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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라이 Mar 31. 2020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너에게

'빨강머리 앤'이 '하이디'를 키운다는 것

어릴 때의 넌 꼭 ‘알프스 소녀 하이디’나 ‘폴리아나’ 같았지.


늘 해맑게 웃고, 불평이라고는 조금도 하지 않고, 나쁜 상황에서도 반드시 좋은 점을 찾아내는 아이였으니까. 그런 너를 보면서 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엄마’라고 생각했단다. 아무 준비도 못한 나에게 이런 행운이 찾아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어.    


엄마는 겉은 어른이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아이와 같았어. 마음 속은 ‘빨강머리 앤’이나 ‘키다리 아저씨’ 속의 디였고 계속 그렇게 남고 싶었나 봐. 빨강머리 앤이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키운다는 게 정말 우습지 않니? 하하.  


어린 네가 너무 소중해서 한때 너를 숨막히게도 했었지. 그래서인지 크면서 넌 조금씩 네 일상을 감추고 나에게서 멀어지더구나. 그래서 엄마도 마음이 아팠지만 꾹 참고 너한테서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일부러 떨어졌단다. 그렇게 네 공간, 네 인생을 살도록 내버려두고 싶었지.


그랬더니 너는 어느덧 훌쩍 자라버렸지 뭐니. 엄마가 어릴 때 상상했던 하이디나 폴리아나가 아니라 생각이 분명하고, 콤플렉스도 있고, 고민도 많은 10대로 자랐어.


TV 애니메이션 <알프스 소녀 하이디>


너를 도와주고 싶고 고민을 덜어주고 싶지만, 엄마가 서툴러서 그런지 얼굴 보면서 이야기하면 번번히 이상해지더라. 나는 말하고 너는 입을 다물고 결국 훈계나 잔소리로 끝나곤 했지. 정말 그렇게 안 되길 간절히 바랬는데도 말이야.


그래서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적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단다. 나중에 잊어버리기 전에 뭔가 도움되는 말을 정리해보고 싶었어.


엄마도 아직 어른 노릇, 엄마 노릇을 배워가고 있는 중이라 모든 것에 대해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순간 순간 이렇게 느꼈고 이런 식으로 마음을 정리하면서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너한테 보여주고 싶었단다.


게다가 엄마가 갱년기라서 하고 싶은 말이나 단어도 자꾸 잊어버리잖니. 지금도 이런데 앞으로는 더 하겠지. 해주고 싶은 말은 많은데 왜 늘 모르는 것 투성이이고 중요한 건 한참 뒤에야 생각나는지!


돌이켜보니 너랑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눈 건 주로 우연한 상황, 우연한 자리에서였던 것 같아. 주말에 TV나 영화를 보면서 몇 마디 나눈 것, 책 제목을 보면서 옛날 이야기를 한 것, 엄마 어렸을 때 기억을 들려준 것이 그 계기가 되곤 했지.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사실 TV 보기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주말에는 가족들이랑 TV 보는 시간을 꼭 가졌던 것 같아.


TV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

 

너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랑 웹툰을 좋아하고 TV 드라마나 영화는 잘 보지 않지. 40년이 지났는데도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빨강머리 앤'도, '작은 아씨들'도 너한테는 그저 ‘그런 게 있었고 한번 봤다는’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으니까.


그래도 엄마가 좋아했던 영화나 드라마, 책을 통해 한번 이야기해보고 싶었어. 나중에 네가 커서 어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면 어쩌면 엄마가 언급한 책, 영화, 드라마를 보면서 ‘아 우리 엄마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했구나’라고 떠올려볼 수 있잖니.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생각했단다.


부끄럽지만 엄마 손을 잡고 과거로, 미래로, 그리고 엄마의 마음 속으로 여행을 떠나 보자.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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