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폐인' 가능성이 있는 시청자가 바라보는 노희경과 김은숙 드라마
최근에 드라마를 많이 보았다.
생각해보니 4년 전부터 드라마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본방을 꼬박꼬박 챙겨본 드라마는 TVN에서 한 '시그널'뿐이었고(그것도 우연히 보게 되었지만) 나머지는 그냥 지나가다가 대충 본 것들이었다. 남편이 TV 광이기 때문에 요즘 어떤 드라마가 유행하는지 대충은 안다. 하지만 참을성이 없는 나는 드라마를 정주행하지 못한다. 50편에 가까운 주말 드라마는 본지 까마득하고 16편인 미니시리즈도 다 챙겨본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다. 엄청나게 히트한 '응답하라 시리즈', '태양의 후예', '도깨비'도 보지 않았다(한때 아줌마들과 대화가 안되었다).
그러다가 온 가족이 중국에 오면서 드라마를 조금씩 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일주일에 이틀 정도만 8시에 들어오고, 나머지는 얼굴도 보지 못할 정도로 바쁜 생활을 하던 남편이 여기 와서 많이 한가해졌다(주재원 생활의 이점). 남편과 함께 드라마를 야금야금 보기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본 드라마가 노희경 작가의 '라이브'였다.
이 드라마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궁금했었다. 사실 나는 노희경의 드라마를 보고 싶지 않았다. 아주 예전에... '바보 같은 사랑'인가 하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데(시청률도 낮고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 일부만 보았음에도 몇몇 장면이 마음에 깊이 남았다. 10년이 넘게 문득문득 생각나곤 했다.
그 후에 또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보다가 완전히 빠져들었다. 아픔을 안고 있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 덕분에 삶의 희망을 찾게 되었지만 그 여주인공이 자신이 죽게 만든 친구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다시 빠지는 그런 이야기였다(글로 풀어놓으니 통속적이고 신파스럽지만 실제로 보면 담백한 편이다). 그 남자주인공의 아픔에 동화되어서 한동안 정말 엄청나게 힘들었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인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라면 어땠을까?'...'저런 상황에서 둘이 헤어지는게 과연 맞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한동안 그 드라마 속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나중에는 시청률을 위해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해놓은 작가에게 놀아난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기도 했다.
어쨌든 아무 드라마나 덥석 보지 못했다. 남편은 아무 생각없이 보고 또 금방 잊어버리지만 나는 쉽게 마음을 주지 못하지만 한번 주면 땅굴을 파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등장인물들의 아픔에 대해 너무 골똘히 생각한다. 가공인물이고 극을 위해 만든 설정인데도 드라마 자체가 개연성이 있고 배우들이 연기를 잘 하면 나도 모르게 그들의 상황이 내 상황인 것처럼 함께 괴로워하고 힘들어한다. 소위 '드라마 폐인'이 될만한 조건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아픔이 없는 드라마는 잘 보지 못한다. 요즘에는 달라졌지만(지금은 오히려 아무 생각없이 웃고 즐길 수 있는 코믹물도 잘 본다), 예전에는 그랬다. 그래서 볼 드라마나 영화를 까다롭게 고르고 깊이 보고 오래 오래 곱씹어 생각하곤 했다.
김은숙의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은숙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지는 상황이 공감이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걸 정도로 격정적이고 운명적인 사랑에 '필연적인 이유'가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김은숙 드라마 중에서 내가 질기게 파고 든 작품이 두 개 있다. '연인'과 '시티홀'. 김은숙 작가 작품 중에서는 대표적으로 시청률이 부진했던 경우였는데 반대로 나는 이 두 드라마가 굉장히 마음에 와 닿았다. 그때도 미국에서 주재원 생활을 하면서 한가할 때였다. 이 두 드라마를 아주 많이, 질기게 보았다. 김은숙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끌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자신도 모르게(의지를 배반하면서) 끌리게 되는 장면 하나하나를 찾아내면서 마치 내가 그 상황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창피하지만 내가 사랑을 하는 기분이었다. 배우 이서진을 싫어하면서도 '연인'을 수십번 돌려 보았고 '시티홀'을 계기로 차승원의 연기력을 알게 되었다.
다시 노희경 드라마로 돌아와서 '라이브'는 정말 내 예상을 뛰어넘는, 너무 좋은 작품이었다. 등장 인물들은 모두 평범하지만 각자의 사연과 스토리를 갖고 있다. 작가는 등장 인물들을 극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모두에게 골고루 시선과 애정을 배분하면서 극의 긴장감을 끝까지 끌고 나갔다.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의 어쩌면 궁상스러운 이야기가 이토록 강력한 힘을 갖게 되다니... 배우들도 열연했지만 이건 순전히 작가의 역량이었다. 그리고 극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었던 배성우에게 홀딱 반했다. 배우 '배성우'를 오래 주목할 것 같다.
주인공들의 아픔보다는 드라마 전체의 만듦새와 메시지가 더 다가오는 드라마였다. 집중해서 보고 많이 느끼고 잊어버릴 수 있는 그런 드라마. 마음에 들었다. '역시 노희경이구나', '이 작가는 자기복제에 그치지 않고 계속 발전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앞으로 노희경 드라마를 챙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거리를 둔 드라마보기'에 자신이 생겨서 드라마를 계속 보았다. 오랜만에 남편과 뭔가를 함께 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한국에서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화제가 된 '미스터 션샤인'도 재미있게 보았고 금방 잊었다. 영화도 많이 보았다. 늘 보고 싶어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 인도 영화 '세 얼간이'도 보았고 묵직한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노희경의 옛날 드라마로 돌아가 '괜찮아, 사랑이야'와 '그 겨울, 바람이 분다'도 보았다.
<계속 이어서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