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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Sep 28. 2023

강 건너 불구경하듯 내 마음을 볼 것인가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3 - <어파이어>

<어파이어>(Afire, 2023)


독일의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최근 몇 년 새 국내에서도 두터운 팬층을 형성하며 저명한 감독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의 새 영화인 <어파이어>는 제가 이번에 처음으로 본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 역시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수상이라는 타이틀이 불러일으키는 조바심과 달리 그리 어렵게 느껴지는 영화는 아닙니다. 지금껏 감독이 주로 만들었다는 영화의 색깔과 달리 동시대 청춘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영화는 외딴 별장과 바닷가, 그리고 청춘남녀라는 익숙한 그림 위에서 방관으로 일관하는 예술의 허영과 각성을 신랄하게 그립니다. 이는 감독이 보여주는 예술가적 반성으로도, 미숙한 삶을 사는 우리들이 마주하는 인간적 반성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인 레온(토마스 슈베르트)은 새 작품의 퇴고 작업을 위해 친구 펠릭스(랑스톤 위벨)와 함께 외딴 숲의 별장을 찾습니다. 별장의 주인인 펠릭스의 어머니가 사전에 했던 이야기와 달리 별장에는 그들 외에 이미 방 하나를 차지한 다른 손님이 있었습니다. 나디아(폴라 비어)라는 이름의 그 손님은 레온이 머무는 첫날밤부터 벽 너머에서 굳이 티내지 않아도 되는 열정적인 사생활을 드러내며 레온으로 하여금 잠을 설치게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디아가 나타날 때마다 레온의 눈길을 그녀에게 머뭅니다. 레온과 펠릭스는 이내 나디아의 파트너인 데비트(엔노 트렙스)와도 안면을 트고 특히 펠릭스는 데비트와 더 친밀한 관계로 발전해 나갑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닷가로 놀러가든, 저마다 연애사업을 전개하든 상관없이 레온은 작품 작업에 몰두하려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레온은 그 작품 작업에 온전히 몰두하는 것도 아닌 채, 수시로 한눈을 팔고 딴짓을 하기 일쑤입니다. 그렇게 네 사람이 별장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사이, 마을로 나가면 간혹 들리곤 했던 산불 소식이 점차 그들이 있는 별장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불길만큼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는 별장 안 네 사람의 운명도 산불이 번져감에 따라 그 향방을 달리 합니다.


<어파이어>(Afire, 2023)


<어파이어>는 독일 근현대사를 훑던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지난 영화들과는 사뭇 다른 색깔을 띤 영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영화가 제가 처음 본 감독의 영화라는 점에서 이 영화로 감독의 영화 세계를 정리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만, 동시대의 청춘영화 같은 외양을 하고서 고약하고도 나약한 인간의 내면을 짚어내는 통찰력은 과연 거장의 그것이구나 감탄하게 됩니다. 외딴 별장에서 우연히 만나 여름날을 보내는 청춘남녀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이를 지켜보는 관객의 속내가 복잡해지는 것은 그 주인공의 캐릭터 때문입니다. 영화는 별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네 명의 남녀 중에서도 새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골몰하는 작가 레온의 시선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레온이라는 자의 심사가 꽤나 뒤틀려 있는 것이, 그는 이 별장 안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방향으로 관계가 얽히고 사건이 설키는 와중에도 레온은 방관함은 물론 성가시게 여기기까지 합니다. 옆방에서 들리는 진한 사랑의 소리도 그에게는 호기심을 자아내긴커녕 잠을 잘 수 없어 화만 돋울 뿐입니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것들로부터 거리를 둔 채 작품 작업이라도 열심히 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으니, 수시로 한눈을 판 끝에 완성된 초고는 뜬구름 같아 혹평만 듣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레온의 그런 방관자적 태도가 자신이 품고 있는 감정을 향해서도 똑같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레온이 별장에서 나디아를 처음 본 순간 부인할 수 없는 강한 감정을 품게 되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레온은 자신의 그런 감정을 구태여 욱여넣은 채 나디아에게 종잡을 수 없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녀가 아이스크림 장사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는 그녀를 마뜩찮게 바라보다가, 그녀 역시 문학 학도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동질감 어린 눈빛을 보냅니다. 나디아를 향한 그의 감정은 그 어떤 외적 변수와 상관없이 이미 명백하게 피어올랐을텐데도, 갖은 외적 변수를 갖다 붙이며 감정의 당위성을 판단하려 합니다. 예술에 대한 허영에 사로잡힌 채 까닭이 굳이 필요없는 감정에마저도 그럴싸한 까닭을 부여하려는 그의 모습은, 별장 밖으로 한참 나가야지 들을 수 있던 산불 소식이 점점 별장 근처로 번져옴에도 괜찮다며 숲에 머무르려 하는 그들의 모습과도 오버랩됩니다. 이미 숲은 들불로 타오르는데, 불길을 등지고 한껏 몸을 웅크린 그들이 있는 별장을 숲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영화에서 숲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불은 중요한 사건으로 다뤄지지만, 영화는 그 불을 직접적으로 시각화하지 않습니다. 별장에 머무르는 이들의 시선으로 본, 붉은 아우라처럼 하늘로 뻗어나가는 빛의 파장으로 어렴풋이 그 크기를 짐작할 따름입니다. 사실 우리의 감정 또한 그처럼 명확한 형체를 하지 않고 다만 아우라처럼 뻗어나가다 이내 우리를 무섭게 잠식하기 마련인데, 눈 앞에 명확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 감정을 방관한다면 그것은 예술가로서 나아가 인간으로서 온당한 태도인가. 영화는 레온의 시선을 빌어 우리에게 묻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파이어>(Afire, 2023)


'예술가부심'에 잔뜩 경도되어 주변에서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일어나는 모든 감정에 날이 서 있으면서도 정작 제 작품은 온전히 완성하지 못하는 레온의 모습에 거리를 두게 되면서도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거기서 어쩌면 역시나 내 감정과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지독한 방관자였을지도 모를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만든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 역시 여느 보통 사람들처럼, 어느새 영화에 그런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는 걸 느꼈다고 밝혔죠.) 낭만적인 듯 하면서도 무척 신랄한 이 영화의 중심에 있는 레온 역의 토마스 슈베르트는 비교적 평범한 외양과 한껏 예민한 성미, 그러나 실은 무척 소심한 내면을 장착한 인물로서 세상 어느 곳에나 있을 법한 캐릭터를 일체의 과장 없이 솔직하게 그려냅니다. 한현 그런 레온에게 감정을 일으키는 인물이자 중요한 동기부여자가 되는 나디아 역의 폴라 비어는 별장 안에서 형성되는 다양한 관계에 직접 관여하면서도 대상화되지 않고 자기 주관을 지켜나가는 여성의 모습을 외유내강형 연기로 인상적으로 그려냅니다. 


<어파이어>는 예술은 곧 삶에 대한 탐구의 산물이라고 전제합니다. 그 전제가 옳다면, 결국 삶이 전개되는 현실 위에서야 비로소 예쑬이 설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관찰만 열심히 하고 내 욕망과 감정 앞에 솔직한 표정을 짓지 못하는 태도로부터 나오는 결실에 과연 진정성이 존재할 수 있는지. 그 진정성이 없는 예술을 예술이라 칭할 수 있는지. 자신 역시 꽤나 레온 같았다는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부인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투영하며 영화에 진정성이 살아숨쉬게 했습니다. 이렇듯 <어파이어>는 세계와 인간의 진실을 마주보지 못하는 인간의 초상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그리하여 신랄한 고백과 진솔한 성장이 공존하게 되는 영화입니다.


<어파이어>(Afire,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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