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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therine Apr 12. 2022

신 1:34-40

생명샘 교회/ 김병진 목사님

*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은혜 주시기를 원합니다.


지난주 신명기 1장 내용


- 과거를 통한 미래의 제안 (조직, 천부장 백 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신약시대의 우리 모두)

- 광야 (사람이 절대적으로 살 수 없는 땅)를 지나게 하신 하나님 한분만을 두려워하라 (경외하라).

-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적군을 두려워말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 힘과 능력/ 총과 칼이 아닌 순종과 불순종의 문제 - 관점의 차이


오늘 본문은, 앞선 본문에서 불평했던 1세대가 어떤 결과를 맞이하였는지에 대한 회고이다.


신 1

34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이르시되

35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36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38 네 앞에 서 있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그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하리라

40 너희는 방향을 돌려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하시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했던 이스라엘 백성 1세대를 광야로 회군시키신다. 그러나 순종했던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에게는 그 땅을 밟을 것이고 그들이 밟는 땅을 그들의 후손에게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굉장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두 가지 길을 보여주시고 따라오라 하신다는 사실이다. 


1. 회고를 통해 구속사의 두 길을 보여주심


요약하면, 순종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의 뒤를 따를 것인가? 불순종하여 광야에서 죽은 1세대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인가?이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해 주신 것은 정말 큰 은혜이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을 수도 있지 않은가. 오히려 광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보자고 손 내미셨던 것이다. 그러나 같은 선택을 또 할까 봐 염려되는 마음에 명확한 대조를 통해 2세대에게 바른 길,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모세를 통해 알려주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때부터 이미 아브라함과 롯의 길을 대조하시며 항상 우리 앞에 놓인 두 갈래 길을 말씀해 오고 계신다.


아브라함의 길 - 말씀을 좇아 산 자
롯의 길 - 사람과 세상을 쫓아 산 자


창 13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았고 말씀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나 롯은 그 눈에 좋아 보이는 도시, 문명이 발달한 곳으로 향했다. 성경의 말씀이 참 중요하다. '구원'은 값없이 일방적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계약이지만, '구속사'는 쌍방 간에 이루어지는 계약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진행되지만 구속사에 참여하게 된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함께 해야 하는 책임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받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이다. 부모님들은 아마 이것을 더 잘 이해할 것이다. 그들의 자녀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지만 또 성장하길 원하는 마음 말이다. 


하나님도 그러신 것이다. 두 갈래 길을 보여주시는 이유, 우리가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원리가 아닌 말씀 따라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두 길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놓여 있다. 실제로 롯의 후예들은 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지만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훗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다. 그들의 후손이 누구인가? 바로 우리다.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던 롯은 세상 문화가 이야기하는 탐욕과 무질서함에 물들어 살아갔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세상은 이해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살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마음이 내키는 대로 미워하고 정리하며 사랑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진 않은가? 오직 생존자는 롯과 그의 두 딸이었다. 첫째 딸의 후손은 모압 족속이 되었고 둘째 딸의 후손은 암몬 족속이 되었는데 그 두 족속은 오히려 하나님의 구속사에 다 걸림돌과 같이 되었다. 도덕심이 굳어져버린 선조들의 삶을 그대로 이어받아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지금 우리가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 이것은 현재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을 볼 것인가 사람을 볼 것인가?
- 약속을 붙들 것인가 환경을 붙들 것인가?
- 말씀을 선택할 것인가 안목과 정욕을 선택할 것인가?


여기서 질문이 있다. 과여 두 사람은 행복했을까? 시작은 같았지만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던 아브라함과 롯은 행복한 삶을 살다 죽었을까? 하나님과 동행했던 아브라함은 당연히 행복했을 것이다. 그는 그의 후손까지도 책임지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다. 그러나 롯은 처음 선택했을 때는 좋은 것 같아 보였을지 모르지만 모든 것을 버린 채 도망치듯 두 딸과 함께 피난하여 마침내 그의 후손이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 속에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실 때 이처럼 명확하게, 극명하게 보여주신다. 이것이 은혜이다. 절대로 잘못돼 선택을 하지 말라고 당부 또 당부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배려이다. 성경에 이와 같은 선택의 갈림길에 선 두 사람이 또 나온다.


이삭의 길 - 은혜의 소산인가?
이스마엘의 길 - 율법의 소산인가?


이다. 이삭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태어날 수 없었던 자였다. 


창 18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 21

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대에 백세라


이스마엘은 임신의 때를 놓치기 전에 사람의 묘수로 세상에 태어난 자였다. 우리는 은혜의 소산인가? 율법의 소산인가? 오직 은혜로만 세워질 수 있는 자인가? 아니면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세워지려 발버둥 치는 자인가? 하나님을 믿고 은혜의 소산이 되겠다고 선포해놓고 아직도 세상 요소들을 업그레이드시키고자 노력하고만 있지는 않는가? 결단코 자기 힘으로 세워질 수 없는 것이 은혜로 부름 받은 자의 소명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 원리를 모르고 자기 힘으로 살아보고자 노력하다가 더 많은 것들을 놓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시간을 몽땅 놓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우리의 자녀들 또한 부모의 능력으로, 돈의 능력으로 키울 것인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울 것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야곱의 길 - 영성을 좇아 사는 자
에서의 길 - 육성을 좇아 사는 자


에서는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장자권, 그 축복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렸다. 


히 12

16 음행 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돼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마찬가지로 에서의 후손도 이후에 구속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반면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했던 야곱의 후손들은 장자권의 세 가지 축복을 받아 그의 넷째 아들 유다가 왕권을, 셋째 레위가 제사 장권을, 열한 번째 아들이었던 요셉의 후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두배의 몫이 돌아간다. 왕권의 축복을 이어받은 유다의 혈통에서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게 된다.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그대로 따랐던 야곱.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두 갈래 길을 경히 여기면 안 된다. 2세대에게 다시는 불순종의 길을 선택하지 말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의 귓가에 생생히 울리는 살아있는 음성이 되길 소망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을 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2. 그러나 너희의 아이들과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은 가나안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신 1

39 또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시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도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산업이 되게 하리라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단어가 이 구절 안에 있다. 바로 '아이들과 자녀들'이다. 모세가 이야기하고 있는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은 광야 40년을 회군하며 무럭무럭 자라 노년 혹은 중년이 되었을 것이다. 1세대 당시 장정은 모두 20세 이상을 칭하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당시 5살이던 아이들과 혹은 19살이었던 자녀들은 40년이 흘러 모두 나이를 먹었고 당시 아무것도 모르고 바라보았던 땅 가데스바네아에 다시 돌아와 모세의 고별 설교를 듣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왜 아이들과 자녀들이라는 오랜 표현을 쓰신 것일까? 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마태복음의 말씀을 더 살펴보고자 한다.


마 18

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공생애 기간 동안 천국을 무던히도 열심히 전파하셨다. 제자들을 그분의 삶에 밀착시키셔서 여실히 보여주셨다. 그러나 아직도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께 천국에서는 누가 크고 높은 자인지, 누가 작은 자인지 사람의 힘과 능력의 관점으로 질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행동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다'는 무슨 뜻일까?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제자들과 오늘날의 우리에게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 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즉, 천국의 삶 곧 약속의 땅 가나안 에서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살 수 있는 사람, 하나님 한분만 전적으로 의지하며 순종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삶의 진행이 능력과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과 불순종에 달린 것임을 이야기하고 계신 것이다. 


신 1

33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1세대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몇 년을 인도하셨는가? 1년인가? 5년? 10년? 40년이다. 한결같고 신실하게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가지고 그분의 자녀 된 우리가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며 살도록 훈련하셨던 것이다. 내 인생이 내 것인 것 마냥 옳고 그름을 따져가며 자신의 힘만큼 능력만큼 발버둥 치는 제멋대로인 사람이 아니라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자녀들과 같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이 아니하시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전적인 의존을 바라시는 것이다. 


그런즉, 가나안 땅의 삶은 훈련받은 순종을 실현하는 삶이 될 것이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바로 가나안 땅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향한 언약이시자 우리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하였고 이제 그분을 향한 순종을 실현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신뢰하라는 것이다. 가나안의 풍성함을 누리며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맺음으로 천국 삶을 이 땅에서도 살라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함으로 말이다. 하나님을 믿으며 산다는 것, 그 예수님을 닮아 간다는 것은 그래서 참으로 멋진 일이며 우리 마음속에 마르지 않는 생명샘, 마르지 않는 소망이 항상 흘러넘치게 하는 유일한 소망이 된다. 어떻게든 행복하게 살게 하려고 팔을 걷어붙이신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신 것이다. 


(아래 영상 1:22:25의 참조 영상을 꼭 보시기 바랍니다.)


아멘


https://www.youtube.com/watch?v=eTjD27k08m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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