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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보다 손톱만큼 나아진 기획자의 업무 일기 (1)

잊지 않기 위해 쓰는 일의 기록

by Innobanker

정말 피곤한 날은 일찍 잠들고 일찍 깨어 버린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인생의 많은 일이 한꺼번에 겹쳐 머릿속이 복잡한 요즘이었다. 근 1년 안에 일을 4개월이나 쉬다가, 2번째 이직을 했고, 이직한지 1달만에 임신을 해서 아기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100일도 채 남지 않았다. 엄청난 축복이고 진정한 인생 2회차로 접어드는 게 느껴지려는 찰나, 나에게 이 상황이 유독 더 머리아픈 이유는, 그 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렸기 때문이다. 2년 전의 노력의 이유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1년 전엔 성장이었고, 지금은 당장 곧 태어날 아기를 중심으로 모든 게 재편되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 무척 열심히 살았는데, "나는 뭘 위해 열심히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현타가 씨게 오고 있는 중이다.


이런 생각들 끝에 한 가지 확실한 건, 당분간 이직이나 인정받는 것 등 겉으로 보여지는 결과물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제부터가 진짜 레이스이고, 내가 원하는 게 정확히 뭔지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기가 태어나면 또다시 그 동안 해왔던 것처럼 내 행복이 뭔지 알고 명확하게 추구하는 지향점 없이 무조건 최선을 다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 내가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떨 때 행복하고, 그러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좀더 알아가고 그 과정에서 아기와 좋은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 그 어떤 것도 강요하거나 강제하지 않고 아기도 자아와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갈 수 있게 내가 도와주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어서인지 일에서도 힘을 좀 빼게 되었는데, 이게 생각지 못한 긍정적인 효과들을 가져오고 있다. 최근 하고 있는 생각 - 1등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생각 - 상위 50% 안에만 들자는 생각 - 의 연장선상에서, 잘하는 기획자랑 나랑 비교하기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간 '잘하기' 위해 아둥바둥 해서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보이고 또 정리가 되고 있다. 당장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게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지만, 다시 일을 하게 되면 딱 지금의 마인드로 시작해서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끝에 가서는 웃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마인드를 기억하고 다시 소환할 수 있게, 소소하게 일하면서 배운 것과 느낀 것들을 기록한다. 브런치를 애용하고 여러 랜선 사수 분들이 있지만, 아무리 다른 분들의 글을 읽어도 내가 직접 겪고 느낀 점을 정리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배움은 없는 것 같다. 생각날 때마다 글을 적어 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게 안돼서, 짧게 메모해 두었던 것들을 풀어서 적어 보았다.


1. 초기 서비스를 기획할 때는 데이터보다 사람에 대한 이해가 더 중요하다.


요즘 데이터 드리븐 의사결정을 많이들 이야기한다. 이미 출시한 서비스의 경우에는 직관에 근거한 기획보다는 데이터를 통해 유저의 행동 패턴을 분석하고 리텐션이나 전환율을 높이는 게 물론 좋다. 하지만 초기 서비스를 기획해 보니, 직관의 영역이 매우 중요해진다. 하도 내가 맞다 네가 맞다 갑론을박이 계속되니 처음에 너무 고통스럽더라. 아직 출시를 하지도 않았는데 결정을 해야 하니, 결국에는 누가 말빨이 좋냐의 싸움이 되어 버리는 거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일단 이렇게 해보고 출시하고 나서 사용자의 반응을 보자' 라고 약간 포기해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최근에는 '직관이 도대체 무엇인가', '직관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한 책도 읽고 정리를 해 보니, '직관은 경험에서 온다' 라고 한다. 다양한 경험을 하다 보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통합적인 사고가 탄생하고, 거기서 좋은 솔루션이 나온다는 거다. 주식투자를 다양하게 해봤어야 차트의 어떤 기능이 필요한지를 예측할 수 있는데 개발팀 사람들끼리 논의를 하니 편향된 경험을 가지고 내가 맞네 네가 맞네 하게 되었던 거다.


그래서 UX 리서치를 하고 그 결과를 활용하기로 했지만, 이게 정말 근본적인 솔루션일까 하는 물음표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제품관련 책을 읽다가 어떤 제품이든 사람이 사용할 제품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무언가를 기획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구나를 깨닫게 되었다. 스티브 잡스의 애플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많은 해석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인간이 심미적인 것을 좋아하고, 비싸고 아름다운 제품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고 싶어한다는 본성을 잘 이해했기 때문이라는 것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그래서 그 작은 깨달음을 얻고 난 후에는 어떤 기능을 기획하던 '사람이라면 응당 이게 더 좋을거다' 라는 걸 최대한 고민해서 넣게 되었고, 신기하게도 나만의 편향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논리를 내세우며 설득하던 것에 비해서 너무 수월하게 공감을 얻어내고 더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해졌다.


2. 기획자만의 곤조가 있어야 하지만 팀원들이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하면 수용하는 게 좋다. 다만 너무 쉽게 내 논리를 포기해서는 얻는 게 없다.


내가 기획한 것에서 개발하기 어려운 부분만 쳐내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 디자이너, 개발자 모두가 각자의 직무에서 기획에 대한 의견을 자유롭게 내는 분위기에서 일을 하니 가장 어려운 건 의사결정이다. 처음엔 기획자:나머지 팀원이 1대N으로 느껴져서 마치 내가 스트릿 파이터가 된 마냥 그들을 어떻게 하면 논리적으로 이겨먹을까를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회의를 진행할 때도 뭔가 나와 다른 생각을 제시하면 '어? 왜 개발자가 기획에 태클을 걸지? 디자이너가 왜?' 하던 시절이었다.


이제 나와 다른 의견을 받는 게 일상이 되고 나니, 그 과정이 고통스럽다는 생각은 많이 줄어들고 나와 다른 의견은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반-합이라는 게 있다. 어떤 생각이든 반론을 통해서 좀더 나은 생각으로 다듬어지는 것이다. 다만 기획자의 관점에서는, 업무를 분석하고 무지하게 치밀하게 고민해서 A안과 B안을 들고 올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왜 A안 B안인지, 그 중에서 난 A안이고, 왜 A안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지가 정말 명확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촘촘한 논리로 설득을 해도 개발자가 C안을, 디자이너가 D안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건 좋은 현상이다. 내가 고려하지 못한 것을 알려주고 생각의 폭을 넓혀준다. 그랬을 때, 문제를 좀더 통합적으로 바라보고 제안한 상대방은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생각했는지 논의를 통해서 좀더 좋은 솔루션을 도출할 수 있다.


기획자가 본인의 A안에 명확한 근거가 있을 때, 중심을 가지고 C안과 D안을 또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나와 다른 의견이 나올 때마다 쉽게 포기해 버리면 더 좋은 솔루션이 도출되기 어렵다. 납득될 때까지, 끝까지 논의하고 싸워보기도 하면서 다양한 케이스를 고려하게 되고 문제점을 미리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런 케이스들을 미리 고려하고 설계할 수 있는 기획자가 되어가는 것 같다. 조금씩 성장하는 거다.





한 5개 정도는 술술 금방 쓸 줄 알았는데,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또 짬이 나면 이어서 정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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