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본분, 언론영화의 본분

<스포트라이트> - 토머스 맥카시 감독

by 김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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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언론은 사라지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매개를 빌려 수많은 온라인 매체가 생겨났고 1인 미디어도 넘쳐나는 시대에 웬말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언론은 분명히 사라지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언론은 모르고 있고 숨겨져 있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사실 혹은 진실을 전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띄고 있다. 그리고 이 의미는 언론이 사실과 진실을 스스로 캐내고 선별하여 전파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다수의 언론은 이런 대중의 기대를 망각한 채, 어떤 곳으로부터 날아온 자료를 일방적으로 받아써서 알리거나, 검색의 덫에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걸려들게 하고자 자극적인 제목과 연관성 없는 키워드로 대중으로 낚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확성기, 낚싯대로서의 기능에 충실하고 보지 못했지만 존재하는 진실을 추적하는 현미경으로서의 기능은 점점 잊어가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탐사보도'라는 언론의 고유한 활동마저 희미해지고 있는 건 물론이다.


탐사보도의 사전적 정의는 '범죄, 정치 부패, 기업 비리 등 특정 주제를 기자가 직접 조사하여 캐내는 형태의 저널리즘'이다. 정보원을 찾고 연구하여 보도하기까지 수 개월에서 수 년까지 소요되는 활동이지만 수많은 소식들이 범람하는 사회에서 이슈를 선별하고 전파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언론의 기능이 가장 빛을 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기능이 성공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어야 하고, 보도를 위해 어떤 곳에든 파고들어 정보를 캘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야 하며, 여론을 형성하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본적인 영향력도 갖춰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언론에 이 활동을 보장할 만한 시간과 자유가 있는가.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적은 매체들이 오히려 탐사보도를 위한 시간과 자유를 얻고자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으며, 영향력이 있다는 매체는 시간과 자유를 소극적으로 요구한 채 남들이 전하는 정보를 타이밍에 맞춰 똑같이 전하는 데에 만족하고 있다. (지상파 3사의 뉴스에서는 매일 같은 주제의 기사 수 가지가 일제히 전파를 탄다) 제 기능은 손을 놓은 채 부유하는 언론들 사이에서 진짜 언론의 의미는 빛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번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의 영예를 안은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이렇게 점점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고 있는 진짜 언론의 의미에 다시금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바다 건너 어느 나라의 진기한 사연을 비추는 데서 머무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의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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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의 유력지 '보스턴 글로브'에서 탐사보도를 담당하고 있는 심층취재팀, 이른바 '스포트라이트' 팀은 새로운 편집장 배런(리브 슈라이버)의 부임과 함께 새로운 취재 아이템을 부여받는다. 바로 수십년 간 보스턴 지역에서 아동 성추문을 일으켜 온 가톨릭 교회의 한 신부를 조사하라는 것. 스포트라이트 팀장 로비(마이클 키튼)을 필두로 마이크(마크 러팔로), 사샤(레이첼 맥애덤스), 맷(브라이언 다시 제임스) 등 스포트라이트 팀은 취재에 착수하는데, 처음엔 신부 한 명의 범죄에 대한 것으로 생각했던 취재 내용은 다양한 취재원들을 접하면서 그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간다. 사건을 오랜 시간 추적해오며 피해자들의 집단 소송을 준비해 오던 변호사 미첼(스탠리 투치), 가톨릭 교회 신부들에 의한 아동 성추행 피해자들의 모임을 만들어 온 피해자, 그리고 사건을 저지른 신부들을 상담해 온 의료센터 직원까지. 이 모든 사람들은 스포트라이트 팀이 맞닥뜨린 이 사건이 한 개인에 의해 한 지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전역, 어쩌면 전세계적 규모로 일어나고 있을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사건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가톨릭 신도들의 비율이 절대적인 미국 땅에서 사건을 무마하기 위한 가톨릭 교구의 영향력은 수시로 발휘되고, 주변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까지 더해지면서 스포트라이트 팀은 진실을 향한 추적은 외롭고 불투명해져만 간다.


<스포트라이트>를 보면서 '본분'이라는 단어가 계속 떠올랐다. 영화 속 기자들도, 영화 자체도 제 본분을 지킬 줄 안다. 이 영화는 단순히 '기자가 주인공인 영화'가 아니라 '기자에 관한 영화'다. 기자라는 직업군이 관객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진실을 추구하는 영웅적인 투사가 진실을 극적으로 밝혀내는 쾌감을 그리고자 이용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기자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머릿속에서 그리는, 수첩을 들고서 분주히 뛰어다니고 타자를 능숙하게 두들기면서 전화를 받는 식의 이미지보다도 훨씬 구체적이다. 다양한 분야의 취재원을 찾아가고,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한 끝에 인터뷰를 얻어내고, 그렇게 수집된 인터뷰들로부터 공통된 사실을 발견하고, 그 사실이 개인의 특수한 사례가 아닌 보편적인 사회 문제임을 입증하기 위해 더 많은 근거자료들을 파고들며, 그렇게 갈무리된 진실을 언제 얼만큼 대중 앞에 공개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련의 과정이 상세히 묘사된다. 깔끔하고 멋지면서도 녹록치만은 않은 과정들이다. 드러나는 추악한 진실 앞에서 기자들은 분노의 감정을 섣불리 드러내기보다, 더 많은 증거자료들을 수집하며 자신들이 분노한 진실을 입증할 수 있는 길을 분주히 찾는다. 남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진실을 찾아냈다고 해서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고, 진실을 피하는 세상과 맞서 싸우는 투사로 자신들을 미화시키지도 않는다. 한쪽에서 투사가 되어 세상에 분노하려는 순간, 오히려 다른 한쪽에서는 과연 그 분노로부터 그들 자신도 떳떳한지, 분노를 표출할 자격이 있는지 물으며 고삐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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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기자의 역할과 책무를 관객들이 온전히 공감할 수 있도록, 철저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영화 속 기자들이 자신들이 기자라는 사실을 잠시도 잊지 않듯이, 영화 또한 자신이 '기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을 한 순간도 잊지 않는다. '가톨릭 사제의 아동 성추행'이라는 소재의 자극성에 일절 기대지 않은 채, 사건의 진상은 오로지 피해자의 진술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기자들이 직접 보지도 않은 과거의 사건을 낯뜨겁게 재현하는 일 따위 없다. 단지 취재원의 답변에서 사실을 파악하고, 취재원의 표정과 말투에서 나타나는 극도의 무력감과 절망감에서 그 사건이 미친 악마적인 영향력을 얼추 가늠할 뿐이다. 질타하는 대상을 재차 소비하는 것과도 같은 말초적 재현보다도, '성적 학대를 넘어선 영적 학대',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처음 깨닫게 된 첫경험이 그때였다는 것에 대한 수치'와 같은 명료하고 섬세하며 날카로운 표현들이 사건의 엄중함을 한층 더 실감케 한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의 크기와 이를 파헤치는 언론의 노력을 힘있게 따라가면서도,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고통이 전시되거나 소모되지 않게 하려는 배려를 보여준다.


한시도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 영화에서 흘러넘치는 단 하나의 정서가 있다면 그것은 '진실을 향한 집요함'이다. 인간적이지 않게 보일 수 있으나, 실은 그 반대다. 공정하고 투철한 직업의식에서 비롯된 이 정서는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도리를 눈물이나 감정에 대한 호소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좇음으로써 휴머니즘으로 발현된다. (투철한 직업의식이 어떻게 휴머니즘으로 귀결될 수 있는지는 이미 작년에 <스파이 브릿지>라는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 자신들이 발견한 진실이 누가 봐도 명백한 진실이 될 수 있도록, 사건에 대한 즉각적인 분노조차도 경계한다.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현실 앞에서 기자의 본능은 분노보다도 증명이다. 분노 어린 감정으로 여론을 형성하는 대신, 반박불가의 진실에 도달할 때까지 증명의 길을 정진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의 사회고발극들로부터 접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진실에 대한 태도'이다. 충격적인 진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세상에 알려야만 하는 위치에 섰을 때, 어쩌면 가장 무서운 것은 외부의 위협보다도 내면의 감정일 수도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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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스포트라이트 팀이 추적하는 가톨릭 교구, 또는 사제의 모습은 영화 속에서 의외로 적대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물론 교구와 사제들이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 시스템적으로 저지르는 비인간적인 만행은 치가 떨릴 일이지만, 그 사실들은 기자들의 취재에 의해 팩트로서 나타날 뿐 그들이 자신들의 언행으로 악의적인 성품을 직접 드러내진 않는다. 하나의 제도를 뒤흔들 진실을 폭로함에 있어서 으레 나타나기 마련인 외부의 물리적 위협 같은 것도 영화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에 스포트라이트 팀과 연을 맺고 있던 주변 사람들의 강요 섞인 우려, 나아가 팀 내부에서의 갈등 같은 요소들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추적의 대상이 주는 위협보다 그 파장을 걱정하는 제3자들의 시선, 과거 스스로도 안일한 태도를 취해왔던 자신들의 진심에 대한 의심이 더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외부 검열보다도 무서운 자기 검열의 문제를 드러내면서, <스포트라이트>는 언론의 용기와 진가가 진실을 밝히는 행위 자체가 아닌, 밝혀진 진실 앞에서 취하는 태도로부터 비롯됨을 이야기한다. 자기 검열의 대상은 진실 앞에 선 자신의 태도여야지 진실을 세상에 밝힐지 말지가 아닌 것이다. 이처럼 <스포트라이트>는 세상에 얼마나 추악한 진실들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단지 보여주기 위한 영화가 아니라, 이렇게 산재해 있는 추악한 진실들 앞에서 깨어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는 영화로서 자리한다.


영화는 스포트라이트 팀이 폭로하는 사건이 얼마나 끔찍하고 피해자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어왔는지 같은 내용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반인륜적 사건이 단순히 대중의 흥미를 뜨겁게 이끌고 자극적으로 소비되기만을 바라지 않는다면, 가십처럼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지 않고 대중의 의식과 행동을 바꾸고 나아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관심에서 멈추어서도 안된다. 대신 영화는 모습을 드러낸 진실을 객관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면 얼마나 넓은 시야를 확보해야 하는지, 이 일이 자극 소비가 아닌 정의 구현이 되려면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그러면서도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단호하게 진실을 밝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구하는 데 몰두한다. 대중의 관심과 시선을 소모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기 일쑤인 현대의 언론 속에서, <스포트라이트>는 대중의 관심과 시선을 소모하지 않고 재생산하며, 나아가 관심을 의식으로, 의식을 행동으로 진화시키는 것이 진짜 언론의 역할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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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영화 속에서 만나는 스포트라이트 팀은 영웅이기보다는 성실하고 열정적인 팀으로 그려진다. 자신들의 업적을 내세우며 으스대기보다 그림자에 파묻혔던 진실에 세상의 관심이 향하도록 스포트라이틀르 힘겹게 옮기는 그들이지만, 그만큼 믿을 수 있고 총명하며 인간적인 길라잡이가 된다. 이렇게 매력적인 취재 팀이 영화 속에서 구현된 데에는 누구 하나 튀지 않지만 모두가 특별한 개성과 중요한 의미를 던지는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 크게 한 몫한다. 누구는 다혈질이고, 누구는 냉철하며, 누구는 따뜻한 것과 같이 성격은 제각각이지만, '진실 추구'라는 공통된 동력에 힘입어 서로 독려하고 갈등하다 화해하고 성취하는 팀의 모습이 차분하면서도 가슴 벅차게 살아난다. 마크 러팔로, 마이클 키튼, 레이첼 맥애덤스, 리브 슈라이버, 존 슬래터리, 브라이언 다시 제임스, 스탠리 투치 등 견고한 연기력을 지닌 배우들이 직업의식과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각각의 개성과 함께 할 때의 조화를 보여주는 모습은 보기에 무척 황홀하다. 믿음직한 캐릭터들이 믿음직한 연기로 형상화되는 것을 보는 일이 이렇게 즐거운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스포트라이트>는 자신이 결코 젠체하는 무용담 같은 영화가 아니라는 걸 마지막까지도 입증한다. 무용담은 활약에 따른 성취와 업적으로 끝맺음되는 이야기이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보스턴 글로브의 스포트라이트 팀의 이러한 노력이 결국 결과가 아닌 시작임을 느끼게 된다. 언론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세상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줌으로써 우리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게 하는 일을 한다. 하지만 이 스포트라이트는 진실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일 뿐, 그 진실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진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손을 내미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그래야 진실이 다시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기지 않도록 세상 한 가운데로 끊임없이 끄집어낼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처럼 <스포트라이트>는 언론의 본분을 너무도 명료하게 보여줌으로써, 마침내는 그 언론을 접하는 대중의 본분까지도 깨닫게 한다. 그리고 대중이 단지 몰아가는 대로 몰려주는 무리들이 아니라 수천만, 수억 개의 눈을 지닌 민주권력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때 영화는 더 이상 언론인이라는 특수한 직업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불특정 다수의 우리 모두를 깨우는 영화가 된다. 자극의 장막을 걷고 진실의 무게와 책임에 다가감으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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