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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Nov 14. 2023

예정된 비극을 끝까지 목도하게 하는 힘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3 - <서울의 봄>


<서울의 봄>(12.12: THE DAY, 2023)


김성수 감독이 <아수라> 이후 7년 만에 내놓은 신작 영화 <서울의 봄>을 개봉 전 시사회로 미리 보았습니다. 그간 한국영화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진 적 없는, 그 유명한 '1979년 12월 12일'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한국 현대사가 이토록 파란만장했었나 새삼 실감케 하는 동시에 한국 현대사를 가지고 이토록 진진하고 울림 강한 영화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김성수 감독이 근 30년에 걸친 필모그래피를 거쳐오며 스타일이 바뀌어 가는 와중에도 변치 않은 연출의 '힘'이 가장 긍정적으로 효과를 발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영화에는, 한국 현대사들의 죄인들과 의인들의 행적을 좇는 번뜩이는 눈으로 우리의 머리와 마음 모두를 뜨겁게 합니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의 서거 후 계엄령이 내려진 대한민국. 육군 보안사령관 전두광(황정민)은 대통령 시해와 관련한 합동수사본부장 자리까지 맡게 되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를 손에 쥐고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오릅니다. 마침 전두광은 '하나회'라는 군내 사조직을 만들어 자신의 '세력'을 만들고는 그들을 군 조직 곳곳에 심어두어 영향력을 뻗어나가던 바. 상황이 이렇게 받쳐주자 전두광은 본격적으로 국가 통수권자로서의 권력을 구체적으로 꿈꾸게 됩니다. 그러나 전두광의 이런 행보에 그가 품은 욕망을 알아챈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정상호(이성민)는 그를 견제하기 위해 대쪽같은 성격으로 알려진 장군 이태신(정우성)을 육군 요직 중 하나인 수도경비사령관 자리에 앉히고, 육군 조직 개편 무렵에 전두광과 그의 하나외 구성원들을 한직으로 보낼 궁리를 합니다. 이를 귀신같이 알아챈 전두광은, 마침 대통령 시해 현장에 있었던 정상호를 사건과의 연관성 어쩌고 하며 엮고는 자신의 직속상관인 그를 체포할 계획을 세웁니다. 선배 군인들까지 동원해 자신을 비호할 세력과 자신의 명령에 따를 반란군을 조직한 전두광은 무력충돌에 살상까지 일으키며 본격적인 군사반란에 돌입합니다. 전두광 휘하 반란군은 전방에 있어야 할 공수부대까지 서울로 집결시켜 군 조직을 장악하려 하고, 이태신은 수도 서울만은 지키기 위해 반란군의 모략 속에서 외롭게 분투합니다.


<서울의 봄>(12.12: THE DAY, 2023)


<서울의 봄>의 대표적인 성취는 '12.12' 같은 넘버링 정도로 기억되던 한국 현대사 속 군사반란의 막전막후를 비로소 생생하게 그려나간다는 점입니다. 불과 45년 전에 서울이, 그것도 국군에 의해 우리나라의 최전방이 된 적이 있었다는 비현실적인 역사적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 사건 또한 복장 터지고 공분을 일으키는 현대사의 여러 페이지 중 하나이겠으나, 영화는 사건이 자아내는 감정을 있는 대로 끌어모으는 대신 사건을 최대한 꼼꼼하게 멈춤없이 재현하는 데 집중합니다. 사건의 진행 양상은 검색해 보면 크로스체크가 어렵지 않을 만큼 실제 사건에 충실하게 전개하는 사실성을 견지하는 한편, 그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의 심리는 부득이 상상에 맡기되 환경과 욕망의 조응을 통해 주도면밀하고 악착같이 추적하는 입체성 또한 확보합니다.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전개 양상을 자세히 짚어주는 자막과 화면분할, CG 효과까지 더해져 많은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촌각을 다투며 흘러가는 사건을 따라가는 것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 인물들은 장기말처럼 움직이는 데에만 만족하지 않고 저마다의 욕망과 감정을 품고 뜨겁게 돌진하며 이것이 상상 속 설계가 아니라 실존했던 역사임을 각성시키는 것이죠. 사건의 흐름은 감정부터 앞서지 않고, 그렇다고 감정을 모조리 걷어내 건조하지만도 않은 연출의 균형 덕분에 관객은 악이 승리하는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끝까지 조마조마해 하며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김성수 감독의 전작 <아수라>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여전한 연출의 에너지는 좋은데, '악인들의 지옥'이라는 컨셉을 위해 장면과 캐릭터와 이야기의 에너지가 모두 과소비되는 듯한 인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 <서울의 봄>은 감독이 지닌 그 연출의 힘이 감정과 이미지의 불필요한 소모 없이 일관된 밀도를 유지하면서 관객을 장악하는 덕에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합니다. 실제 역사가 자아내는 감정의 색깔과 농도가 명확하기에, 영화는 오히려 그 감정을 재현하는 것보다 감정이 앞서 제대로 보지 못했을지 모를 사건의 여러 국면들을 충실히 재현하는 데 돌파력을 활용하는 것이죠. 무력충돌이나 총격전 같이 시청각적 요소가 부각되는 시퀀스에서는 스피커가 떨어져나갈 듯 강력한 사운드 연출로 아수라장이 된 현장의 질감을 고스란히 살리고, 전략과 전술이 충돌하며 인물들의 심경 변화가 중시되는 시퀀스에서는 그들의 내면을 진득하게 들여다 보는 식으로요.  그 결과 허투루 쓰이는 장면도, 힘이 달리거나 넘치는 장면도 없이 140분의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관객 또한 일관되게 몰두하게 됩니다. 그 결과 도식화될 수 있는 인물들도 입체적인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명백하게 정의와 불의의 대립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이지만, 절대적 선과 악으로 정형화하기보다 욕망과 사명으로 움직이는 인물들의 묘사가 생생하게 이루어집니다. 단지 '선인이니까, 악인이니까'가 아니라 저런 성정을 지닌 인물이 저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할지 집요하게 추적한 끝에 나타나는 인물 묘사라는 게 느껴집니다.  


<서울의 봄>(12.12: THE DAY, 2023)


배우들은 그런 인물 묘사의 미션을 몸소 무결점에 가깝게 수행해내며 이른바 '연기 차력쇼'를 펼칩니다. 전두광 역의 황정민 배우는 다음 작품은 정말 선하고 경쾌한 역할이 아니면 안되겠다 싶을 정도로 역사 속 그 인물에 완전히 체화된 연기를 선보입니다. 그가 그려낸 전두광이란 인물은 흡사 뱀처럼 느껴지는데, 자신의 욕망을 위해 세상을 휘어감고 조르고 끝내는 집어삼키려는 욕망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선후배를 막론하고 상대를 옴짝달싹못하게 휘어잡는 무시무시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마저 어디까지나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인, 리더가 되어 세상을 주무르는 자신의 모습에 한껏 도취된 악인에 지나지 않는 인물의 모습을 황정민 배우는 그야말로 치가 떨리게 연기합니다. 한편 이태신 역의 정우성 배우는 인간으로서 느낄 수 밖에 없는 두려움을 떠안고 사명으로 뛰어드는 강직한 인물을 카리스마 넘치게 그려내며 팽팽한 대립각을 형성합니다. 권력을 탐하지 않고 맡은바 임무에 충실할 뿐인, 자신의 직업적 소명에 투신함으로써 국가의 운명을 걸고 욕망이 충돌하던 현장에서 외려 이상주의자가 되는 인물의 모습을 믿음직스럽게 연기해내죠. 이외에도 올곧은 성격으로 인해 전두광이 일으키는 군사반란의 최초 희생양이 되고 마는 계엄사령관 정상호 역의 이성민 배우, 전두광의 절친한 친구이자 충실한 행동대장이기도 한 노태건 역의 박해준, 절체절명의 순간에마저도 득시글거리는 조직 이기주의 속에서 소신을 지키는 헌병감 김준엽 역의 김성균 배우, 특별출연으로 적은 비중에도 존재감을 빛낸 정만식, 정해인, 이준혁 배우 등 쟁쟁한 배우들이 사건의 면면을 채웠던 실존 인물들의 초상을 힘있게 그려나가며 영화를 풍성하고 촘촘하게 채워나갑니다.


흔히 '역사가 스포'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역사물은, 특히 그 시점이 현재와 가까울수록 익히 알고 있는 결말로 향하는 만큼 '빌드업'에 무엇보다 공을 들여야 합니다. 그 공들인 빌드업이 얼마나 큰 감동을 줄 수 있는지를 우리는 <1987> 같은 영화를 통해 목격한 적 있죠. <1987>이 감격의 순간으로 귀결되었던 것과 달리 좌절의 순간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대비되는 길을 가긴 하지만, <서울의 봄> 역시 그 촘촘한 빌드업으로 의도한 메시지를 적확하게 전하고 관객을 강렬히 각성시킵니다. 일방적 주입과 감정적 설득이 아닌 전략적 묘사로 우리는 불과 45년 전 이 땅에 얼마나 비극적인 사건이, 얼마나 간악한 자들이, 얼마나 명예로운 군인들이 있었는지를 깨닫습니다. <서울의 봄>은 자칫 감정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는 비극을 탐구와 추적의 태도로, '배드 엔딩'에 탄식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를 끝까지 몰두 할 수 밖에 없는 저돌성으로 그린 한국 현대사 소재 영화의 역작입니다.


<서울의 봄>(12.12: THE DAY,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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