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진만 Feb 19. 2023

내가 끝났다고 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3 - <카운트>

<카운트>(2023)


1988년 서울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 박시헌 선수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카운트>는 제작단계에서 '미친개'라고 불리는 복싱선수 출신 학생주임 선생님이 제자들을 모아 복싱부를 만든다는 이야기 정도로 알려져 있었지만, 실은 '비운의 금메달리스트'로 불린 선수의 실화가 바탕이 되어 웃음과 활기는 물론 따뜻하고 건강한 메시지까지 담긴 영화가 되었습니다. 시간적 배경에 걸맞게 물씬 풍기는 레트로 감성과 그 무렵 청춘물의 색깔을 변주하거나 진화하기보다 그대로 재현한 것에 가까운 영화라 누군가에겐 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동안 우리가 잊었거나 멀리했던 감수성과 다시 만난 느낌이 들어 반가웠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아니 '내가 끝났다고 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이 스포츠 청춘영화의 고전적 메시지는 새삼 반갑습니다.


1998년 진해 한 고등학교의 학생주임 교사 박시헌(진선규)은 사실 10년 전 서울올림픽의 복싱 금메달리스트였습니다. 그러나 그 금메달은 경기에서의 열세 뒤 선뜻 이해할 수 없는 판정 끝에 나온 것이어서 편파판정 논란이 거세게 일어났고, 그 판정의 '수혜자'로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그로 인한 혜택을 입게 되었다는 이유로 시헌은 세간의 지탄 속에 선수생활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누구도 바라지 않은, 어떤 계산이 작용했는지 모를 편파판정의 굴레로 인해 영광이었을 순간을 평생 주홍글씨처럼 안고 살게 된 그는 이후 남은 인생에서 복싱이라는 글자를 아예 지우고 살아가려 안간힘을 쓰던 중이었고, 그렇게 교사로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던 거죠. 그런데 어느날 교장(고창석)의 등쌀에 못이겨 마지못해 고등부 복싱 대회 참관 자리에 끌려 나온 시헌은, 그곳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편파판정으로 인해 고개를 떨구어야만 했던 고등부 선수 윤우(성유빈)를 발견하고 심경의 변화를 겪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떨쳐내리라 다짐했던 복싱을 향한 꿈의 불씨를, 지도자의 길을 통해 다시금 틔워보고픈 마음이 생긴 것이죠. 편파판정의 여파로 윤우는 때마침 시헌의 학교로 전학을 오고, 시헌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윤우를 제대로 키워보려 다가갑니다. 시헌은 자신에게 복싱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세상에서 제일 가는 'XX끼'가 될 거라고 어그로를 끌던 반항아 환주(장동주)와, 서울에서 전학 와 불량한 친구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호신술이 절실해 보이는 복안(김민호) 등 급우 몇을 더 모아 계획에 없던 복싱부를 꾸립니다. 함께 아픈 시간들을 겪었을 아내 일선(오나라)의 반대와 교장의 만류 속에서도 시헌의 마이웨이 기질은 복싱부 신설과 운영에도 여지없이 발휘되고, 고된 훈련 끝에 시헌과 복싱부의 행보는 점점 눈에 띄는 결과를 가져오기 시작합니다.


<카운트>(2023)


<카운트>의 모티브가 되는 실존인물 박시헌 선수는 실제로 서울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의 마지막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편파판정의 수혜자로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가짜 금메달리스트'로 낙인찍혀 그 길로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복싱인으로서의 행보를 묵묵히 걸어온 끝에 결국 올림픽 국가대표 감독까지 맡았고 현재도 서귀포시청 복싱팀 감독으로서 박시헌 '감독'의 복싱 인생은 계속되고 있는데요, 아마도 이 영화가 다루는 진해 고등학교 교사 당시가 그 시작이었을 겁니다. 영화나 만화, 드라마 등 영상물에서 복싱은 으레 처절한 스포츠로 그려지게 마련이고, 이 영화의 실제 모티브가 된 인물의 사연도 무척 안타깝지만 이런 실존인물의 현실 행보를 알고 있어서인지 영화는 어둡고 처절한 기운은 완전히 배제하고 희망과 긍정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영화 속 시헌과 윤우 등 인물들이 마주해야 했던 고달픈 현실이 나타나긴 하나 다운됐다고도 카운트를 세면 이내 일어나는 복서처럼 영화도 그 현실에서 허우적대기를 거부하고 곧바로 국면을 전환해 극복할 에너지를 비축해 나가죠. 영화는 극중 인물의 이름도 실존인물의 것을 그대로 쓸 정도로 실존인물의 사연을 주인공의 서사에 충실히 녹이면서도, 실제 사연의 그림자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도록 인물에 뚜렷한 캐릭터를 부여하고 과하지 않은 코믹함을 곁들여 따뜻한 인간미를 살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싱을 향한 꿈에 진심인 윤우, 내면의 나약함을 과장된 어그로에 감춘 듯한 환주, 주먹을 내지르며 두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복안 등 시헌이 이끄는 복싱부 인물들 개개인의 개성 또한 살아 있고 이들의 호흡도 무척 좋아 복고풍 하이틴 코미디로서의 접근도 잘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가운데 복싱 경기 장면에 대한 묘사도 꽤 만족스러웠는데, 보통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지게 마련인 복싱의 처절한 느낌이 아니라 빠르고 리드미컬한 스텝 속에서 교차하는 가드와 펀치를 섬세함과 절도, 힘을 고루 포착한 시각적 연출로 보여줍니다. 그 덕에 복싱 경기가 펼쳐지는 사각의 링은 물러설 곳 없는 이들의 절박한 싸움이 아닌, 좌절을 딛고 이제 막 비상하려는 젊음의 장이 됩니다.


<카운트>가 더욱 활기를 띤 영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시헌과 윤우를 위시한 복싱부 아이들의 관계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시헌은 더없이 믿음직스러운 스승으로서 복싱부 아이들을 이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일방적으로 교훈을 주는 존재만은 아닙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복싱을 향한 꿈을 놓지 않으며 자신을 증명하려는 윤우는 한때 좌절에 익숙했던 시헌을 다시 깨우치게 하고, 그렇게 형성되는 좋은 에너지는 오합지졸 같았던 복싱부를 한마음으로 움직이게 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에너지를 전하고 받기에 이르죠. 영화는 1998년 당시를 살뜰하게 재현한 이미지들과 거의 청춘 영화들에서 자주 보았던 무척 익숙한 장면들을 통해 그렇게 선순환되는 꿈과 젊음의 에너지를 선사하는데, 극 전개의 완성도를 보자면 무척 성기고 도식적이라고 할 수 있음에도 보는 사람에게까지 느껴지는 연출과 연기의 해사한 에너지 덕에 그런 흠결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넘기게 됩니다. 인물들의 의지와 에너지를 보여주는 데 집중하다 보니 그들이 복싱에 그토록 진심인 이유인지를 더 절실히 느끼게 해줄 개인적인 서사는 상대적으로 얕게 다뤄지지만 그냥 어쩌라고, 보고 나서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싶습니다. 많은 경우에 기분이 기술을 이깁니다.


<카운트>(2023)


악역과의 대결보다 구성원들이 함께 성장해가며 이뤄가는 성취 그 자체에서 오는 쾌감이 큰 이런 청춘 스포츠물은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호흡이 가장 중요한데, 진선규 배우를 필두로 한 <카운트>에서의 배우들의 호흡은 보는 내내 흐뭇했습니다. 주인공 박시헌 역을 맡으며 영화에서 처음으로 원톱 주연을 맡은 진선규 배우는, 예전 연극에서부터도 믿고 봐 왔지만 이번 영화에 예사롭지 않은 에너지와 보편적 인간미를 함께 담은 연기를 선보이며 극을 믿음직스럽게 이끌어갑니다. 오나라 배우 역시 때로 시헌과 맞서지만 늘 시헌을 잡아주고 지지해주는 강단 확실한 아내 일선을 단단하게 그려내고요, 교장 역의 고창석 배우는 보통 이런 장르의 영화에서 으레 방해꾼으로 나올 교장 캐릭터를 푸근한 지원군으로 그리며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한편 복싱부의 리더이자 시헌이 다시 꿈을 꾸게 한 일등공신이랄 수 있는 윤우 역의 성유빈 배우는 속내를 쉽게 비추지 않으면서도 그 마음 속 응어리와 꿈을 향한 의지를 복싱으로 표출해내려는, 응원하고픈 소년의 모습을 절제된 연기와 고난도의 복싱 스턴트로 보여주며 역시 믿고 보는 유망주 배우로서의 활약을 이어갑니다. 자신의 강함을 인정받고 싶어 복싱을 시작한 후 비로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깨달아가는, 미워할 수 없는 '양아치' 환주를 연기한 장동주 배우는 거침없는 에너지와 섬세함 감정 연기로 극에 탄력을 더해주는 인물을 만들어 갑니다. 복싱으로 소심함을 극복해 나가는 복안 역의 김민호 배우는 성장해 가는 복안의 실력과 품성을 역시 디테일한 몸 연기로 표현하며 웃음을 줍니다.


영화의 제목인 '카운트'는 우리가 아는 바로 그 '복싱 경기 중 다운된 선수에게 심판이 보내는 카운트'를 의미합니다. 이를 두고 영화에서는 넘어졌다고 끝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일어설 수 있는 10초의 시간이 주어진다고 이야기하죠. 이렇듯 끝이라는 건 우리의 상황보다도 우리의 판단에 달려 있는 것일테고,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라는 어느 명대사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끝났다고 하는 순간 끝난 거다. 우리가 끝났다고 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카운트>는 모르고 부족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선하고 활기찬 이들이 끝을 선언하길 거부하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누군가에겐 낭만을 사치처럼 여기게 마련인 요즘 감성에 안맞는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겐 낭만이 메마른 요즘 시대에 단비처럼도 느껴질 것인데, 저에게는 후자에 해당하는 영화였습니다.


<카운트>(2023)


매거진의 이전글 예술의 거탑과 권력의 모래성 사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