을 흘려보내야 한다. 당장 오늘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럴 때 진정한 권위, 리더십이 생길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이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모세와 아론의 입을 빌려 축복했지만 그들은 축복의 근원이 아니었다. 그들은 축복의 배달부, 통로였을 뿐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의 통로로 부르셨지, 축복의 생산자로 부르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에게 이 관점은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는 자꾸 사람들을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사니까, 부모니까, 자녀니까, 사장이니까, 팀장이니까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자리에서 축복을 생산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래서 자꾸만 하나님이 부르신 사명의 자리에서 도망가게 되는 것이다.


오병이어 기적 때 제자들이 그랬다. 밤은 저물어 가고 그들을 따라온 자들만 오천명이 넘어가니까 제자들은 달려왔다. 다 흩어 보내라고 했다. 자기들이 그들을 먹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속으로 '그럴 줄 알았어, 또 우리가 먹여야 하나보다!' 하고 고민했고 그 압박감은 '우리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습니다'라는 말속에서 잘 드러났다. 우리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어떻게 할지를 알고 계셨다고 했다. 축도하셨고 오병이어를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축복을 나눠주라고 하셨지 축복을 만들라고 한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할 때 부담감을 집어 던져 버려도 된다. 책임져야 할 일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부르셨지, 축복의 책임자로 부르지 않으셨다. 사명으로부터 도망가지 마라. 그 어떤 엄청난 하나님의 일도 우리가 책임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축복을 제공해 주실 것이다. 그저 믿음으로 흘려보내기만 하면 된다. 그렇기에 모세와 아론도 신나게 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대하면 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모든 축복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그 어떠한 복 보다도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사랑하길 바란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소홀히 하지 말고 그분을 모든 결정 과정에 초대함으로 하나님을 항상 내 마음 안에 가득 채워두길 바란다. 그럼으로써 어떤 일을 만나든 어떤 때를 지나고 있든 그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이 우리 삶에 가득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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