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 - 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
어디선가 뺑소니 사고가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피해자는 큰 부상을 입고 길에 쓰러져 있는 가운데, 피해자를 친 차량은 어디론가 도주해 버렸다. 이 사고의 현장에는 크게 두 가지 역할을 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사고를 일으키고 달아난 가해자를 추적할 사람과 쓰러진 피해자를 보살필 사람이다. 만약 사고 현장에 목격자가 한 명 밖에 없어서 이 두 역할의 순서를 따져야 한다면 당연히 쓰러진 피해자를 보살피는 것이 먼저다. 그 어떤 정의 구현도 일단 사람이 살아야 의미 있는 일이니까. 그런데 지금의 미디어와 그 미디어를 따르는 우리의 시선들 대부분은 쓰러진 피해자를 보살피는 이 역할보다 달아난 가해자를 추적하는 것에 더 몰두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가해자가 반드시 잡아야 할 잔악무도한 범죄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피해자가 감추고 싶어하는 상처를 굳이 드러내기도 한다. 미디어의 시선도, 대중의 시선도 난폭하게 날뛰며 나 잡아봐라 하고 있는 가해자로 바삐 향하고 있어서, 그 뒤에서 흘러나오는 피해자의 신음은 어느새 공중으로 흩어지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됨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은 누군가를 징벌할 때가 아닌 누군가를 구할 때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때로는 그 두 길이 하나인 경우도 있지만, 만약 다른 길이라 하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는 이미 명백한 것이다. 영화 <룸>이 극악무도한 범죄로부터 태어난 이야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 바로 이것, 사람이 사람을 구한다는 것의 위대함이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다는 말도 있지만, 구함이 구함을 낳는다는 말도 성립 가능하다는 것을 가슴 벅차게 보여준다. 사람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짓밟을 수 있는 존재도 사람이지만, 그렇게 짓밟힌 몸과 마음을 다시 일으켜주고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존재 또한 사람임을 실감하게 된다. 사람이라는 게 참 얼마나 끔찍하고도 숭고한 피조물인가, 뭐라고 순식간에 단정할 수 없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감동이 치밀어 오른다.
이제 막 5살이 된 소년 잭(제이콥 트렘블레이)은 엄마 조이(브리 라슨)와 함께 평생 가로세로 각 3.5m짜리 방 안을 벗어나 본 적 없다. 매주 일요일마다 장을 봐 오는 올드 닉(션 브리저스)이라는 아저씨가 먹을거리 등 각종 생필품을 사다주면 모자는 그걸로 오직 방 안에서만 이뤄지는 일상을 이어간다. 17세 때 여기에 갇힌 조이에게 이 세월은 분명 '감금'이었겠지만, 아들 잭에게만은 감금이 아닌 생활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고, 다행히 잭은 구김살 없는 착하고 밝은 소년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5살이 된 잭도 알 건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때, 조이는 잭과 방을 탈출하기 위한 작전을 꾸민다. 우여곡절 끝에 힘겹게 방을 탈출한 조이와 잭은 더 이상 악마 같은 남자의 손아귀 속에서 살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느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7년간 멈춰 있었던 조이의 시간과 상관없이 흘러간 세상의 시간, 그리고 조이와 잭을 향한 세상의 탐탁치 않은 시선이 또 다른 감옥이 되어 조이를 옥죄어 오기 시작한다. 잭 역시 그 좁은 방 안에 있을 때는 늘 함께였고 늘 든든한 존재였던 엄마가 점점 멀어지고 약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영화 <룸>의 원작 소설은 오스트리아에서 실제로 있었던 훨씬 더 끔찍한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러나 소설과 영화가 사건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하면 바탕이 된 실제 사건에 대해 새삼 끄집어 내는 것조차 죄가 될 것만 같아 더 이야기하지 않겠다. 소설의 태도를 그대로 이어받은 (원작소설을 쓴 엠마 도나휴가 영화도 각색했다.) 영화 <룸>은 사건의 진상이 얼마나 끔찍한지 따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5살 소년 잭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그 아이가 알아서는 안될 사건의 잔혹한 단면, 그 근처로도 눈을 돌리지 않는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전쟁터 한복판을 가로질러 가는 한 엄마가 품에 안긴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엄마 눈만 쳐다보고 있으라'고 타이르듯, 영화는 아이의 시선을 빌려서 심지어 관객들까지도 참혹한 사건 그 자체로부터 최대한 먼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짐작은 허락할지라도 목격은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그 지옥 같은 공간 속에서도 끝내 피어나는 삶이라는 꽃이다. 그 꽃을 피우기 위해 생을 향한 끈을 놓지 않은 엄마라는 존재의 힘과, 그 힘으로 인해 단 한 줌의 어둠도 삼키지 않고 보석처럼 자라난 아이의 모습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모자의 '피해'가 아닌 '일상'을 보여준다. 아이는 방 안의 모든 물건들에게 친구처럼 인사를 하고, 엄마는 어린 아이의 건강을 위해 없는 살림 속에서도 먹을거리를 꼬박꼬박 챙기며 공간의 한계에 상관없이 아이가 뛰놀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준다. 태어나 만난 세상이라곤 이 좁은 방 밖에 없는 아이는 실제하는 것과 TV 너머로만 존재하는 실재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며 세상의 요소들을 배워가고, 이미 바깥 세상을 알고 있는 엄마도 그런 아이의 모습을 부정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지켜본다. 우리가 만나는 것은 엄연한 범죄의 공간에서 고통받는 모자라기보다, 일상을 이어가는 모자다. 그렇다고 이것이 '범죄를 당하는 와중에도 먹고 살 만한 모자'라는 식으로 범죄를 두둔하는 시선인 건 죽었다깨도 아니다. 오히려 범죄의 자극성에 가려 그 안에 존재하고 있는 상처 입은 이들을 제대로 보지 못해 온 우리들을 향한 소리 없는 일갈과도 같다. 여기에도 사람이 있다고, 앞으로의 삶을 바라며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외침과도 같다. 우리가 정작 봐야 할 것은 범죄의 참상 너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동하고 있는 인간의 삶이라는 꾸짖음과도 같다. '저 방 안에서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끔찍했을까'라는, 이런 류의 범죄에 대한 보도를 접하며 생기는 보통의 걱정마저도 어쩌면 그 속에서 자신들의 세상을 위해 부단히 버티고 싸웠을 모자의 의지를 못본 체 한 편견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렇듯 영화는 극악무도한 범죄에 대한 단죄의 태도보다 그 속에서 7년의 세월을 감내한 엄마와 아들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만을 줄곧 유지한다. 그리고 이런 영화의 시선에 따르면 이 모자에게 위험한 것은 비단 그들이 7년동안 갇혀 있었던 (혹은 살아왔던) 방만이 아니다. 세상이 '충격적인 사건 속 화제의 인물'이 된 그들을 폭력적이고 불편한 시선에 둘러싸이게 한 채로 그들을 또 다시 가둔다. 세상 밖으로 탈출하기 전 엄마 조이는 아들 잭에게 "세상이 마음에 들 것"이라고 말하지만, 생각만큼 세상은 그들에게 마음에 드는 곳이 아니다. 생지옥과 같은 환경에 둘러싸인 가운데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은 모자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빛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 이후의 일이 아닌 이전의 일에만 집중되어 있다. 조이에게는 '범죄자의 자식을 기어코 낳아 직접 기르며 아이에게도 어두운 유년기를 부여한 이해할 수 없는 엄마'라는, 잭에게는 '잔악한 범죄의 산물'이라는 꼬리표가 붙기 시작한다. 가족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닌 불쾌하고 불편한 시선을 감내하고, 가혹한 호기심에 정신이 주저앉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7년 간 알 도리가 없었던, 자신들의 부재로 인해 세상에 남겨진 흔적들을 비로소 발견하기도 한다. 자신들의 부재에도 멀쩡히 흘러 온 세상이 야속해지려는 순간, 단지 자신들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의 삶이 이미 휘청거려 왔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어느 순간 방을 탈출해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더 큰 방으로 옮겨 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적은 여전히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방 안에서 엄마와 아들이 스스로 피워낸 기적의 싹이 세상을 만나면서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엄마 조이는 방 안에서 잭에게 그 어떤 어둠의 씨앗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기적의 싹을 틔우는 데 성공했다. 가로 3.5m x 세로 3.5m 짜리 방은 그 싹이 충분히 자랄 수 없는 공간이었겠지만, 세상은 그와 다른 곳이다. 우주로 나아가지 않는 이상 벗어날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은 세상이란 곳은 모자에게 생각지 못한 시련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만나고 결심하는 만큼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곳이기도 하다. 엄마 밖에 몰랐던 잭은 엄마의 엄마인 할머니, 할머니의 친한 친구인 레오 아저씨 등 자신에게 사랑을 주는 새로운 존재들을 만나면서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에서 '사랑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로 성장해 간다. 자신이 받는 그 사랑을 바탕으로, 누군가에게 자신이 사랑을 줄 수도 있음을 깨달아 간다. 방 안에서는 한없이 강인했던 엄마였지만 세상 밖으로 나선 순간 다시 소녀로 돌아간 듯 심적 고통을 겪게 되는 조이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잭에게 주었던 사랑만큼, 자신 역시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음을 믿게 된다. 대견한 것은 이러한 엄마와 아들의 깨달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발휘한 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시작은 굳건한 모성애였지만, <룸>은 단지 모성애에 대한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어머니라는 존재에서 시작된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지닌 본연의 힘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간다. 제한된 공간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다잡아왔던 엄마와 그 덕분에 여느 아이들처럼 밝고 맑게 자랄 수 있었던 아들의 이야기는 흡사 동화와도 같았겠지만, 그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비로소 애써 감춰왔던 각자의 상처와 아픔이 드러나며 현실의 이야기가 된다. 엄마 조이와 아들 잭은 물론 딸의 실종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지고 만 가족까지, 그 사건으로 인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생채기를 안고 있음을 그제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생지옥 속에서도 죽지 않도록 모자가 고이 간직해 왔던 희망의 빛이 넓은 파장을 이루며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엄마가 아들에게, 아들이 다시 엄마에게, 나아가 모든 가족에게 말이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아이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안간힘을 썼던 엄마라는 이름의 한 소녀는, 결국 세상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아는 꽃같은 아이를 키워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꽃같은 아이는 아픔을 함께 보듬을 줄 알고 돋아나는 새살에 기뻐할 줄 알면서, 다시 행복을 꿈꿀 수 있는 가족을 만들어낸다. 누가 누구를 감히 불쌍히 여기는가 싶을 만큼, 이들은 스스로로부터 만들어낸 빛으로 마침내 세상을 비추는 거룩한 사람들이 이미 되어 있다. 보복하고 단죄하는 모습이 아닌, 치유하고 구원하는 모습이 인간의 가치를 만든다는 걸 깨닫게 된다. 만약 사건과 범인의 잔악함이나 모자가 겪은 가혹한 피해에만 집중했다면 결코 만날 수 없었을 유례 없는 감동이다.
이 유례 없는 감동은 엄마와 아들을 연기한 두 배우의 유례 없는 역량과 호흡이 없었다면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엄마 조이 역의 브리 라슨은 '학대 피해자'로서 캐릭터가 보여줄 수 있는 전형성을 완전히 탈피하며, 정신적 붕괴를 골백번도 더 겪을텐데도 아들을 위해 주저앉지 않으려는 엄마의 모습과 다시 만난 세상 앞에서 다시 소녀처럼 흔들리는 딸의 모습을 생생하게 오간다. '잘 하는 연기'가 보여주기 마련인 정형화된 스타일이나 분위기에 의존하지 않고 정서의 미세한 떨림과 격렬한 파장을 투명한 감정선에 실어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그녀의 연기는, 근래 할리우드 영화에서 만난 가장 총명하고도 신선한 연기 중 하나다. 한편 아들 잭 역을 맡은 아역배우 제이콥 트렘블레이의 연기는 과장 조금 보태 숨이 멎을 정도로 빼어나다. 엄마를 향한 순수한 사랑과 철없는 원망을 여느 아이들처럼 똘망똘망하게 그려내면서도, 5년 만에 비로소 새로운 세상을 만난 아이의 놀라움과 성장의 과정을 침착하게 표현하며 어른 관객들의 가슴을 저미게 만든다. 그가 이번 아카데미 후보에 오르지 못한 건 순전히 나이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어린 배우의 연기는 시종일관 관객을 웃게 하고 울게 하며 가슴 찢어지게 한다. 너무 능숙해서 애어른 같이 느껴지는 연기가 아니라, 손대면 때가 탈까 두려울 만큼 맑은 연기다. 이 두 배우의 연기는 최근 몇년 간 영화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남녀'라 일컬어도 좋다.
사람의 몸과 마음을 가장 처절하게 짓밟을 수 있는 존재가 사람이지만, 그렇게 짓밟힌 사람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구할 수 있는 존재 또한 사람이다. 인간의 가장 어두운 모습으로 시작해 인간의 가장 찬란한 모습으로 마무리되는 <룸>은 이처럼 절망적이고도 위대한 인간의 양면 중 파괴 다음에 치유와 구원을 이야기함으로써 우리가 왜 세상과 사람을 포기하면 안되는지에 대한 증거를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들을 옭아매는 한편 버티는 공간이기도 했던 방에게 마침내 작별인사를 건네고 세상으로 발을 딛는 엄마와 아들의 모습을 통해, 이들이 보여주는 치유와 구원이 이들만의 특수한 능력이 아니라 성장하며 관계를 형성하는 이라면 누구나 지닐 수 있는 본능과도 같은 가치임을 이야기한다. 이로 인해 이 모자의 이야기가 그들만의 미담이 아닌 나와 모든 사람들이 보여줄 가능성까지 껴안고 있음을 알게 되기에, 감동의 파장은 쉽게 잦아들지 않는다. 여러 영화들을 보다 보면 이런 영화를 만난다는 게 참 축복이다 싶은 영화가 있는데, 이 영화 <룸>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 영화는 축복과도 같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