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않기 위해 쓰는 일의 기록
더운 날씨가 한풀 꺾여 움직일 때 한결 수월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배가 더 불러와서 몸이 앞으로 쏠린다. 오리처럼 펭귄처럼 뒤뚱뒤뚱, 무게를 최대한 뒤로 실으면서 걸어야 한다. 아기를 만나기까지 80일이 채 안남았다. 새로운 기획자분이 오셔서 업무 인수인계를 진행하면서, 내가 했던 일들을 문서로 정리하고 있다. 이제 정말 한달 정도만 더 일하면, 집에 가야 한다.
생각보다 마음이 평온하다. 쓸데없는 걱정에 잠 못 드는 날이 많고, 눈뜨면 일어나기 싫은 날이 많은 나는 요즘 아침에 눈 뜨자마자 걱정을 하는 대신 '긍정확언' 이라는 걸 해보고 있다. '나는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다, 내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등등 내 자신을 정말 속일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면 언젠가 확언들이 현실이 된다고 한다. 뭐, 믿거나 말거나. 아침에 눈을 뜨면 걱정하느라 일어나는 데 10분 정도 걸렸었는데 이젠 바로바로 일어나니, 조금씩 효과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걱정이나 고민들은 글에 가두어 버리고 이제 정말 아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 지난 글에 이어서 업무 하면서 메모해둔 생각들을 풀어 본다.
4. 어떨 때는 도메인 지식이 중요하고, 어떨 때는 레퍼런스가 중요하고, 어떨 때는 경험이 중요하다.
주식에 대한 기본 정보가 담겨 있는 종목 현재가 화면을 기획하면서 차트나 호가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우선순위에 기반한 심플한 기획이라고 포장한) 텅텅 비어있는 기획안에서 시작을 해서 수많은 수정을 거치게 되었다. 시장에 이미 많은 경쟁자들이 있고 고객의 기대 수준이 높은 경우에는, 레퍼런스를 최대한 많이 보고 기본 기능을 넣어줘야 한다는 걸 배웠다. 가령 1day 차트에 대부분 기준가를 표시해 주고 있는데 우리 서비스에만 빼놓으면 그건 아무리 간이 차트여도 심플함이 아니라 불편함을 주는 차트인 것이다.
반면 다양한 서비스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로그인이나 가입쪽은 한번 AtoZ를 기획해 보면 다음부터는 내가 직접 기획했던 내용을 변형하고 우려먹으면서 상당히 쉽게 기획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국내에 비해서 보안수준이 낮고 인증절차가 매우 단순한 동남아쪽의 서비스를 기획해 봤던 경험이지만, 금융 서비스의 로그인/가입 AtoZ를 기획해본 경험이 있으니 어떤 서비스를 기획하더라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5. 디테일을 챙겨야 하는 부분이 있고, 중요한 것만 빠르게 쳐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은행을 다닐 때 워낙 꼼꼼하지 않으면 민원이 걸리거나 큰 문제가 생겼던 경험을 많이 했어서, 나는 기획서에 너무 최선을 다해서 오타 하나 없게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또 그런 것에 비해서 오타나 실수가 굉장히 많기도 하다 - ) 그런데 막상 디자인이나 개발이 된 걸 보면 나처럼 그렇게까지 꼼꼼하게 하지 않고 일단 이해한 대로 빨리 결과를 내놓는 경우가 많다. 테스트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편하다. 어차피 아무리 꼼꼼히 해도 수정사항은 발생하고, 빨리 결과물이 나와야 나와 상대방의 생각의 싱크가 맞는지 확인하고 피드백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생산적인 논의가 진행이 돼서 인터렉션이나 기획이 좀더 보완되는 경우가 많다. SI업체에 의뢰하듯 요건 그대로 반영해주길 바라면 안된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오히려 약간 비틀어서 개발했을 때 의외의 관점이 보이고 기획을 수정하는 걸 많이 경험한다.
기획자에게 디테일을 챙겨야 하는 부분은 이런 부분인 것 같다. 데이터에 대한 기획을 할 경우 데이터가 없는 경우나 음수/양수인 경우, 혹은 로딩에 실패한 경우 등 엣지케이스를 챙기는 것. 가입이나 주문 처리 등 sequential 한 프로세스를 기획할 경우에는 있을법한 시나리오를 꼼꼼하게 잘 챙기는 것. 그리고 이런 걸 잘 챙기기 위해서는 다양한 케이스를 많이 기획해 보는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6. 여러 채널을 통해 서비스되고 있는 경우, 채널 간의 정책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 하고 있는 건 새로운 MTS(Mobile Trading System) 제작이다. 그런데 상황상 기존에 WTS(Web Trading System) 도 존재하고, 이미 서비스중인 MTS도 있고, 무엇보다 고객의 대부분이 오프라인 지점을 통해 거래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번에 모든 프로세스를 기획하는 상황이 아니며, 오프라인 업무 프로세스와 백오피스 프로세스 까지 현지법인에 물어보면서 파악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챙겨야 할 포인트를 놓쳐 버리는 일이 생겨 버렸다.
계정 정책을 수립할 때 서비스중인 WTS와 MTS의 정책보다 보안을 강화해서 설계한 파트가 있는데, 개발을 하다 보니 기존 채널들과 신규 서비스가 호환이 안되어 신규 서비스에 들어갈 기능을 기존 소스로 다시 돌려 놓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연관된 다른 정책도 확인해보니 동일한 문제가 있는 데다, 운영이슈까지 있어 현지법인에서 정책 변경에 대한 반대의견이 있어 결국 해당 계정 정책에 대해서 개발했던 기능들을 전부 내리게 되었다. 안그래도 리소스가 부족한데 개발자분들한테 미안한 건 당연하고, 은행에서 오프라인과 온라인 서비스 간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이슈를 수도 없이 다뤄 보았으면서도 이런 문제를 예측하고 예방하지 못했던 이유를 곱씹게 되었다.
아무래도 은행에서는 이해관계자가 모두 본사 부서 안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옆 부서에 잠깐 전화해서 물어보면 되고, 협조가 잘 안되면 팀장님/부장님한테 차례로 이슈 레이징이 되어 해결을 해 나갔다. 그런데 현지법인과 개발팀과의 관계는 그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서 시차와 의견차가 훨씬 많이 발생한다. 한국에서는 당연한 것도 현지에서는 당연하지 않은 것이 많으며, 기존 시스템과의 호환성도 고려해야 하고, 기존 채널들의 운영방식이나 고객응대, 백오피스 프로세스도 알아야만 하지만 쉽게 파악하기도 어려운 상황. 이런 것들이 하나씩 허들로 추가되다 보니 더욱 더 헤맸던 것 같다.
이번에 겪은 시행착오가 헛되지 않으려면, 어떤 종류의 상황에서든 1) 이해관계자와 관계에 대해 명확히 파악하고 2) 업무 프로세스와 채널별 서비스 운영방식을 명확히 파악해서 기획을 해야 하겠지.
기록을 위해 좀더 구체적인 상황을 쓰고 싶지만, 출시 전인 서비스라 조심스럽다. 나중에 출시가 되고 데이터가 쌓인 뒤, 복직을 해서 개선을 하게 되면 또 다른 종류의 경험이 쌓일 것이다. 중간에 출산 이벤트가 끼게 되면서 가장 아쉬운 건, 처음으로 신규 서비스 기획 - 출시 - 개선의 라이프사이클을 온전히 겪어볼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하게 된 것이다. 개선은 어느 회사를 가더라도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인데 신규기획과 출시를 이어서 경험하는 건 쉽지 않기에..
하지만 이런 아쉬움 역시 이 글에 내려 놓으려고 한다. 의미 없는 계획과 실천이 아닌 궁극적인 지향점(=행복)을 보고 살리라 마음먹었기도 하고, 나는 아직 직장 경력 10년차에 기획 경력 5년차이며 만으로 서른둘 밖에 안되었고, 그런 아쉬움을 채워줄 기회가 앞으로 수도 없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개발중인 앱이 출시되어 잘 돌아간다면 다른 나라의 앱을 또 처음부터 출시해보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외 앱이 잘 안된다면 개선을 해서 잘되게 만들던지 국내 앱을 만들면 될 것이요, 다른 회사에서 다른 서비스를 기획하면 될 것이다. 새로운 경험에 대한 목마름을 채워줄 곳은 어디에든 있다. 육아 역시 새로운 여정일 것이고, 그렇게 목말랐던 커리어와 성장이, 즐거웠던 해외 출장이 복직 이후엔 또 어떤 부담으로 다가올지도 새로운 여정일 테다. 여러 경험을 통해 내가 모험을 하기로 선택하느냐 마냐의 문제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것이고, 아이와 함께 새로운 모험을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