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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이 아니어도 괜찮아

단점보다 장점에 집중하면서 멘탈잡기

by Innobanker


어느덧 2번째 이직을 한지도 6개월이 지나간다. 첫 이직을 한 1년 반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사람적인 측면에서는 불필요한 걱정이 줄어들고 먼 미래 보다는 오늘에 집중한다는 점이 달라졌다.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하고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포기가 빨라졌다.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 봤는데 성인이 된 이후 처음으로 4개월이나 쉬어 보고 이런저런 개인적인 사건들을 겪으면서 심지가 좀 굳어진 것 같기도 하고, 여러 가지 환경이 조금 더 안정되면서 마음이 평안해진 것 같다. 한편으로는 우울한 기분같은 게 느끼기 싫어져서 여러 책도 읽고 멘탈 좋은 주변 사람들 이야기도 흡수하면서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고민하고 노력한 효과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만의 '행복한 삶'의 기준이 나이 서른 넘어서 드디어 조금씩 정립이 되어 가고 있는 것도 맞다.


일적인 측면에서는, 글쎄, 나는 기획 일을 압도적으로 잘하지는 못하지만 좋아서 계속하고 있다. 기획 일은 지금까지 내가 해 봤던 다른 어떤 일들 - 공부, 금융 상담, 단순반복 작업 - 보다 매일매일 일하며 자기 발전을 하고 자기 효능감을 느끼게 한다. 특히 서비스 기획 혹은 프로덕트 매니징은 완전히 추상적인 전략만 세우는 것도 아니고 디자인이 유려하고 실용적인 기능을 만들어 고객의 삶의 효용을 더 나아지게 할뿐만 아니라 만든 제품을 더 잘 팔기 위한 마케팅, 마진을 더 남기기 위한 수익모델까지 신경쓸 부분은 많지만 바로 그 점이 매력적이다. 점점 이 일을 알게 될수록 이 일을 잘하게 만드는 요소가 다양하다는 걸 느끼고, 그 모든 걸 다 잘하지 못하더라도 몇가지 중요한 것 + 나만의 알파가 있으면 충분히 즐겁게 일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아 가는 중이다.


기획자 혹은 PM한테 가장 중요한 소프트 스킬은 커뮤니케이션이 맞는 것 같다. 기획서는 수많은 이해관계자 와 구두 커뮤니케이션의 산출물이자 문서적 커뮤니케이션이다. 경영진과 얼라인이 잘 되고 정확한 법규와 비즈니스, 시장 파악을 통해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실행 방안을 도출해 개발팀과 잘 조율해야만 좋은 산출물이 나올 수 있다. 전반적인 내용을 적으면 이렇게 무언가 두루뭉실해 보이고 와닿지 않는 문장이 되어 버리지만, 기획자로서 일한 짧다면 짧은 4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나는 전문용어가 난무하는 현장에서 좌충우돌하며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익혀 왔다.


커뮤니케이션 스킬이라고 하면 내 생각을 MECE 하게 명확하게 정리하고 구조화 해서 상대방을 설득하는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중요하다. 뭔가 원하는 방향이 있어야 되고 그 방향으로 밀고 나가면서 안되는 걸 쳐내는 게 필요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상대방의 말을 반드시 빠르고 정확하게 알아들어야만!!!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다는 걸 최근에 많이 느꼈다. 말을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은 노오오오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느꼈다.


예를 들면 개발 용어와 디자인 용어를 익히는 단순한 노력은 기본이고, 그걸 다양한 회사에서 실무자들이 각각 어떻게 표현하는지, 또 각 상황별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표현하는지를 파악하는 게 진짜 일인 거다. 개발자가 "모달 히스토리를 여러 개 쌓는 것은 어려워요." 라고 했다면 그게 UX 컴포넌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앱을 개발할 때 그 구조를 미리 고려하지 않고 개발해서 지금 바꾸려면 앱을 갈아 엎어야 하거나 정책을 크게 바꿔야 하는 이슈라서 그런 건지를 착착 알아듣는 기획자가 되는 게, 어려운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지식이 베이스가 된 상태에서,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울 때는 한번 더 물어보게 되는데 물어보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자꾸 누적 되면서 상대방은 짜증이 슬슬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쿠사리를 먹어가며, 이 기획자랑은 일 못하겠다는 소리를 들어 가며 힘겹게 의도를 파악하게 되고, 그 단계를 빠르게 극복하면 좀더 같이 일하기 좋은 기획자가 된다. 노력하면 분명히 좋아지긴 하지만 노력만으로는 타고난 기억력, 이해력, 말센스가 탑재된 경쟁자들에 비해 뒤처지는 기분을 피할 수 없긴 하다.


솔직히 은행에서 기획을 할 때는 영업점에 있던 사람들이 기획을 하니 기본적인 용어도 모르고 업무요건만 가지고 개발팀이랑 커뮤니케이션을 했는데, 그땐 불친절하다고 느꼈던 개발팀 분들에게 요즘 괜히 죄송하다. 요즘엔 경력직이 들어오면서 많이 달라졌겠지만 순환근무제로 인해 전문성이 부족한 과거의 나같은 기획자와 협업하면서 그 분들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그땐 참 많은 배려를 받았다는 걸 모르고 밖에 나와서 이런 저런 불평 불만들을 듣고 나서야 깨닫곤 한다.


가끔은 업무적인 것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요소가 더 중요하기도 하다. 개발자와의 친밀도에 따라 업무 처리 속도가 달라지기도 하고, 일정에 쫓기는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긍정적인 답변이 나올 수 없다. 와이프가 많이 아프거나 어린 아기를 키우고 있는데 자주 밤을 새고 응급실을 가야 하는 상황 등, 팀원의 상황을 잘 알면 알수록 배려라는 것을 할수가 있고 그런 배려를 했을 때 돌아오는 결과는 생각보다 정말 값지다. 가끔은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고 속으로 무시하거나 뒤에서 욕하는 나의 감추고 싶은 약점 같은 것을 팀원이 조심스럽게 알려주어서 개선하기도 한다.


위계질서가 강하고 보수적인 대신 내 후배는 내새끼, 못하면 혼내서 사람 만들어야지 하는 정이 있던 첫 직장과는 다르게, 수평적이고 프로페셔널한 곳에 있을 수록 겉으로는 예의 바르지만 속으로는 상대방의 단점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고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보단 그냥 잘 못하는 사람은 무시하고, 실력 되는 사람하고만 말하거나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느낀다. 그래서 아득바득 없는 친분이라도 억지로 만들어서 이것 저것 배워서, 내가 바로 그 실력자가 되고 싶어하는 걸지도 모른다. 요즘은 언젠가 자기 사업을 하거나 이 일로 끝장을 보려는 사람이 많은 곳에 있다 보니, 일을 잘하건 못하건 "월급루팡" 하면 된다고 생각하던 옛 동료들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항상 제대로 하려고 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기획 일의 또 한가지 매력이라면 어떤 일을 하든 기획이 필요하기 때문에 꼭 1등이 아니더라도 할 일은 무궁무진 하다는 거다. 예전엔 머리 좋고 말빨 타고난 사람들이랑 계속 나를 비교하면서 내가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우울해 했었는데 이젠 상위 50% 안에만 들면 된다고 생각한다. 50% 는 나 혼자 정한 기준인데, 일 하기 싫어서 미루고, 기한 내에 산출물 못 내고, 기본적인 비즈니스 요건이나 개발 요건 생각 못하고 기획하고, 사람들이랑 맨날 싸워서 트러블 내고, 이런 사람이 아니면 난 계속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50% 안에는 들거라고 생각한 거다. 이게 생각보다 되게 긍정적인 영향이 있어서 매일 일하면서 좀더 행복하다.


무턱대고 내가 일 제일 잘 하는 줄 알던 때와 달라진 점이 또 있다면 "객관적인 자기 인식" 이다. 지금의 나는 남들보다 내가 우월하다고 느끼지도 않고, 내가 남들보다 무언가를 못해서 비참하다고 느끼지도 않는 상태, 다만 뭐는 좀 더 잘하고 뭐는 좀 더 못하고 이런 것들에 대해서 예전보다 좀 더 정확하게 알고 - 더 나아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명확하게 아는 상태이다. 그래서 긍정적인 피드백을 들으면 꼭 극대화할 방법을 찾고, 부정적인 피드백은 어차피 계속 반복된다는 가정 하에 노력을 한다. 겪어 보면 단점은 무슨 문신 같아서 쉽게 없어지지 않지만 장점은 쉽게 극대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나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잘 떠올리는 편인데 이게 실용적인 면이 부족해서 인정을 덜 받았었다. 그래서 프로덕트를 "잘" 만드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여러 서비스를 분석해 보기도 했고, 내가 만드는 제품의 기능 하나하나를 어제보다는 좀더 컴팩트하게 하기 위해 노력을 했더니 창의적인 아이디어에 실용적인 면이 더해져서 소구점을 잘 찾게 되었다. 반면에 디자이너나 개발자 말귀를 한번에 못 알아듣는 건 진짜 아무리 노력해도 계속 피드백이 온다.


속상할 때도 많았는데 이것도 여러 케이스와 여러 사람을 겪으면서, 어떨 때는 내가 생각이 많아서 상대방의 말에 100% 집중을 못하거나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버릇 때문이고, 어떨 때는 상대방이 내 입장에서 설명을 충분하게 하지 않았거나 맥락이나 의도를 알려주지 않아서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괜찮아졌다. 그 때마다 메모하고 개선 방법을 하나 하나 찾으면서 '어제보다 조금 더 잘하면 되지 뭐. 이 세상 모든 기획자보다 잘 할 필요는 없어.' 하고 스스로 마음을 달랜다. '난 진짜 왜 이럴까, 기획자는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중요한데, 이러다 이 일을 못하게 되면 난 어쩌지?' 하고 생각하던 때보다 훨씬 마음도 편안하고 개선도 더 빨라진다.


어떤 것들은 경험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해결 되기도 한다. 최근에 PM 채용공고를 분석해서 어떤 스킬을 가장 중요시 하는지 분석한 글을 읽었는데, 의외로 도메인 지식과 비즈니스에 대한 이해가 가장 중요했다. 유통업이나 블록체인 등 다양한 비즈니스에 관심이 생겨서 옮겨 보려는 시도도 해 보았지만, 이직 제안이나 주변 사람들의 평을 통해서 나를 '올라운드 기획자' 보다는 '금융권에 오래 있어서 금융을 잘 알 것 같은 기획자' 로 인식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한 길을 걷는 게 지루하기만 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전문성 아닌 전문성을 쌓아 가는 중이다. 새로운 걸 해보고 싶은 욕심 혹은 호기심은, 은행에서 P2P로 - P2P에서 증권사로 옮기는 과정을 통해 충분히 채우고 있다. 이 정도의 변화 만으로도 신입사원이 된 것마냥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아예 새로운 업종으로 옮기는 건 왠만큼 기획자로서의 커리어가 쌓이고 학습능력이 빠르지 않고서야 어렵겠다는 생각을 한다.


1등이 아니어도 괜찮다. 우연히 시작한 기획 일이지만 내가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지속하고 있는 소중한 일이기도 하고, 경험이 쌓일 수록 단점보다는 장점을 발휘할 기회가 많아지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지향하는 삶의 행복을 이루는 하나의 과정이자 수단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이 기획 일을 당분간 계속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과 삶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일과 삶 모두에서 소소하게 나아지는 행복을 느끼며 하루하루 충만하게 사는 삶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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