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4등> - 정지우 감독

by 김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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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짧은 시간동안에 이뤄진 많은 노력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뤘기 때문인지, 우리들 대다수에게 중요시되는 것은 아주 당연하게도 과정이 아닌 결과가 되어 버렸다. 어린 시절 각자의 꿈을 말할 때에도 개성과 독창성이 돋보이는 '온리원'(Only One)보다도 '넘버원'(No.1)을 곧잘 앞세우며 개성과 독창성 보다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가뜩이나 사회에 나가면 질리도록 경험할 경쟁사회를 지금의 아이들은 너무 어린 나이에 이미 익숙하게 경험하고 있다. 하물며 순위를 매기는 것이 기본적인 룰인 스포츠 경기에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국내 정상급, 세계 정상급 선수를 육성한다는 명목으로 스포츠 선수들의 공동체 대부분에 그 어느 곳보다도 엄격한 규율과 지도 체계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스포츠에 문외한이라는 이들도 모를 바가 아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언론 매체를 통해 일상 구석구석까지 혹독한 스포츠 조직사회의 민낯이 너무 자주 드러나 버렸다.

이런 뉴스를 보면서 우리들 대다수는 저렇게 살벌한 공동체 사회에서 어떻게 제정신으로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할 수 있겠으나, 사실 그 뉴스는 먼나라 토픽감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다. 결과를 위해 과정을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의식이 내면화된 한국 사회의 그저 극단적인 단면일 뿐이며, 정도만 다를 뿐 우리들 대다수도 그 영향력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사례로서 뉴스에 등장하는 하나의 사건에 대한 문제가 아닌,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관습적인 시스템의 문제라는 얘기다. 스포츠 지도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력 문제를 다룬 영화 <4등>이 주시하는 것이 바로 이 시스템의 문제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제작으로 만들어져 기본적으론 '인권영화'의 틀을 하고 있지만, <4등>은 인권문제에서 두드러지기 마련인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에서 벗어나 그들을 그러한 모습으로 만든 사회 체계로 시선을 넓힌다. 그럼으로써 결국은 더욱 포괄적이고 포용적인 메시지를 지닌 '사회극'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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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하는 게 좋아서 수영선수의 길을 가기 시작한 초등학생 준호(유재상). 그러나 대회만 나가면 메달권인 3위도 아닌 4등 성적을 받아들기 일쑤라 엄마(이항나)의 혈압을 돋운다. 기자인 아빠(최무성)는 아들이 좋아서 하면 그만이지 뭘 더 바라냐는 태도인데 반해, 수영으로 성공해야 아들의 앞길이 핀다고 굳게 믿는 엄마에게는 1등이 너무나 절실하다. 엄마는 각고의 노력 끝에 새로운 수영 코치 광수(박해준)를 소개받는데, 이 사람이 실은 보통 괴짜가 아니다. 학창시절 아시아 신기록까지 세우며 박태환급으로 주목받는 인재였지만 제 실력 믿고 훈련을 게을리 하다가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당한 후 그렇고 그런 코치가 된지 16년. 대회를 코앞에 두고도 PC방에 전세내기 일쑤인 그에게 준호는 자신의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하고, 결국 혹독한 훈련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 혹독한 훈련에 광수가 가하는 습관적인 폭력이 포함되어 있었고, 자신의 의지보다는 폭력에 대한 공포 때문에 스스로를 채찍질해서인지 준호는 '거의' 1등에 이르며 눈에 띄게 좋은 성적을 차지한다. 집안은 잔치 분위기가 되지만, 이내 동생의 천진난만한 폭로에 의해 준호가 맞아가면서 훈련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준호가 맞는 것보다 4등하는 게 더 무섭다는 엄마와 이런 상황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아빠. 과연 준호는 좋아하는 수영을 계속할 수 있을까.

<해피엔드>, <사랑니>, <은교> 같은 격정적인 영화들을 줄곧 만들어왔던 정지우 감독이 <4등>이라는 사회성 짙은 영화를 내놓았다는 것이 한편으론 의외스럽다. 그래서 <4등>도 어른의 폭력에 생채기 나는 어린 아이의 상처에 대해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으나, 영화는 오히려 그 반대다. <4등>이 좋은 영화인 이유는 극단적인 대립을 부각시키며 감정적으로 어필하지 않고 침착하고 넓은 시선으로 인물과 환경 전반을 조망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개봉했던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스포트라이트>에서도 지적했듯 하나의 사건이 아닌 시스템 전반의 문제를 건드린다. 이런 소재를 두고 대중의 공분을 손쉽게 일으키는 방법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일대일 대립 구도 위에 세워놓은 뒤, 가해자가 행하는 가혹한 행위들과 피해자가 당하는 심각한 피해들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어긋난 의식에서 비롯된 이런 가해와 피해가 어떤 파국에 이르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도 사회에 경종을 강렬하게 울리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바로잡아야 할 것이 개인의 삶이 아닌 사회의 공기라면, 대중이 하나의 사건에만 몰입하게 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이다. 이 사건만 해결되면 사회가 바로 설 수 있다는 과장된 희망을 심어주거나, 우리들 각자를 이 사건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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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행히 <4등>은 자신이 하나의 특이한 사건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짙게 깔린 관습의 일면을 다루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관객의 감정을 쉽게 일으키기 위해 극적인 일대일 대립구도와 강렬한 파국을 그리는 대신, 격앙될 수 있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큰 그림을 보기 시작한다. 화를 쉽게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게 끝이 아닌 시작일 뿐이며,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를 되짚어보면서 누가 무엇을 고칠 수 있는지를 하나하나 따져봐야 한다고 설득하는 듯 하다. 그리하여 한 개인에게 분노를 쏟아부을수 있도록 유도하는 대신, 더 오랜 역사와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분산시키며 차분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일면 가해자로 보일 수 있는 광수의 학창시절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굳이 명문화되어 있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관습적 시스템'이 형성되려면 어느 정도의 긴 시간과 복수 건의 사례가 필요하다. 준호의 윗세대라 할 수 있는 광수의 학창시절부터 보여주고, 광수 역시 지독하게도 당했던 육체적 폭력을 먼저 만나게 하면서 영화는 자신이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시간이 지나면서 축적되어 온 시스템의 문제를 얘기하려 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선언하는 셈이다. 이후 만나게 될 폭력 또한 어두운 개인으로부터 나온 사건이 아닌, 시간이 지나면서 수 차례 물려 받고 또 물려 주어 온 악순환의 일부임을 깨닫게 되면서, 관객은 격랑처럼 흔들리는 감정 대신 문제의 근원을 되짚어 보려는 이성에 의지하게 된다.

영화는 광수와 준호만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에 명확하게 서 있고 그 외 인물들은 관찰자로서 변두리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폭력이 당연시된 지금의 시스템에 크든 작든 기여했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시스템이라는 울타리 안에 안주하게 된 이상, 우리들 중 누구도 무고한 피해자의 자리로 도피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극도로 감정적인 폭력을 '제자를 바로잡아주려는 스승의 노력'으로 광수에게 잘못 인식시킨 광수의 스승. 대회 성적을 위해 아이의 온몸에 난 상처를 애써 외면하고, 아이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너무나 열성적으로 내던진 나머지 아이의 흔들림에 자신은 더더욱 좌절하며 어쩌면 자신의 욕망과 아이의 꿈을 동일시 했을지도 모를 준호의 엄마. 아들이 당하는 폭력에 누구보다도 분노하지만 과거 타인이 당하는 폭력은 '맞을 짓' 운운해 가며 강건너 불구경하듯 여겼던 준호의 아빠까지. 때림으로써 타인을 교정시킬 수 있고 교정의 결과만 얻을 수 있다면 과정의 아픔은 어느 정도 감내해야 한다는 폭력교육의 시스템이 형성되고 유지되는 데 이들 모두가 크고 작게 일조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쯤 되면 이들이 만든 폭력교육의 링 위에 일대일로 불러세워진 광수와 준호가 오히려 다 피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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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러한 채찍질이 낳은 결과를 '결실'로 혼동한다는 데 있다. 그 '결실'이라는 좋은 이름 아래 그 결과를 낳은 폭력의 가치 또한 애써 외면함으로써 정당화되고 만다. 어쨌든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니까 잔치를 벌일 뿐, 그 '좋은 성적'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까지에는 굳이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좋은 성적으로 이어지게 된, 전력을 다한 그 질주가 실은 폭력와 위협과 통제로 옥죄어 오는 손길로부터 애써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도 알 새가 없다. 꿈이 폭력적으로 통제되고 그 통제로부터 벗어나려는 절박한 몸부림이 오히려 좋은 성적을 낳는 아이러니라니. 줄곧 침착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4등>은 꿈의 진짜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 이 대목에서 시의적절하게 영화적인 재간을 발휘한다. 수영장이라는 공간이 레인이 설치되면 경쟁의 공간이 되지만 레일이 없어지는 순간 목욕탕과도 다름없는 공간이 됨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이미지가 그 대표적인 예다. 레인 위에서 쫓기듯 역영하게 되는 치열한 훈련의 공간이었다가, 끊임없이 빛과 물을 탐색해 나가는 자유로운 꿈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이미지를 통해 영화는 꿈이라는 것이 일직선 방향으로의 질주가 아닌 다양한 방향으로의 탐색을 통해 발견되는 것이라 이야기한다. 통제가 낳은 질주는 어쩌면 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꿈으로부터 탈출하련느 몸부림이 될 수 있음을, 정해지지 않은 방향으로의 탐색이 오히려 자신의 꿈을 확신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음을 말한다.

이렇듯 <4등>은 넓게 분포한 사회 문제의 현상과 원인을 두루 살펴보면서도,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됐을까?'라고 한탄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여기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라는 건설적인 고민으로 나아간다. 이를 위해 <4등>은 진중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무거운 분위기를 지향하기를 거부한다. 현상을 침착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수준 이상의 진지한 분위기로 관객을 몰고 가지 않는다. 상황이 좀 심각해지려는 순간에 이르면 일부러 상황의 무게를 일정 부분 덜어내는 코믹한 상황을 연출할 정도다. 과한 무게를 덜어냄으로써 이 이야기가 유별난 사건사고가 아닌 다사다난한 우리 일상의 한 단면으로 비치게끔 하는 것이다. 덕분에 관객은 과도하게 몰입하거나 슬픔이나 분노와 같은 정서적인 충격을 받는 대신, 현상의 흐름과 인물들의 행동, 그 변화 과정을 좀 더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다더라'는 어투가 아닌 '당신도 이런 일, 이런 감정 한번 겪어본 적 없는지?'라는 어투가 관객이 수동적으로 감정이입하게 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해하며 판단하게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라도 해당될 수 있는 이야기를 다양한 인물을 통해 그려내기에, 어느 인물도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를 위해서 절대악이나 무기력한 주변인 같은 식으로 소모적인 희생을 당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되풀이되어 온 폭력과 통제의 악순환에서 자유롭지 않은 각자의 희망과 그림자가 골고루 모습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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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의 독자성은 물론 많지 않은 예산을 극복한 훌륭한 비주얼, 배우들의 생기 있는 연기까지, <4등>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제작으로 만들어진 메시지 전파 용도의 영화를 넘어서 예술로서의 영화로 손색없는 완성도를 보인다. 준호에게 어떨 때는 하루하루를 옥죄어 오는 억압적인 장소가 되고, 어떨 때는 조심스럽게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해 주는 너른 품이 되기도 하는 수영장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영상미는 일품이다. 영화가 한국 사회의 아픈 단면을 건드리면서도 미래지향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게 하는 강렬한 매개체로서 수영장의 푸른 빛이 화면에 가득 넘실거린다. 사실적이고 인간적인 배우들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왕년엔 유망주였지만 지금은 폭력코치가 된 광수 역의 박해준 배우는 악의가 잔뜩 들어갈 수도 있었을 캐릭터에 후회와 상처, 성찰의 모습을 불어넣으며 인간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등수에 대한 압박으로 꿈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되는 준호 역의 유재상 배우는 폭력적인 통제에 힘겨워 하면서도 결국 자기 꿈의 생명력을 지켜나가는 아이의 모습을 또랑또랑하게 연기한다. 아이의 대회 성적에 지독하게 집착하는 엄마 역의 이항나 배우는 한껏 과장될 수 있었을 캐릭터를 유난스럽지만 그만큼 지극한 보통의 엄마로 보이게 하며 캐릭터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폭력적 교육의 문제를 과거에는 방관하다 자기 자식의 상황에 와서야 그 심각성을 느끼는 아빠 역을 현실적으로 풀어내는 최무성 배우, 영화 초반 능글맞은 감정 표현과 사실적인 사투리 연기로 광수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의 기반을 확실히 깔아주는 정가람 배우까지. 처음 볼 땐 낯설다 할지라도 보고 나면 잊기 힘들 배우들이다.

실은 억압과 통제의 기제인 폭력을 자극제라 여기는 스승들도, 남부끄럽지 않은 결과를 위해 부끄러운 과정도 불사할 수 있다는 부모들도, 그런 어른들의 태도에 의해 순수한 꿈과 열정을 의심받는 아이들도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다만 영화가 들어야 마땅한 메시지만 담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4등>은 메시지와 솜씨, 통찰력과 배려가 어우러져 해야 할 이야기를 보고 싶은 영화의 형태로 만들어낸 보기 드문 영화다. 일방적인 질주 대신 자발적인 유영이 준호에게 빛나는 순간을 선사하듯, 꿈을 발견하고 노력하는 사람들과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 그 누구나의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아픈 순간들에 씁쓸해하고 살며시 비치는 희망에 웃다 보면 <4등>이 전하는 목소리는 우리에게 주입되지 않고 자연히 스며들 것이다. 굳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국가인권위원회는 결과적으로 <해피엔드> 이후 정지우 감독의 최고작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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