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therine Oct 20. 2020

포도나무(The Vine)

요 15:1-16 한홍 목사님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오늘은 포도나무의 의미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포도나무'는 예수님의 이름이라기보다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비유적으로 설명해주실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 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는 도중 말씀해주신 것으로 가장 유명한 비유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세상에 남아 복음을 전할 제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말씀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많은 포도나무가 있지만 예수님께서만이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대와 달리 열매 맺지 못하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과는 달리 열매 맺는 새로운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농부, 예수님은 포도나무, 우리는 가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에 야베스의 기도를 썼던 브루스 윌킨슨 박사가 이 본문을 가지고 포도나무의 비밀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오늘의 메시지에 담긴 핵심적인 내용들은 이 박사의 책에서 빚진 것이 많습니다.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오늘 본문에서 핵심적으로 반복되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포도나무의 존재 의미는 열매 맺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관상용 나무가 아닙니다. 나무라기보다는 넝쿨에 가까워 볼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향나무처럼 향이 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땔감으로 쓰기에도 부족한 나무입니다. 그렇다고 썩혀서 거름으로 쓸 수 있는 나무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의 유일한 존재 의미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2절에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신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열매를 맺는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매란 무엇입니까?


성경학자들은 내적인 열매와 외적인 열매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내적인 열매는 우리 성품의 변화를 얘기합니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인격입니다. 예수님 닮은 인격으로 닮아가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사람들의 스펙을 봅니다. 재력, 학벌, 외모 등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의 속 사람입니다. 내 속 사람이 얼마나 예수님 닮은 인격으로 변화해 가고 있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사역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하지만 인격의 열매가 없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방언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학교에서 시험 볼 때 커닝을 한다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외적인 열매는 우리를 통해서 변한 하나님의 사람들, 선한 영향력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서 예수 믿게 된 사람들, 또 예수님을 믿지만 차갑게 식어 있다가 우리의 멘토링을 통해서 믿음이 다시 뜨겁게 살아난 사람들이 바로 외적인 열매들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돌아오게 한 사람은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날 것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사람을 예수 이름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축복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외적인 열매는 우리가 하는 사역이기도 합니다. 은혜로 주일 성경교사로 섬기고, 헌금을 드리고, 주차 요원을 하는 등, 우리가 가진 재물과 시간을 들여서 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외적인 열매들인 것입니다. 이 사역들이 교회 담장 안에서 맺은 열매들이라면, 우리가 직장에서 선한 마음을 가지고 행하는 일들, 그리고 선한 마음으로 섬기는 교회 밖의 사람들은 교회 담장 넘어에서 맺은 열매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코로나 상황 동안 혹독한 상황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해 묵묵히 봉사한 의사, 간호사, 보건관계자들 중에 크리스천들이 많습니다. 모두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들 입니다. 우리의 마음씨를 보고 사람들이 '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저렇게 다르구나!' 하며 무릎을 탁 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가 맺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면 내적인 열매와 외적인 열매들을 계속적으로 맺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열매들을 맺지 못하는 가지들을 향한 말씀 또한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한다.


2a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얼핏 보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을 다시 빼앗으시고 하늘나라에서 제외시켜 버리시고 다신 보지 않으시는 뉘앙스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구원과는 상관없이, '무릇 내게 붙어 있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칭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번 구원받은 성도는 그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 즉 정확한 구절의 내용은, 하나님을 믿지만 한동안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열매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말인 것이다.


한국어 성경의 '제거해 버린다', 영어 성경의  'Cut off'라고 번역되어있는 부분의 헬라어는 '가지고 가버리다', '집어 올린다'의 의미이다. 바닥에 넝쿨처럼 자란 가지를 짚어 올리기 위해 농부가 허리를 궆히는 장면을 상상하면 된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포도나무의 특징은 밑줄기에서 자란 가느다란 여러 줄기들이 땅바닥을 기어 올라가면서 자란다는 것인데 그 속도가 굉장하여 1년에 2m-4m가량씩 자라난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지나치게 약해서 열매를 감당하지 못하니 보통은 막대기에 묶어 놓는데 전통적인 방식은 그 가지들을 먼저 땅바닥에 그대로 두어 자라나 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뜨거운 팔레스타인 지방의 태양빛으로부터 밤사이 흡수한 이슬을 조금 더 오래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땅바닥에 둔 가지들에 먼지와 진흙이 묻어 곰팡이가 생기거나 굳은 진흙 때문에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한 가지들이 생기는 것이다. 이때 농부들은 물동이를 가지고 다니면서 그 가지들을 '집어 올려' 깨끗하게 씻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 가지들에서도 열매가 맺힌다는 것이다.


우리를 보호하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열매 맺지 못하는 우리를 그냥 두시는 것이 아니라 들어 올려서 깨끗하게 닦아주시고 열매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죄'는 가지에 붙는 먼지와 곰파이와도 같다. 공기와 빛을 차단하기 때문에 가지인 우리를 시들게 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고 죄에 빠진 성도들의 삶이 그렇다. 그러니까 죄는 영적으로 우리를 무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가지를 들어 올려 깨끗하게 하시는 것, 우리는 그것을 '징계, Discipline'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1차적으로 말씀과 주변 지인들,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주신다. 다윗에게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윗이었지만 그가 불륜을 저지르고 우리야를 죽게 만들었을 때 아무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 그 죄를 꾸짖으셨었다. 다윗은 영적으로 깨어있었기 때문에 즉시 회개했지만 그럼에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는 징계의 강도를 높여가신다. 그때는 채찍질이다. 인생에 무슨 일이 생겨가는 것이다. 갑자기 믿었던 사람들이 배신을 하고, 말도 안 되는 부도가 나고, 실패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들이 다 징계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1차적으로 주시는 징계로 우리를 돌이킬 수 없을 때 더 강력한 외부 상황이라도 허락하셔서 우리로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다. 수많은 선지자들의 경고를 듣지 않았던 그들에게 하나님은 전염병과 흉년을 보내셨고 결국 왜세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게 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징계를 받고도 깨닫지 못했던 까닭이다. 


하나님은 작은 그릇, 못난 그릇은 사용하 실수 있다. 그러나 더러운 그릇은 사용하실 수 없다. 징계는 하나님께서 이처럼 참을 수 없는 더러운 죄를 제거하는 과정이다. 중요한 것은 징계는 죄를 죽이는 과정이지 죄인을 죽이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징계의 시간 속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우리 삶의 무너지고 허물어진 부분에서 다시금 승리와 회복을 경험하기 위해서 징계는 꼭 필요하다, 죄를 씻는것은 꼭 필요한 과정이다.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간 일족을 죽인 후에야 다시 승리할 수 있었다. 징계의 목적이 승리까지 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만을 징계하신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죄를 지어도 왜 나만 가지고 그러냐, 억울해 보일 때가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똑같이 사기 쳐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걸린다. 똑같이 나쁜 짓 해도 예수 믿는 사람은 반드시 잡힌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꾸 세상 사람들과 나를 비교해서는 안된다. 


신 8: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 딸로 보시는 것이다. 그러니 징계받을때 시험 들면 안 된다. 자녀가 잘못해서 회초리를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을 겪어본 부모라면 알 것이다. 맞는 자녀보다 때리는 부모 마음이 더 아프다는 것을. 그 마음을 알아야 우리가 징계받을 때 하나님에게 분노하거나 섭섭해하지 않을 수 있다. 징계는 파괴적인 삶의 습관을 가진 사람이 재앙으로 달려가기 전에 그를 주저앉히는 것이라 비유할 수 있다. 헨리 커빌 목사님의 저서에 보면 그가 목사로써 처음으로 집도했던 장례식 이야기가 나온다. 그 장례식의 대상은 안타깝게도 10살도 안된 소녀였다. 한 번은 목사님께서 그 집에 심방을 가신적이 있는데 활달한 성격의 그 소녀가 얼마나 에너지가 넘치는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 소녀가 차가 달리는 찻길로도 갑작스럽게 튀어나가고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부모는 그런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기만 할 뿐 제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 어린 소녀는 어느 날 한순간에 달려오는 차에 치어 즉사했다고 한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부모는 매를 들어서라도 그 소녀의 위험한 습관을 꺾어 놓았어야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것이 더 그 소녀를 사랑하는 길이었다고 확신하지 않는가? 그렇게 하지 않았던 부모가 치른 대가는 혹독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그렇게 다루지 않으신다. 재앙이 오기 전에 잘못된 길에서의 첫 번째 스텝부터 하나님께서 반드시 다루신다. 


하나님의 징계는 정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징계의 시간과 강도는 우리가 얼마나 빨리 회개하는가에 달려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불필요하게 1분이라도 더 고통받지 않길 원하신다. 빨리 징계의 목적을 이해하고 죄를 버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래서 절제된 징계이다. 사실 우리는 한 열 대를 맞아도 똑같은 죄를 다시 범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두대에서 끝내시는 것이다. 이 땅의 불완전한 아버지들이 자기감정을 못 이기고 우발적으로 저지르는 징계와는 차원이 다르다. 


히 12: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2b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은 깨끗하게 하시는 작업을 하셨다면, 열매를 조금 맺고 있는 가지들에게 하시는 작업도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열매를 맺지 못한 가지들에게는 Pruning, 즉 가지치기를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적은 열매에 그 정도면 됐다고 하시지 않는다.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욕심이 아니라 비전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다. 열 달란트 준 사람에게 하나님은 열 달란트의 열매를 기대하신다. 만약 그러지 못하고 있다면 가지치기를 하시는 것이다.


원예 전문가들에 의하면 포도나무는 항상 무성하게 자라려고 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상당량의 가지를 쳐주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넝쿨이 빽빽해져서 햇빛이 잘 들지도 못하고 영양분이 분산되는 통에 과실이 자잘하게 맺힌다는 것이다. 가지치기를 하지 않아 무성한 포도나무는 멀리서 볼 때 아름다울 순 있어도 가까이서 보면 빈약한 실속 없는 나무가 되고 만다. 그야말로 유명무실한 것이다. 빛 좋은 개살구 같은 나무인 것이다. 따라서 농부들은 과실없이 자기 과시만 하고 있는 나무의 가지를 과감하게 제거해 버려 영양분이 집중되게 한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심플하게 가지치기하신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죄는 아닌데 너무나 많은 괜찮은 것들, 부수적이 것들을 많이 하고 있다. 시간과 재능이 사방으로 분산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하나님의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때는 100%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것은 마치 손흥민 선수가 시합을 앞두고 홍보대사를 하고 사진 촬영 등을 통해 기부를 하는 여러 좋은 스케줄들을 많이 소화하느라 정작 시합 땐 자기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핵심 사명에 집중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지치기와 징계는 그 목적과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징계는 죄 때문에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성도에게 허락하시는 상황이다. 그래서 징계를 받고 있는 중이라면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가지치기는 이미 열매를 맺고 있지만 이것저것 다 잘하려고 하다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집중적인 열매를 맺지 못할 때 가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때는 자아를 부수어야 한다. 내가 모든 것을 잘하여 나를 과시하고 싶을 때 나를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꽉 잡고 이것저것 하려고 하던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맡겨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싹 정리해주신다. 그리고 내게 다시 되돌려 주신다. 가지치기는 그래서 징계만큼이나 아프다. 죄는 아닌데 내게 정든 것, 익숙한 것, 괜찮은 것들을 너무나 많이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지치기와 징계에 대한 구분을 잘하여 그 기간에 낙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낙담하면 죄를 짓고 그렇게 되면 가지치기를 하다가 다시 징계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며 우리 삶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시는 죄가 있는지 묻고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또한 물어야 한다. 우리 삶에 하나님께서 내려놓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가지치기는 우리의 여정 가운데 평생 계속된다. 집사님일 때 요구하시는 가지치기보다 장로님이 돼서, 목사님이 돼서 받는 가지치기의 강도가 훨씬 세다. 포도나무가 그렇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농부가 가지치기를 더 강도 높게 한다고 한다. 매년 포도나무가 열매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점점 더 좋아지는데 가지치기를 소홀히 하면 가지가 약해져서 열매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숙한 가지들이 가장 세게 가지치기를 당하는 이유는 그만큼 이것저것 하는 게 많아서 그렇다.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가지치기를 하실 때, 초기 과정에서는 우리의 바쁘고 혼잡한 스케줄과 삶의 면면들을 건드리신다. 그러나 가지치기 고급단계로 갈수록 우리의 가치관을 쳐내기 시작하신다. '너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 입으로는 주님이 가장 중요하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실은 그 이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게 있다면 주님이 바로 그곳을 쳐내버리시는 것이다. 마치 설명을 잘하지 못하는 아픈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을 때 의사가 이곳저곳을 눌러보며 진단해주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의 가치관 이것저것들을 검사하시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정체성을 건드리신다. '너는 누구냐?' 야곱은 평생을 남을 속이는 자로 살았지만 주님이 계속적으로 가지치기를 하시자 결국은 이스라엘이 되었다. 


이렇게 우리의 온 가치관과 정체성을 다시 개조해나가는 것, 성경에서는 이 과정을 믿음의 시련이라고 한다. 죄가 아니다. 믿음의 영웅들, 요셉, 야곱과 같은 사람에게도 행해지는 괜찮은 하나님의 사람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심플하게 불같은 연단의 과정인 것이다. 


가지치기의 영역들은 정말 파워풀하다. 우리 삶에 아픔이 느껴지는 곳이 있다면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너 이제부터 여기 주목해, 내가 이제부터 너를 위해 이 아픈 부위를 가지치기해나갈 거야. 작업하는 동안 내 안에 거해야 돼. 아플 거야.' 가지치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누르시는 곳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가 가장 정들어있는 어떤 것이다. 아픈 곳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큰 고통이 생기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딱 정곡을 누르신다. 그곳만은 안된다며 집착하게 되는 바로 그 부분이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작업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거 없이는 못 산다고 하는 그 고백이 없어질 때까지. 유일하신 공급자이신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평안을 누릴 때까지 계속하신다. 그래서 가지치기가 힘든 것이다. 


욥은 재물과 자녀, 가진 것이 많음에도 모든 면에서 의인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가진 것을 모두 잃고 난 후 그는 비로소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전에는 귀로 들었지만 가진 돈과 자녀들을 모두 잃고 난 후에 그는 이제 비로소 주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재산을 두배로 다 회복시켜 주셨다. 


돈뿐 아니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 자존심의 상징이다. 이게 무너져야 한다. 왜 우리가 무리해서 수입보다 더 나가는 외제차를 사고, 수입보다 더한 집에 이사를 가고, 아이들을 내몰아서 좋은 대학에 가게 하는가? 이게 내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약할수록 이 심리는 더 세게 작용한다. 기드온을 보라. 집안도 미천하고 굉장히 겁이 많은 사람이었던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로 세우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강한 용사라고 하셨는데 자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군사를 모집했을 때 삼만이천 명이 모여서 그 군력에 자신을 숨기려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중 삼만 천칠백 명을 돌려보내고 오직 삼백 명 만을 남기셨다. 기드온은 절망했다. 삼백 명으로 십만 명이 넘는 미디안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겁을 냈다. 그러나 그의 자존심이 무너지자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던 정말 강한 용사가 될 수 있었다. 


가지치기를 가장 무섭게 당하는 곳이 어디인지 아는가?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사람 내려놓는 것만큼 어려운 것 없다. 아브라함에게 조카 롯을 내려놓는 것은 그의 오른팔과 같은 존재를 떼어놓아야 하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야곱? 하나님은 늙은 야곱에게 베냐민을 내려놓게 하셨다.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총리대신의 요구에 야곱은 안된다고 소리쳤다. 베냐민은 무조건 내 옆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베냐민에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집착하며 하는 말이 있다.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 아니다. 부모 자신의 한을 풀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야곱을 압박하여 베냐민을 내려놓게 하셨고 그가 마침내 베냐민을 내어주었을 때 그의 가정과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있었다. 비로소 요셉을 만날 수 있었고 축복된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믿음의 가지치기란 그런 것이다. 내가 얘를 내려놓으면 죽을 것 같은데 사실은 걔를 안 내려놓아서 우리가 지금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리시는데 그게 지금 기적과 답답한 현실 사이의 통로이다. 그것을 내려놓고 뚫어야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가지치기할 때 하나님과 싸우지 말아야 한다. 포기가 빨라야 더 큰 은혜가 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생각, 그것 또한 내려놓아야 한다.


흔히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가지치기하는 건 좋은데 왜 해야 하는지 이유를 좀 설명해 주세요. 알고 갑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설명할 이유가 없으시다. 우리에게 일일이 이유다 설명하시고 가신다면 그것은 우리의 종이지 우리의 주인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자 우리의 인생을 주도할 권리가 있으신 분이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순종을 원하신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생전 처음 병원에 갔다고 생각해보자. 무섭고 아파서 막 우는 아이에게 아버지는 왜 주사로 페니실린을 몸속에 넣어야 하는지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저 품에 안기는 아이를 더 꼭 안아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가지치기하실 때 우리는 그저 이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품에 꼭 매달려야 한다. '주님, 설명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저 제 손을 놓지만 말아주십시오.'


한홍 목사님은, 실제로 이 가지치기 과정을 겪으실 때 죽을 것 같았다고 고백하셨다. 정말 이것 없이는 안될 것 같고 잘라내기 싫은 가지였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그 과정을 견디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고 고백하셨다. 가지치기의 고통은 지금이지만 열매는 나중이다. 그래서 어쩌면 가지치기는 힘이 든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자. 우리 주변에서 가장 예수님 닮은 사람들, 가장 영적인 열매를 많이 맺고, 가장 기쁨에 겨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마 가장 가지치기를 많이 당한 분들일 것이다. 


이 과정을 감사로 잘 견뎌낸 사람들이 가장 파워풀한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을 소망해야 한다.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자, 열매를 많이 맺고 있는 가지도 있다. 이런 가지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열매를 많이 맺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면 감사와 행복을 잃어버린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 첫사랑을 잃어 영적으로 지쳐있는 분들이 있다. 지켜보는 눈들 때문에, 실망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에 열심히는 하는데 영적인 기쁨이 없이 안타까움이 섞여있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의 안에 거하라.'


요한복음 15장에서는 나의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 무려 10번이나 나온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거한다는 말은 필요할 때 가끔 들리라는 것이 아니다. 주님 안에 항상 깊이 머무르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설교가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성령 받고 세계 복음화의 주역이 될 것을 알고 계셨고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놀라운 기적과 역사를 이룰 것이기에 그들에게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들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접속된 것이 너무나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 안에 거하라는 것은 명령어이다.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닌 것이다. 징계와 가지치기에서는 문제가 어느 정도 보이는 단계이지만 '거하라'는 단계에서는 우리의 적극적인 행동이 더 중요한 단계이다. 열매를 많이 맺고 있기 때문에 당장 시급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열매를 맺고 시험 들지 않기 위해 반드시 지금, 이 습관을 길러야 한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습관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다수의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전문가가 되어가지만 하나님과 친구가 되는 것에는 어색함을 그대로 유지한다. 마치 마르다가 예수님이 집에 계시는데도 부엌에 가서 일을 하는 게 더 편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럴지 모른다. 우리도 주님과 눈 마주치며 일대일로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빨리빨리 가서 주보 나눠주고 봉사하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지나친 걱정과, 염려에 시달리고 있다면. 남의눈을 너무 의식하고 있다면, 첫사랑을 잃은 것 같다면 오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콜링이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려 노력해야 한다. 사장이라면 사업을 걱정하기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해야 한다. 학생이라면 미래를 걱정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 삶에서 불안과 짜증, 염려가 사라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화평이 충만해진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가 공급해주신 이 평안의 에너지가 우리에게 가득할 때 비로소 우리는 더 많은 열매를 맺는 가지가 될 것이다. 


주 예수님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그분의 말씀을 일 순위로 생각해야 한다. 그 임재 안에 거해야 한다. 그때 우리 삶에 회복이 시작되고 활기가 다시 생길 것이다. 삶의 환경이 문제가 아니다. 그 어떠한 조건 때문에 지금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변명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평생 함께 동행하신다면 우리는 완벽하게 기뻐할 수 있다. 완벽하게 사랑이 넘 칠 수 있다. 완벽하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나를 걱정하게 하고 지금 나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것이 있다면 내려놓아야 한다. 물고기가 헤엄치다가 지쳤다고 잠깐 물밖에 나가서 쉬다 오겠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 밖에서는 그냥 죽는 운명이다. 오히려 그 은혜의 강안으로 더 깊이 헤엄쳐 가야 한다. 그곳이 유일한 우리의 쉼터이자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애쓰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무엇이든 구하는 데로 이루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주셨다. 그분의 임재 안에 계속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일체가 되어있다. 그래서 그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어떤 문제를 만나도 패닉 하지 않는다. 우리의 포도나무 되신 주님께 항상 붙어있자. 그분께서 우리의 탈진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에너지를 공급해 주실 것이다.


https://www.godpeople.com/?GO=tv_detail&tv_mv_no=18292

작가의 이전글 광야에서 지킨 유월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