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으로 살아서 오는 당신

<동주> - 이준익 감독

by 김진만
e5ac98341a74a29dbc50444c59432ca99479b2ee.jpg <동주>(DONGJU; The Portrait of A Poet, 2016)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대한 감정이 '존중'의 단계를 건너뛰어 곧바로 '존경'의 단계로 나아갈 때가 있다. 돌이켜보면 위인전 속 위인들을 접할 때가 그렇다. 특출난 재능, 굴곡많은 성장기, 고뇌와 시련의 청춘을 지나 누구와도 차별화되는 업적을 내놓기까지. 한시도 평범하지 않았던 인생의 순간들을 지나 위인이 된 그들의 삶을 책을 통해서 읽거나, 그들의 업적을 교과서에서 읽을 때 우리의 머릿속에는 이미 별처럼 상징으로 반짝이고 있다. 그들의 삶은 본받아야 할 교본이고, 그들의 업적은 토씨 하나하나까지도 쪼개어 나눠보고 분석해야 할 귀중한 자산이 된다. 그렇게 교본으로 자산으로 삼기 전에 응당 마음 속에 싹터야 할, 존중과 이해와 공감의 태도는 어느덧 신경쓰지 않으면서 말이다. 글쓴이의 의도가 어떻든 문학작품을 해부하듯 분석하길 즐겨하기도 하는 한국 교육의 실상이 미친 영향도 없지 않겠지만, 언제 위인의 삶이, 위인의 업적이 머리에 새겨지기 전에 가슴에 담겨진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면 때로는 교과서로 처음 접할 때보다 어른이 되어 문득문득 흩어진 글귀를 만날 때 더 큰 감흥을 얻기도 하니 말이다.

시인 윤동주도 어쩌면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학창시절 때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일제강점기 시인' 카테고리에 속한 인물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우리는 헤아릴 수도 없을 아픔을 안고 살았을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일이 이해해야 마땅했지만, 짧은 시간동안 파란만장한 문학사를 효과적으로 배우려면 그 많은 시인들을 '시의 형식'에 따라 손쉽게 분류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시들을 낳았을 그들의 곡절 많은 삶과 무수한 고민들은 '일제 강점기의 나라 잃은 슬픔' 같은 식의 워딩으로 단순명료화되었다. 그런 사이에 윤동주라는 이름도 다른 많은 동시대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있었던 사람보다는 상징처럼 남는 듯 했다. 그런데 영화 <동주>는 그처럼 마음에 제대로 담지도 못한 채 별이 되어 떠나가려던 한 젊은 시인을 기어코 영화가 상영되는 2시간 남짓이나마 땅에 발 딛게 한다. 그리고 그가 상징이 아니라 사람이었음을, 푸릇푸릇한 젊은 날을 여느 젊은이들처럼 기대하며 펼쳤던 청춘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그러니 그가 쓴 시들도, 더는 예전처럼 읽히지만 않고 보이기 시작한다.


658d76ac5b88916d813d29875617709ac8676044.jpg <동주>(DONGJU; The Portrait of A Poet, 2016)


윤동주(강하늘)와 송몽규(박정민)는 동갑내기 사촌지간으로 어린 시절부터 막역한 사이였다. 작은 동인지를 만들어 운영할 정도로 글이라는 공통된 관심사를 밀접하게 공유했던 둘. 동주에게는 시에 대한 남다른 열망이 있었고, 몽규에게는 시에 대한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동주는 자신의 속내와 세상으로부터 느낀 것들을 시로 조용히 표현했고, 몽규는 다른 형식을 빌리기 전에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길 즐겨 했다. 그래서 동주에게 몽규는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였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쉽게 다가가지 못할 어떤 높은 영역이 있는 존재였다. 같은 듯 다른 둘의 동행은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에 입학하면서도 이어진다. 척박한 일제 강점기에 맞서 본격적으로 저항에 나서는 몽규에게 시는 소극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동주에게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완연히 다른 방식 속에서도 둘은 시대의 아픔이 낳은 상처를 각자의 방식으로 토해내고 있었고, 그래서 둘은 대립하기보다 이해해주기를 택했다. 한편 창씨개명에 대한 강요가 날로 심해지고, 두 사람은 고심 끝에 일본으로의 유학을 택한다. 몽규는 일본에서도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이어가는 한편, 동주는 그나마 자유로울 것만 같았던 일본 유학생활에서 한인을 향한 심각한 억압을 겪게 되며 고뇌한다. 그렇게 한때 가까웠던 두 친구는 시대가 떠안기는 아픔 속에서 점점 다른 길을 향한다.

누군가를 상징화하는 건 오히려 쉽다. 그 사람의 삶에서 가장 극적인 (혹은 자극적인) 순간들만 끄집어내 몇 개의 단어로 요약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시인 윤동주도 그런 식으로 우리의 머리 속에 상징화되어 왔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 '시', '요절' 같은 단어들로 말이다. 그렇게 상징화된 사람을 내 곁에 사람으로 두는 건 오히려 더 까다로운 일이다. 그가 상징이 아닌 사람임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그의 드라마틱한 업적, 빛의 순간만 아니라 그림자의 순간까지 넓게 들여다 봐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존경'이라는 감정보다 더 낮을지라도 더 친밀할 '공감'이라는 감정을 얻게 된다. 이준익 감독의 최근 필모그래피가 그런 경향을 띄어 왔다. 그가 상업영화 복귀를 선언한 후 내놓은 <소원>, <사도>는 장르와 시대적 배경은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건 속 인물을 역사와 사회에 의해 정형화된 시선이 아닌 인간적인 태도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모두 사건이 얼마나 자극적이었는지에 정신이 팔리지 않고, 그 사건 안의 인물들을 걱정했다. 그의 다음 영화인 <동주>가 좋은 것도 그래서다. 이 영화는 윤동주라는 인물에게 '천재시인', '일제강점기를 살다 간 비운의 요절 시인' 같은 흔한 수식어를 붙이길 거부한다. 대신 우리가 잘 몰랐던, 그러나 너무나 밀접한 인물이었던 송몽규라는 인물을 그의 곁에 세워둔다. 그리고 그들을 유별난 천재시인이나 독립투사가 아닌 성장의 아픔을 겪는 청춘으로 바라보게 했다.


09b5f870b6c220c132ae1414a7fb56d503035f9a.jpg <동주>(DONGJU; The Portrait of A Poet, 2016)


젊은이로서 그들이 지닌 꿈과 생각은 누구나처럼 보편적이었을 것이나, 시대가 하수상했으므로 그 꿈과 생각은 유난히 아프게 흐트러진다. 그리고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보통의 우리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기에 그 스러짐이 더 가슴 아픈 '청춘'으로서의 윤동주와 송몽규의 초상이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보조자 역할로 존재하는 식의 관계가 아닌, 서로 가지고 있지 않은 면을 가지고 있는 보완적 관계에 놓여 있다. 윤동주는 세상에 나설 용기보다는 시에 대한 열정이 더 컸고, 송몽규는 시에 대한 열정보다는 세상에 나설 용기가 더 컸던 인물이었다. 대립적 관계도 동반자적 관계도 아니지만 다만 묵묵히 나란히 길을 걸어갈 뿐인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잘 알고 있던 윤동주가 오롯이 홀로 존재하는 위인만은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송몽규라는 미처 몰랐던 인물의 모습을 발견한다. 시대의 상징처럼 남을 수도 있었을 그들은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서로의 영향을 받은 보통의 젊은이들로 우리 앞에 살아서 온다.

이준익 감독은 <동주>를 흑백으로 만들게 된 이유가 제작비 때문이라고 웃음을 띠며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 영화가 흑백영화로 만들어짐으로써 관객이 느끼게 되는 효과는 그 이상이다. 무엇보다 영화가 전기영화의 드라마틱함이 아닌 청춘영화의 차분함을 띠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윤동주라는 인물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 익히 알고 있지만, 영화는 그가 겪게 될 시대의 가혹한 격랑으로 들어서는 데 굳이 서두르지 않는다. 윤동주와 그의 친구 송몽규가 거쳐온 청춘의 모든 순간들 - 빛나거나, 쓸쓸하거나, 애틋하거나, 슬프거나 - 에 차분하게 귀기울인다. 어둔 불빛 아래에서 꿈을 향해 발돋움을 시작하던 설레는 순간, 풋풋하게 피어나는 감정이 수줍게 빛을 띄우던 순간, 꿈이 시대의 벽에 부딪혔음을 알고 멈칫하게 되던 순간, 시대의 강요에 방황하던 순간, 더욱 커진 폭압 앞에 무력하게 무릎꿇던 순간까지. 그들의 청춘에 생채기는 어느 한 순간 들이닥치기보다 시간을 들여 켜켜이 쌓여간다. 시대극을 볼 때면 으레 관심이 가게 되는 화면의 색감이나 질감, 조명이나 미술 같은 외적 요소보다는 그 안에서 역동하는 인물들의 감정과 이야기에 더 잘 몰입할 수 있게 되는 효과를 얻게 된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이 흑백으로 바뀌게 되니, 강하지만 짧게 시선을 사로잡는 것보다는 오래 들여다 봐야 느껴지는 것들에 더 눈을 두게 된달까.


798fd7a03779c985286a82afd0bba4aaca73ef15.jpg <동주>(DONGJU; The Portrait of A Poet, 2016)


그리고 이렇게 차분하게 쌓여가는 청춘의 풍경 위에 윤동주의 시가 그림처럼 흘러 나온다. 강하늘 배우의 목소리를 빌어 영화 전반에 걸쳐 흘러 나오는 윤동주의 시는 낭송된다기보다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 말, 윤동주의 독백처럼 느껴진다. 새롭게 시작되는 꿈의 여정으로 나아갈 때 ('새로운 길'), 사랑으로 가슴 설레게 했던 청년기 ('별 헤는 밤'), 일본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한 후 자괴감에 빠져 있을 때 ('참회록'), 후쿠오카 형무소에서의 고통스러운 나날로 마음이 점차 황폐해져만 갈 때 ('서시'), 극도의 무기력함에 좌절하다가 마침내 자신을 부여잡기로 결심할 때 ('쉽게 씌여진 시'). 윤동주의 삶을 수놓는 많은 순간들 위로 그의 시들이 OST처럼 읊어진다. 그렇게 흘러나오는 그의 시들을 듣고 있자면 그 시들은 문학 교과서 속에 박제된 제품처럼 툭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 그가 살면서 겪었을 수많은 내적 갈등과 투쟁의 결과로서 빚어지는 것으로 비로소 다가온다. 하늘에 붕 떠 있는 채로 단어 하나를 어렵게 붙잡아 소화하려던 그 시들이 이제야 땅에 발을 딛고 그 온전한 모습 그대로 걸어오는 느낌이다.

영화는 윤동주가 이처럼 많은 시들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내적 투쟁이 실은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꿈을 꾼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린 세상, 꿈을 포기하고 현실과 맞서 상처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웅크려야만 했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의 꿈이 나날이 커져가면서도 처한 세상과 만나는 사람의 영향을 부단히도 받을 수 밖에 없는 청춘의 시간. 민족적 정체성을 버리길 강요하는 일제 강점기 시대와 세상을 향해 행동하는 것이 꿈이기도 했던 송몽규는, 어쩌면 극명히 다른 의미의 부끄러움을 윤동주에게 안겨주었을지 모른다. 하나는 무거운 짐으로서, 하나는 세상을 응시하는 눈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라는 대사처럼, 윤동주와 송몽규가 자신들의 꿈을 꺾는 시대 앞에서 느낀 부끄러움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을 테다. 그 부끄러움 앞에서 자신을 깨닫고, 무너져 가는 젊음 속에서도 눈빛만은 빛을 내며, 좌절의 끝에서 스스로에게 '최초의 악수'를 건네던 그들의 모습은, 외려 무고한 그들을 부끄럽게 만든 시대를 부끄럽게 한다. 개인을 무뎌지게 하고 때로는 무너뜨리는 시대의 속성은 여전해서, 부끄러움의 감정은 곧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로 전해진다.


f7e3e3ceea43e37e0b5cc7aeb7342828cd97fdef.jpg <동주>(DONGJU; The Portrait of A Poet, 2016)


상징 안에 살아숨쉬는 사람의 기운을 되짚는 이준익 감독의 통찰력, 문학을 영화에 음악처럼 녹여내는 신연식 감독의 감수성에 강하늘-박정민 배우의 젊고도 사려깊은 연기가 더해지면서, 윤동주가 전하는 '부끄러움의 아름다움'은 시간을 달려서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었다. 윤동주를 연기한 강하늘 배우는 연극과 뮤지컬 무대에서 갈고 닦았을 정갈하고 명료한 톤의 연기에 섬세한 감정표현을 얹으며, 내색할 수 없었던 인물의 요동치는 심리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이처럼 정돈된 연기가 반영되어 영화 속에서 시를 읊는 그의 목소리는 그 자체를 음악이라 해도 좋다. 한편 송몽규를 연기한 박정민 배우는 쾌활하고도 진중한 표현과 그 속에 애써 몸을 숨긴 흔들리는 마음을 힘있게 그려내며 강하늘 배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관객을 매료시킨다. 윤동주에게 세상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지만 그만큼 스스로 많은 생채기를 감내해야 했던 송몽규의 모습은, 박정민 배우의 연기에 힘입어 처음 보는 인물임에도 생생하게 관객 앞으로 다가온다. 인물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반으로 한 이 두 배우의 연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을 착실히 힘있게 끌어올리며 시대의 비애만으론 정의할 수 없는, 빛나는 청춘의 순간과 어우러지는 기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동주>가 보통의 전기영화였다면 윤동주의 삶은 또 한번 진열대에 고이 모셔져 낭독되어야 할 교재처럼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단했던 위인이 아닌 보통의 우리들처럼 꿈을 꾸는 청춘, 다만 척박한 시대 위에서 꿈꾸는 것이 곧 투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청춘의 이야기가 되면서 윤동주의 삶은 교재 안에 머물지 않고 70여년의 세월을 건너 지금의 우리에게 걸어와 말을 건넨다. 시대를 향한 부끄러움과 나를 향한 절박함으로부터 힘겹게 흘러나오는 '시'라는 단어를 들으니, 내가 서 있는 부끄러운 세상과 내가 품어야 할 부끄러움을 생각해 보게 된다. "너는 지금 네 젊음 위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질문에, 이내 시대 속의 청춘은 어떤 존재가 되는지 고민하게 된다. 이 영화 덕분에, 윤동주와 송몽규의 지나간 나날이 지금의 나와 함께 걷는 순간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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