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3 - <더 웨일>
3월에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강력한 남우주연상 후보작으로 꼽히는 영화답게,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신작 <더 웨일>은 무엇보다도 우여곡절 끝에 스크린에 컴백한 주연 배우 브렌든 프레이저의 인생 연기로 가장 먼저 인상을 남길 영화입니다. 그러면서도 그토록 빛나는 연기를 동반하여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전작들에 이어 비추는 자기파괴적인 인간상을 통해, 파괴가 구원으로 이어지는 생의 찬란한 아이러니를 들여다 보게 하는 영화는 비극과 희열을 공존케 하며 쉬이 설명할 수 없는 감흥을 안깁니다.
대학 강사 찰리(브렌든 프레이저)는 8년 전 아내 메리(사만다 모튼)와 8살 딸 엘리를 두고 사랑을 찾아 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렬히 사랑했던 남자의 비극적인 죽음 후, 찰리는 슬픔과 죄책감 속에 자신을 놓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치 스스로를 침잠시키듯 세상을 거부하며 칩거하던 그는 272kg의 거구가 되어 집밖으로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가는 것도 거부한 채 모니터 속 얼굴 없는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만 몰두하는 그에게, 간병인이자 유일한 친구인 리즈(홍 차우)는 이대로라면 일주일 뒤에 죽게 될 것이라 걱정 섞인 경고를 보냅니다. 점점 나빠지는 몸 상태에 끝이 머지않았음을 예감한 찰리는 8년 간 만나지 못한 딸 엘리(세이디 싱크)를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버린 아빠를 향한 분노와 증오로 가득찬 엘리는 매번 험한 말을 쏘아붙이며 찰리를 코너로 몰아붙입니다. 어쩌면 자신 때문에 그렇게 됐을지도 모르는 엘리가 실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찰리는 엘리로 하여금 꼭 깨닫게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에세이 하나만 잘못 되면 낙제 위기라는 엘리에게 찰리는 매일 찾아와 에세이 한 편을 완성하면 모아둔 전 재산을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여기에 불현듯 찾아온 선교사 청년 토마스(타이 심킨스)까지 찰리에겐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구원의 일주일을 함께 합니다.
극작가 사무엘 D. 헌터의 동명 연극이 원작으로 그가 각본 역시 맡은 <더 웨일>은 그래서인지 매우 연극적인 구성을 띠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신체적 제약으로 인해 집 외의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없는 처지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인물들의 시점을 취하지도 않으며, 오직 집 안에 있는 찰리의 시점만을 견지하는 가운데 찰리를 제외하고 고작 5명의 인물(그마저도 한 명은 거의 목소리 출연인)만 드나드는 찰리의 집안에서 흘러가는 일주일의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를 보는 건지 연극을 보는 건지 헷갈릴 정도입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찰리와 다른 인물들 간에 축적되어 온 과거의 곡진한 서사가 암시되지만, 그 또한 대사 몇 마디나 찰나의 플래시백으로만 단편적으로 나타날 뿐 지금 인물들이 존재하는 찰리의 집 안에서 서사와 감정 모두가 전개되죠. 그러다 보니 배우의 연기가 감정은 물론 서사까지 이루는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 될텐데, 이 부분은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장기이기도 합니다. 출세작 <레퀴엠>부터 <레슬러>, <블랙 스완>, 이 영화 <더 웨일>까지 여러 작품에서 출연 배우들을 아카데미 후보에 올리거나 수상케 할 만큼 연기 디렉팅에 일가견이 있기도 하고, 그만큼 드라마틱하다 못해 극단적인 캐릭터를 곧잘 구현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구현된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대다수가 자기파괴적이었습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육신은 물론 영혼까지도 분쇄시키길 마다하지 않는 그들은 때로는 파멸로, 때로는 구원으로 향했죠. 이 영화 속 찰리는 아마도 후자에 속할텐데, 파괴가 어떻게 구원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 영화는 일면 납득되는 아이러니로 답합니다.
찰리는 '구원 같은 거 관심 없다'고 선언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것에 대한 기대는 애초에 접은 듯 합니다. 대신 스스로에겐 이미 멀어진 듯한 그 구원의 끈을 자신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엇나가려는 딸 엘리에게 건네려 하죠. 그것은 어쩌면 숭고한 부성애라기보다 자신의 지난 잘못에 대한 때늦은 참회와 스스로를 향한 단죄의 발로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랑을 좇아 떠났던 이기적인 과거는 그 분노와 증오를 생각보다 무척 견고하게 쌓아올렸고, 그에게 쓰라린 생채기로 돌아옵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과거의 실수로 소원해졌던 아버지와 딸이 눈물겨운 화해 속에 아름다운 작별을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드높은 감정의 벽 앞에서 또 주저앉는 찰리의 모습처럼 구원은 내가 하겠다고 해서 이룰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인 듯 합니다. 오히려 사람과 사람 사이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사고처럼 찾아오는, 인과를 장담할 수 없는 것에 가까운 듯 하죠. 그러니 감독은 절박한 만큼 더 파괴가 분명해 보이는 결말로 달려가는 인물을 통해, 이것이 꼭 절망이기만 한 건지 묻습니다. 파멸일지 구원일지 그 향방이 불확실한 파괴의 행보 속에서 다만 확실한 것은 인간이 품은 필연적인 측은지심이며, 그러므로 마음의 문은 필연적으로 열릴 것이며 침잠하려던 자아는 본능적으로 수면 위로 치솟을 것이라고 말하죠. 태산 같은 몸집을 한 고래의 몸부림은 그만큼 어렵고 무거운 것이지만, 그 크기만큼 거대한 무지개를 만들며 대양을 일렁이게 할지도 모릅니다.
연극적인 구성 속에서 단 여섯 명의 배우들만이 등장하며 빼어난 연기 경연을 펼치지만, 역시 그 중심에는 브렌든 프레이저가 있습니다. 25년 전 '미이라' 시리즈 속 쾌남 모험가의 이미지가 여전히 강한 그가 오로지 연기로 이토록 강력하게 마음을 흔든 것은 처음인 듯 합니다. 그 옛날 잘생긴 모험가의 모습은 완전히 지워낸 채, 삶을 놓아가는 나날 속에서 파괴되어 가는 자신을 방관하는 동시에 또 다른 구원을 간절히 희망하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무거운 분장을 뚫고서 활화산처럼 솟구치며 관객을 에워쌉니다. 어쩌면 그의 모습을 비웃는 표현이었을지 모를 '고래'라는 존재의 거대함과 찬란함에 점차 가까워지는 인간의 초상으로 끝내 많은 관객들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고야 마는 그의 연기는 과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유력 후보로 손색이 없습니다. 한편 찰리가 너무나 사랑하고 동시에 너무나 어려워 하는 딸 엘리 역의 세이디 싱크 역시 빛나는 호연을 보여줍니다. 반항인지 악의인지 혼동될 정도의 분노와 증오를 품었지만 아빠의 모습 앞에 고뇌를 겪는 딸의 모습을 당차게 그려내죠. 단순한 간병인 이상의 관계로 찰리의 곁에 머무는 리즈 역의 홍 차우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 신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야무지게 찰리를 챙기는 한편, 그 행위를 통해 가슴 속에 진 응어리를 애써 잊으려는 복잡한 속내를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저의가 궁금한 선교사 토마스 역의 타이 심킨스(<아이언 맨 3>의 그 꼬마입니다)와 찰리의 아내 메리 역의 사만다 모튼까지, 연기 구멍이 있어서도 안되고 찾아볼 수도 없는 모든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까지 영화는 연극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고래란 자고로 드넓은 바다에서 원없이 유영해야 하거늘 이 고래 같은 남자는 집안에만 은둔한 채 잠깐의 움직임조차 버거운 매일을 보내지만, 비바람치는 창가에서 새들을 찾던 그의 눈빛이 말하듯 가라앉은 육체가 곧 영혼의 죽음까지 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침잠을 이겨내고 끝내 구원의 지점으로 도약하는 '고래'의 여정은, 작달막한 집이라는 공간의 한계를 넘어선 감동을 줍니다. 마치 수면을 박차고 나와 태양을 향해 뛰어오르는 고래를 보며 경탄하듯이 말이죠. 이 영화가 선사하는 그 귀한 경험을 일구어내는 배우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어떤 연기는 누군가에게 구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이렇듯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집요한 연출과 브렌든 프레이저의 간절한 연기가 어우러진 <더 웨일>은, 내내 집안에 머물렀던 이야기가 끝난 뒤 대양 한 가운데에서 노니는 고래의 잔상을 남기며 드넓은 여운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