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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Mar 04. 2023

다녀오지 못한 모든 이들을 기억하며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3 - <스즈메의 문단속>

<스즈메의 문단속>(Suzume, 2022)
<스즈메의 문단속>(Suzume, 2022)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영혼을 '갈아넣는' 수준의 작화 연출을 보여주면서도 3년에 한 편 꼴로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작품 텀이 꽤 짧은 편입니다. 그런 가운데 선보인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가 일본 현지에서 연속으로 천만 관객을 넘어선데다 이번 <스즈메의 문단속>까지 흥행에 대성공하며 10년도 안되는 사이에 '일본 애니메이션의 기대주'에서 '일본 최고의 흥행 감독' 자리에 올랐죠. 그러면서도 이번 <스즈메의 문단속>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재난 3부작'을 완성하며 자신만의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현실의 재난을 호명하는 영화로서 어느 때보다 직관적인 이야기와 진중한 자세, 여전히 아름다운 작화 속 진보한 애니메이션 연출까지 갖추며 3부작의 대미를 의미있게 장식하는 데 손색 없는 영화입니다.


일본 규슈의 어느 한적한 마을에 사는 고교생 소녀 스즈메(하라 나노카)는 등굣길에 마을을 방문한 왠 잘생긴 낯선 남자와 마주칩니다. 마을에 폐허가 있는지 물어보기에 알려준 후 학교로 가려고 했지만 그 남자가 자꾸 눈에 밟혀 스즈메는 남자에게 가르쳐준 폐허를 찾아가는데, 그곳엔 휑한 폐허의 한 가운데 문 하나만 세워져 있을 뿐입니다. 문을 여니 문 너머에 있는 건 볼 수 있으나 들어갈 수 없는 낯선 세계. 그리고는 고양이 형상의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이는데, 무심코 그 비석을 뽑은 스즈메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합니다. 궁금증만을 안고 학교로 돌아간 스즈메는, 창밖으로 다른 이들은 볼 수 없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폐허 방향에서 뻗어나가는 것을 목격합니다. 황급히 폐허로 다시 향한 스즈메가 발견한 것은 문 밖으로 쏟아지고 있는 알 수 없는 기운과 그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남자의 모습. 스즈메는 소타(마츠무라 호쿠토)라는 그 남자와 함께 가까스로 열린 문을 닫고 튀어나오려던 기운을 막습니다. 소타는 그 기운이 바로 '재난'인데, 자신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그 재난이 세상에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고 다니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 그들 앞에 한 줌만한 고양이가 나타나 소타를 의자로 바꿔버린 뒤 뛰쳐나가서는, 일본 곳곳의 폐허에 있는 그 재난의 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게 된 데에 자신의 책임도 있는 듯해서인지 스즈메는 의자가 된 소타와 함께 전국에 분포한 재난의 문을 닫기 위해 계획에 없던 긴 여정을 시작하고, 스즈메와 함께 사는 이모 타마키(후카츠 에리)가 행방을 알 수 없는 스즈메의 뒤를 쫓습니다.


<스즈메의 문단속>(Suzume, 2022)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이번에도 극장에서 볼 가치가 충분한 볼거리가 가득한 애니메이션으로서 <스즈메의 문단속>을 완성했습니다. 규슈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출발해 고베, 도쿄 등 일본을 횡단하는 이야기 속에서 나타나는 전원과 도심의 풍경들은 이번에도 작은 디테일 하나까지 포착해낸 비주얼 연출로 매 장면마다 캡쳐해 두고 싶은 이미지를 그야말로 '대량생산' 해냅니다. 그런 가운데 특히 돋보이는 것은 역동적인 액션 연출의 비중을 더 늘려 상당히 야심차게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영화는 전국을 돌며 열린 문을 닫아야 하는 주인공들의 모험극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에 걸맞게 액션 연출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셈이죠. 거세게 뻗어나가는 재난의 기운을 막고 문을 닫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장면이나 속도감 넘치게 달리는 자동차 장면 등, 이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정적인 애니메이션을 떠올리며 쉬이 매치되지 않는 액션 연출이 풍부하게 또 퀄리티 있게 등장합니다. 이처럼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이번 영화에서는 본연의 미학적 개성을 유지하면서 대중영화로서의 흡인력 또한 확보하려는 시도는 한층 간결해져 이해가 수월한 이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전통적 요소를 차용하곤 있지만, '재난을 세상에 들여보내려는 문을 닫으려는 이들의 이야기' 정도로 컨셉을 단순화했고, 두 남녀의 로드무비로 형식도 명료해졌습니다. 주인공들이 활동하는 범위가 일본 전역을 아우를 만큼 넓고 그 과정에서도 만나는 인물들의 수도 꽤 많은 데 비해 서사는 주로 주인공 스즈메에 집중되어 있다는 느낌이 없진 않지만, 그렇게 직관적인 노선을 유지한 덕에 후반부의 감정적 임팩트는 큽니다. 심지어 감독의 전작들에서 만날 수 있었던 특유의 넘치는 OST 연출조차도 (극중 가창 OST는 하나도 없이) 자제해 가면서, 신카이 마코토가 정성들여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에둘러 표현했던 전작의 수준을 넘어 가장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재난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에서는 감독이 현실의 어떤 일면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영향을 받았는지 포괄적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면, <스즈메의 문단속>은 후반부로 갈수록 더 큰 범위의 포괄적 해석마저 불가능할 만큼 현실의 재난을 직접적으로 대입합니다. 영화가 투영하는 현실 속 재난과 영화 속에 등장하는 '문 너머 들이닥치는 재난'의 이미지를 겹쳐볼 때 비로소 드러나는 심상은,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곳은 재난과 전혀 상관없는 곳이 아니라 재난과 한끗 차이로 떨어져 있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재난의 위험성을 경고한다기보다 재난이 남긴 트라우마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영화에서 재난이 문을 열고 튀어나오기 좋은 장소로 꼽히는 폐허라는 공간은 재난이나 기타 좋지 않은 사연으로 그곳을 드나들었던 이들의 나날을 과거로 묻어야만 했던, '돌이킬 수 없는 행복'이 현재의 슬픔으로 내려앉은 곳입니다. 사람들은 그 슬픔을 없는 척, 잊은 척 지낼 수도 있겠지만 영화 속 폐허의 공간들이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슬픔은 결코 없어진 게 아니며 사람들은 어쩌면 그 슬픔을 기억 속 저편으로 애써 흘려 보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스즈메와 소타는 그렇게 사람들이 흘려보낸 슬픔들이 모여 있는 폐허를 돌며 그 공간을 위무하고 있는 것일 겁니다. (영화에서 매 '문단속' 때마다 스즈메와 소타가 외치는 기도문은 그 의미를 하나하나 짚어낼 순 없어도 대략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스즈메의 문단속>(Suzume, 2022)


집이라는 공간에 있어서 문을 닫는 행위는 한편으로 집 밖에 나갔던 구성원이 무탈히 집으로 돌아왔다는 완결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소타는 스즈메에게 문을 닫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이 공간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장면들을 떠올리라고 하는데, 클라이맥스가 되는 '마지막 문단속' 장면에 이르면 이는 마치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문 밖으로 나선 뒤 미처 돌아오지 못한, 그래서 그들을 떠나 보내고는 여태 닫히지 못한 문을 대신 닫으며 못다한 안부인사를 건네는 의식처럼 느껴집니다. 재난과 그로 인한 상실 앞에서 무작정 슬퍼하거나 잊으려 애써 부정하는 대신 기억으로나마 대면하고 인사를 건네는 이 순간은, 끊어졌다고 생각했던 이별 저편의 존재들과 다시 마주하는 순간이자 그 마주함으로 인해 남아있는 나날들에 피어날 희망을 의미할 것입니다. 영화 속 재난의 현실 속 모티브는 명확하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은 굳이 특정 사건, 지역, 국가가 아니더라도 거대한 재난 후 상처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모두에게 그 상처와 대면하고 화해할 수 있게 하는 용기와 그로 인해 발현되는 희망,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함께 하며 가능하게 하는 이들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며 정서적 울림을 전합니다.


<너의 이름은.>에서 시작해 <날씨의 아이>를 거쳐 이번 <스즈메의 문단속>까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지속적으로 젊은 소년소녀들을 주인공 삼아 그들로 하여금 시공을 초월한 재난의 현장을 누비게 했고 그 재난으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역할을 부여해왔습니다. 그저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는 판타지로 소비될 수도 있는 주제였음에도 이 3부작이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젊음들이 마주한 곳에 재난의 그림자가 드리운 현실이 존재했고, 그 현실 앞에서 젊음을 위로하는 동시에 그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의 소유자로 여기며 응원해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재난의 현실을 탐사하고 미래를 발견하며 그 속에서 젊음을 북돋우는 여정을 비로소 매듭짓고 '문단속'하는 역할로서, <스즈메의 문단속>은 사실과 바람을 함께 담은 애니메이션의 섬세한 감수성으로 현재의 젊음을 이야기하는 감독의 주관을 더욱 또렷이 합니다.


<스즈메의 문단속>(Suzume,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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