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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라이 Feb 15. 2020

'잘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의 갈림길에서

한국을 떠나기 전에 한 젊은 친구를 만났다. 20대 끝자락에 있는 청년이었다. 그는 곧 직장을 그만둔다고 말했다. '가슴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지금 직장에 딱히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지금 직장도 본인이 원해서 들어간 것이었다.


그 친구는 어릴 때부터 본인이 좋아하던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성공에 대한 강한 포부를 가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평소 원하던 일들을 직접 해보고 그 경험을 통해 본인이 판단하고 싶은 것 같았다. 세상의 조용하지만 무시무시한 요구에 휘둘리는 대신에.


그 친구를 보면서 마음이 복잡했다. 막 걱정스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나에게도 '일'이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진정으로 원하는 일만 찾으면 정말 행복해질 것만 같았다. 지금 행복하지 못한 것은 내가 정말 잘하고 원하는 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만 찾으면 그때부터 아무 고민도 없고,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생업에 매달리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정신없이 키우다보니 '적성'이니 'Dream Job'이니 하는 생각과 어느새 멀어져 있었다. 이 청년의 말을 듣고 비슷한 고민을 하던 내가 까마득한 옛날의 기억, 아니 정말 있었던 사람인지, 소설이나 영화 속의 사람인지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럼, 나는 행복이나 적성은 '이루지 못한 꿈'으로 단념하고 불행한 삶을 살아왔던 것일까? 전혀 아니었다. 일에 대한 순진한 희망은 버린지 오래지만 오히려 실제 생활은 20대에 꿈꾸던 'dream job'에 가까와졌다.


이 아이러니. 생각하지 않으니, 집착하지 않으니 어느새 그곳에 성큼 다가가 있다. 그런데 무지 행복하냐면 그건 또 아니다. 그냥 예전에 비해 '조금 더 자주' 평온할 뿐이다.


돌이켜보니, 예전의 나는 '창조적인 일'을 내 꿈으로 여겼다. 세상의 규범이 싫었고 답답했다. 그런데 학교에서 적성검사를 보면 주로 '법관', '학자', '언론인' 이런 직업이 나에게 맞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언어적인 소질이 있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 같다.


'법관'은 주변에서 나에게 많이 권했던 직업이다. 당시 나는 시험에 통과할 자신도 없었지만 평생 그런 일을 하고 사는 건 죽을 정도로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30년이 거의 지난 지금, 만약 그쪽 일을 했다면 잘 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후회하느냐? 그건 아니다. 솔직히 안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뭔가 쓸모 있고 정기적으로 수입이 들어오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second, third 옵션을 택했다. 일종의 절충이었다. 내 적성에도 어느 정도 맞고, 사회적 수요도 있는 일. 그래서 기자도 해봤고 연구원도 해 봤고 나중에는 통번역사로 자리를 잡았다. 돈도 어느 정도 벌 수 있고, 그런대로 재미도 느낄 수 있는 일들이었다.


곧 50대를 바라보는 상황에서 직업에 대한 내 생각은 '어떤 직업도 그 자체로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절실하게 원하는 것을 손에 얻으면 그걸로 '고생 끝 행복 시작'일 것 같지만 우리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인간은 가진 것의 가치를 너무 쉽게 잊고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끊임없이 욕심을 부린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쾌락적응'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몸은 동물의 한계를 가졌으면서도 욕심은 신과 동급이기 때문에 계속 더 높은 것, 나에게 없는 것을 추구한다. 어떤 경우에는 죽을 때까지.


한번도 확신을 가진 적은 없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런대로 사회적인 역할도 하면서 적성에도 맞게 살아왔다. 중간에 일탈도 하고 나 자신에 대한 실험도 했다. 보통 6개월 미만으로 끝났고 별로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시간낭비였지만, 시간을 낭비했다고 해서 경쟁에서 완전히 도태되지도 않았고 세상이 끝장나지도 않았다.


세상의 흐름은 너무 빨라서 조금만 한눈을 팔면 도태될 것 같지만 이 무서운 세상도 나처럼 나약한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공간이다. 1년, 또는 몇 년의 방황이 이후의 인생을 영원히 결정하지도 않는다. 물론 짧은 호흡으로 보면 굴곡이 많아 보이지만 10년, 20년의 세월을 놓고 보면 어쨌든 '그런대로' 살아진다는 것이다.


요즘은 성과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다. 성과는 곧 속도다. 많은 시간이 주어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일을 다 해낼 수 있다. 그러니 제한된 시간 내에, 아니 최단시간 내에 누가 먼저 해내느냐가 성공과 실패를 규정한다.


그런데 좀 살아보니, 인생이라는 장에서는 이 공식이 반드시 통하지는 않는 것 같다. 최단 시간에 어떤 일을 끝내고, 또 최단 시간에 또 다른 일을 끝내고... 최대 성과가 줄줄이 이어진 기간이 반드시 최대의 만족, 깊은 충족감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행복을 계량화하고 서열화하려는 사회적인 추세와는 달리, 이 '행복'이라는 감정은 정말이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최단 시간 내의 최대 성과. 듣기에는 좋지만 너무 쉽게 이뤘기에 그 만족은 오래 가지도 않고 깊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그 순간순간에는 지극히 느리고, 더디고, 뭔가 눈에 보이지 않게 느린 흐름이더라도..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을 잡고 간다면.. 나중에 보면 그것이 더 깊은 충만감을 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그것은 당사자만이 판단할 수 있다. 그 순간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청년과 많은 말을 했지만 정말 중요한 말은 하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인생 선배로서 뭔가 중요한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뭐가 중요한지 그 자리에서는 생각나지 않았다.


몇 주 시간이 흐르고 나니 생각이 조금 정리된 것 같다.


'조급해하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가지려 하지만 않는다면 중요한 것을 가질 수 있다.'


'지금은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원하는 대로 가게 된다.'


아마도 이런 말들을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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