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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라이 Mar 31. 2020

부모가 되어 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

그때는 중요하지 않았던 내 엄마, 아빠의 마음

네가 나중에 부모가 되어서 떠올리는 엄마의 모습이 조금은 덜 슬프고 덜 안타까운 것이기를 바래.


시간이 흘러 너는 고등학생이 되었어. 어느 날 TV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을 우연히 보게 됐는데 가수 '최진희'가 나왔지.

 

엄마랑 아빠는 같은 세대잖아. '최진희'를 알고는 있지만 한 번도 좋아하지는 않았어. 그런데 그 '올드'하다고 생각했던 최진희의 노래를 들으니 가슴 한 켠이 시려오는 거야. 엄마랑 아빠는 약속한 듯이 그날 내내 '사랑의 미로'를 흥얼거렸단다. 그리 오래 된 일은 아닌데 기억날지 모르겠다.

 

그런데 너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런 우리를 바라보다가 "대체 그 '미로'에서 언제 벗어날 거예요? 우리 하루 종일 그 노래 들어야 하는 거예요?"라고 물었지. 엄마, 아빠가 하고 있는 과거로의 여행에 대한 애정 어린 비웃음과 함께.

 

그때 엄마는 또 부모님과 마주쳤단다. 이번에는 외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늦은 밤에 혼자 <가요무대>를 보며 노래를 따라 부르던 기억이 나. 좁은 집에서 아이들이 깰까 봐 TV 볼륨을 최대한 낮춘 상태로, 하지만 잠결에 듣기에도 너무나 애절하게 따라 부르셨지. 어떤 날에는 가수 현철의 '봉숭아 연정'의 가사를 종이에 적어와서 보면서 따라 부르기도 했고.

 

그 당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관계는 최악이었어. 외할아버지 입장에서, 아내는 냉정하고 아이들은 다 이기적이었지(사실 모든 아이는 다 이기적일 수밖에 없어. 이건 당연하면서도 불편한 진실이야). 외할아버지가 허전한 마음을 달랠 공간은 거실 TV 앞 밖에 없었을 거야. 요즘에야 노래방이라도 있다지만.

 

그때 엄마는 고등학생이었어. 엄마에게도 팝송 가사를 적어서 따라 부른 경험이 있었지. 하지만 외할아버지 마음이 공감이 되기보다는 우스웠고 좀 놀랍게 생각했단다. 막연히 '어른도 저런 짓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심지어 노랫소리에 잠이 깨서 짜증이 나기도 했고.

 

네가 '사랑의 미로'를 따라 부르는 엄마, 아빠를 보며 어이없어했던 것처럼, 엄마도 외할아버지의 쓸쓸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거야.

 

언젠가는 너도 러브홀릭의 '버터플라이'랑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던 엄마, 아빠의 마음을 이해하겠지? 하지만 그건 아마 먼 훗날일 거야. 한 아이의 부모가 된 상태에서나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엄마는 생각한단다.

 

자식의 모습에서 예전의 자신의 모습을 보고 부모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거지.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고? 엄마가 장담하는데, 너도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날이 분명히 올 거야. 부모가 된다면 말이야.

 

어쩔 수 없단다. 그저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어쩌다 떠밀려서’ 어른이 된 것처럼 어쩌다 부모가 되는 게 인간의 숙명이거든(너무 심각한 단어를 썼나?)

 

어렸을 때는 어른이 되면 실수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능숙하게 잘 처리하게 될 줄 알았어. 어른과 아이, 부모와 자식 사이에 확실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는 줄 알았지.

 

모호한 것을 구분하면서 어른이 되어 간다고 생각했는데, 한동안 어른으로 살다 보니 모든 게 다시 모호해지고 뒤섞어버리고 말았지 뭐니. 그런데 어쩌면 이런 모호함을 견디는 게 진짜 어른인 것 같기도 해. 무슨 말인지 더 이해가 안 가겠지?

 

다만 한 가지 바램은 있어. 네가 나중에 부모가 되어서 떠올리는 엄마의 모습이 조금은 덜 슬프고 덜 안타까운 것이기를 바래.


엄마가 떠올렸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모습은 정말이지 가슴 아픈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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