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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Mar 15. 2023

기예르모 델 토로, 그가 천재라 불리는 이유

인상적인 영화(책) 리뷰 2023 - [기예르모 델 토로의 창작 노트]


여러 흥미로운 결과들을 낳은 이번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또 하나의 흡족한 결과는 장편 애니메이션상 부문의 수상 결과였습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으로 이미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석권한 바 있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애니메이션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로 또 다시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쥔 것입니다. 저 역시 작년 외국영화 베스트에 꼽을 정도로 무척 인상깊게 본 영화인데다 평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작품 세계를 좋아해온 터라 이번 수상이 더욱 반가웠는데요, 때마침 기예르모 델 토로의 작품 세계와 그에 관한 다채로운 기록이 담긴 책을 읽었습니다. 30년 간 축적되어 온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감에 대한 세세한 기록과 증거들을 담은 책, [기예르모 델 토로의 창작 노트]입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과 SF 작가 겸 영화/TV 드라마 각본가 겸 연출가 겸 제작자인 마크 스콧 지크리가 함께 쓴 이 크고 두툼한 책에는, 현재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 중인 시리즈가 나오기 전부터 델 토로 감독이 오랜 시간 간직하고 있었던 '호기심의 방'이 담겨 있습니다. 책의 서두는 로스엔젤레스에 위치한 델 토로 감독의 두번째 집이자 사무실인 '블리크 하우스'가 엽니다. 책은 이곳을 방문한 지크리 작가와 델 토로 감독의 대담을 통해 이곳에 델 토로 감독의 영감들, 그 영감으로 인해 탄생한 결과물이나 영감을 준 것들이 얼마나 풍성하게 담겨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들, 영화 속 캐릭터의 컨셉을 담은 조각상은 물론 감독에게 무한한 시각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림과 책들까지. 비록 책을 통한 '간접적 방문'이지만 이 블리크 하우스의 풍경은 그야말로 델 토로 감독의 '영감 덩어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단지 머릿 속 상상을 통해서만 그 모든 이야기와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영감을 자극하는 고유의 환경 속에서 작업을 지속해 나가는 감독의 준비성과 체계성에 한편으로 매우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책에서 자세하게 소개 할 델 토로 감독의 '비밀 노트'는 그 준비되고 체계적인 델 토로 감독의 '유니버스'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일테고요.



그 다음으로 책에서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작품 세계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는 순서가 이어집니다. 델 토로 감독이 영화를 만들고 스토리텔링을 구축할 때 추구하는 방식과 주관, 그가 사랑하는 호러의 대가들과 미술 작품들, 이후 찬찬히 둘러보게 될 노트가 그의 영화 세계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까지를 알 수 있죠. 익숙한 문학가들부터 난생 처음 듣는 이름의 화가까지 다양한 레퍼런스들이 언급되는데, 이를 보고 있으면 설령 그 의미를 단박에 이해할 수 없더라도 델 토로 감독이 영화 세계를 펼치기 이전에 내적으로 구축하고 있는 지식 창고가 무척 깊고 방대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책에서는 본격적으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작품 by 작품'으로 짚어 갑니다. 감독의 첫 장편 영화이자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 대상 수상으로 그를 주목받는 감독으로 만든 <크로노스>, 첫 할리우드 진출작이지만 제작사의 간섭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온전히 완성할 수 없었던 <미믹>, 이후 본토로 돌아와 만들어 평단의 호평을 받은 <악마의 등뼈>, 할리우드 커리어의 성공적인 재기를 도운 <블레이드 2>, 할리우드에서 비로소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며 나온 <헬보이>, 지금까지도 그의 최고작으로 꼽히며 그를 거장의 반열에 올린 <판의 미로>, 전작의 성공 후 보다 독창적인 관점에서 만들 수 있었던 <헬보이 2: 골든 아미>, 후속작을 둘러싼 여러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자신의 로망이 담긴 <퍼시픽 림>까지. 델 토로 감독이 매 작품을 만들면서 품었던 소회와 디테일한 크리에이티브에 관한 이야기들을 마크 스콧 지크리 작가와의 인터뷰와 그의 비밀 노트 곳곳에 담긴 그림과 기록들을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이후에 나온 <크림슨 픽>,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나이트메어 앨리>,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에 관한 이야기는 아쉽게도 나오지 않지만, 이 기록만으로도 델 토로 감독의 일관된 작품 세계와 그만이 보여주는 고유의 작업 방식을 마치 어깨 너머로 지켜보듯 가까이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심지어 이 기록만으로도 책에 나오지 않는 다음 작품들의 잔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컨셉을 설명하는 대략적인 메모부터 각 작품 속 캐릭터와 미쟝센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표현한 스케치까지, 디렉팅에 돌입하기 전에 자신이 구축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캐릭터 등 영화 전반에 있어서 얼마나 디테일한 청사진을 그리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영화를 봤다면 대번에 알 수 있는 이미지부터 그 맥락을 쉬이 알 수 없는 복잡한 메모까지 책에는 상당히 자세하게 감독의 노트 면면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을 설령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감독의 노트를 이렇게 시시콜콜하도록 자세히 살펴보는 느낌을 더해주어 좋았습니다.



책 속에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보여주는 특유의 작업 방식은 첫번째로 한번에 두 개 이상 여러 작품에 관한 작업을 병행한다는 점입니다. 그가 추구하는 작품 세계의 개성이 워낙 뛰어나서 그런지, 작품 작업을 하면서도 그 작업이 엎어질 가능성을 얼마든지 염두에 두어야 하고 그럴 때를 대비해서 다른 작품 구상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죠. 책에 등장하는 비밀 노트 속 메모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가령 <판의 미로>에 대한 내용을 담은 노트 중간중간에 그 다음에 만들어질 <헬보이 2: 골든 아미>에 관한 메모가 뒤섞여 있는 식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산된 작품의 아이디어 혹은 진행중인 작품에 쓰려 했으나 못쓰게 된 아이디어라고 해서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작품 속에서 발전적인 방향으로 활용된다는 점도 흥미로웠습니다. 가령 <블레이드 2>에 적용시키려던 뱀파이어 집단의 의상 디자인 아이디어가 무산된 대신, 몇년 뒤에 나온 <헬보이 2: 골든 아미> 속 빌런인 누아다 왕자의 의상 디자인에 적용된 것이 그 사례입니다. 



실제로 책에는 제임스 카메론 제작에 톰 크루즈 주연으로 제작에 착수했다가 무산된 것으로 유명한 <광기의 산맥>을 비롯하여 델 토로 감독의 '미완성 프로젝트'들에 대한 내용도 고스란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 <메피스토의 다리>라는 프로젝트 속에 등장하는, 날개에 수많은 눈이 달린 대천사 형상의 괴수 이미지는 가장 최근작인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속 천사 이미지를 빼다박아 놀라웠습니다. 이처럼 델 토로 감독은 매 작품을 개별적이고 단절된 프로젝트로 여기지 않고,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려는 영화 세계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요소로 여기며 그 작품들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책에는 <광기의 산맥>에 출연 예정이었던 톰 크루즈의 후기도 수록되어 있는데, 이 작품으로 델 토로 감독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그의 말처럼 이 모든 '미완성 프로젝트'는 그 명명처럼 완전히 무산된 것이 아니라 언젠가 작품으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됩니다.




개성 넘치는 판타지를 구현하면서도 따뜻한 심장을 놓치지 않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작품 세계를 평소에 좋아해 읽게 된 책이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의 작품 세계를 더욱 믿고 좋아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유의 상상력을 단지 펼쳐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구축하고 끊임없이 살을 붙이며 진화시키는 체계성과 섬세함이 이 책 [기예르모 델 토로의 창작 노트]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그의 노트처럼 세월이 갈수록 더 두터워지고 넓어지는 그의 작품 세계 속에서, 다음에 또 어떤 자궆ㅁ이 눈을 매료시키고 마음을 움직일지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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