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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Dec 31. 2023

전쟁의 의미에서 발견하는 성웅의 의미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3 - <노량: 죽음의 바다>

<노량: 죽음의 바다>(Noryang: Deadly Sea, 2023)


10년 간 전개된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장군 3부작' 그 대단원인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를 보았습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순신 장군이 죽음을 맞게 되는 마지막 전투인 임진왜란 노량 해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을 다루기에 전작들과 확연히 다른 톤으로 흘러갈 거라 짐작하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에 접근하는 방식은 예상과 사뭇 달랐는데,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이라는 주제의 비극성에만 몰두하는 대신, 그가 전력을 다해 임해 온 전쟁 자체의 의미를 되짚음으로써 이순신 장군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보다 너른 관점의 해석이 인상적이었고 그런 점에서 이순신 장군에 대한 탐구의 진정성이 잘 느껴지는 영화였습니다.


임진왜란 발발 후 7년, 왜의 조선 침략을 주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기 직전 왜의 조선 철군을 명하고 이에 왜군은 황급히 퇴각을 시작합니다. 순천에 주둔 중이던 고니시(이무생)의 군도 퇴각을 하려 하지만 이순신(김윤석)이 이끄는 조선군과 진린(정재영)이 이끄는 명나라가 힘을 합한 조명연합수군의 포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이에 고니시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아리마(이규형)를 진린에게 보내 똑같이 나라를 떠나온 입장에서 진린을 구슬려 퇴로를 확보하려 합니다. 포로의 수급까지 보내오는 고니시의 공세에 진린이 고민하는 사이, 왜군은 퇴각을 위해 이름난 수장 시마즈(백윤식)가 이끄는 살마군까지 동원합니다. 고니시 측은 명에게 이것이 '약간의 무력시위' 정도가 될 것이라 했지만 시마즈의 공세는 본격적이고, 이순신은 7년간의 전쟁으로 수많은 동료들과 아들까지 잃으며 고통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이 전투에 전력으로 임할 것을 결심합니다. 왜군을 순순히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섬멸하는 것이 이 전쟁을 올바로 끝낼 수 있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노량: 죽음의 바다>(Noryang: Deadly Sea, 2023)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은 처한 시간상의 위치만큼이나 그 분위기가 꽤 명확히 구분되었습니다. 장년기의 이순신이 주인공인 <명량>은 치열한 위기극복의 서사를 제공한 한편, 보다 젊은 시기의 이순신이 주인공인 <한산: 용의 출현>은 통쾌한 액션 장르의 쾌감을 주는 데 집중했죠. 반면에 이번 <노량: 죽음의 바다>는 3부작의 대단원이자 '이순신의 죽음'이라는 사건과 마주해야만 하는 챕터이기 때문에 분위기가 판이하게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역시나 승리의 서사이겠지만 극복의 감동과 액션의 쾌감에만 몰두할 수는 없는 노릇인 거죠. 3부작 중 가장 러닝타임이 긴 <노량: 죽음의 바다>는 주요 사건인 노량 해전으로 돌입하기 전 한 시간 가까운 적지 않은 분량동안 전투의 배경과 관련하여 조곤조곤 빌드업을 해 나갑니다. 임진왜란 후반 조선과 왜, 명나라까지 얽혀 있는 정치-군사적 상황을 짚어나간 후, 그 상황 위에서 이순신 장군이 비로소 이 전쟁을 자기 손으로 끝내려고 하는지에까지 접근하죠. 시작부터 전쟁을 일으킨 자가 퇴각을 명령하니 범인의 시선으로는 이대로 두면 더 이상의 희생 없이 전쟁이 끝날 수도 있을 것 같은 흐름처럼 보이기에, 이 상황이 어째서 임진왜란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마지막 전투로 귀결되어야만 하는지를 설득하기 위함이기도 할 것입니다. 임진왜란의 끝,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을 향해 가면서 그가 이룩한 승리 못지 않게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그에게 남은 상흔입니다. 그의 아들을 비롯해 수많은 무고한 젊은 목숨들이 스러져 간 7년의 세월은, 그 대장정을 이끌어온 이순신 장군에게 단지 전쟁이라는 폭력의 고통만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무게의 죄의식과 책임감을 남겼습니다. 이름마저 잃은 그 무수한 희생이 헛되지 않게 기억되기 위해서는 적을 순순히 보내주는 것이 아니라 섬멸하는 것이 전쟁의 결말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 그래야 비로소 최후의 승리를 만든 희생으로서 그 목숨들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 이순신 장군이 느낀 책임이 아니었을까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곧 뼈아픈 아이러니이기도 하니, 그 결말에 이르기 위해서는 또 다시 셀 수 없는 희생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러니는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까지, 7년의 세월동안 만나고 헤어진 수많은 전우들의 얼굴을 하고서 그를 따라다닙니다.


영화는 이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성웅 이순신'의 의미를 길어올립니다. 단지 그가 천재적인 전략과 타고난 용기로 슈퍼히어로처럼 적들을 일망타진해서가 아니라, 전쟁의 의미와 무게를 꿰뚫고 자신이 짊어져야 할 고통을 감내하고서 희생된 목숨의 가치를 끝까지 지키려 한 리더이기에 우리가 그를 '성웅'이라 부르게 되었음을 이야기합니다. 영화에서 언급되는 '대장별'과 같이 수백년 전 그때에도 빛났을 것이고 지금도 빛나고 있는 그 이름 말이죠. 같은 편이면서도 서로 죽이거나 견제하지 못해 안달인 왜군의 모습과 비교되며 이러한 이순신 장군과 조선군의 결의는 더욱 큰 감동을 줍니다. 그렇게 비로소 성웅으로 거듭나는 이순신 장군의 궤적을 따라가는 마음으로, 영화는 90여분에 걸친 역대급 분량의 해전 장면을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례 없을 만한 규모와 파괴력으로 그야말로 '쏟아 부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입을 벌리게 합니다.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며 왜군의 대열을 거침없이 깨부수는 장면, 신기전을 이용해 왜군을 향해 화포를 때려붓는 장면 등 신선하면서도 육중한 시청각적 쾌감을 전하는 장면들이 밀도 있게 배치되어 적지 않은 시간동안 주로 밤 시간대에 전개되는 전투에 지루할 틈 없이 몰입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배와 배를 넘나들며 병사들이 백병전을 벌이는 장면들 또한 장렬하게 전개됩니다. 특히 명나라군부터 조선군까지 일반 병사들의 시점을 오가며 롱테이크로 백병전의 양상을 그려내는 장면은, 우리가 교과서나 드라마에서만 보았던 먼 옛날 역사 속 임진왜란 또한 수많은 목숨들이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스러져 가야만 했던 참혹한 살육의 현장이었음을 드러내며 뜻밖의 여운을 남깁니다. 


<노량: 죽음의 바다>(Noryang: Deadly Sea, 2023)

최민식, 박해일 배우에 이어 세번째 이순신 장군을 연기한 김윤석 배우의 조용한 카리스마 또한 영화를 만족스런 대단원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치열한 극복의 서사를 담았던 최민식 배우와 과묵한 지략의 쾌감을 그려냈던 박해일 배우에 이어, 김윤석 배우의 이순신 장군은 켜켜이 쌓인 전쟁의 상처를 오롯이 홀로 감내하고 최후의 전투 앞에서 병사들의 의지에 마지막까지 울림을 주려는 리더의 책임의식을 묵직하게 전합니다. 초반엔 다소 무던한 듯 하던 연기의 터치가 마지막으로 향해 가는 이순신 장군의 복잡다단해지는 내면과 함께 뒤로 갈수록 깊어질 때 역시 김윤석 배우의 저력을 실감하게 됩니다. 한편 이순신 장군의 최후 적수인 왜군의 수장 시마즈 역의 백윤식 배우는, 당연히 섬멸해야 할 절대악의 위치에 있지만 우스꽝스럽거나 과장되어 있지 않고 실재했을 법한 좌중을 압도하는 장악력을 자랑하며 이순신 장군 최후의 적이라는 입지에 걸맞은 활약을 펼칩니다. 지원군의 리더로서 이순신 장군과 인상적인 관계를 맺는 명군 도독 진린 역의 정재영 배우와 등자룡 역의 허준호 배우는, 언어의 벽을 뚫고 의리와 우정으로 전투의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참리더들의 카리스마를 믿음직스럽게 보여줍니다. 이외에도 이순신 장군의 곁을 마지막까지 지키는 송희립 역의 최덕문 배우, 이운룡 역의 박훈 배우, 항왜로서 주어진 임무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준사 역의 김성규 배우, 왜군 고니시 역의 이무생 배우, 아리마 역의 이규형 배우, 모리아츠 역의 박명훈 배우 등 굵직한 연기력을 지닌 배우들이 포진하여 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의 서사를 풍성하면서도 깊이 있게 재현합니다.


<명량>부터 시작해 10년에 걸쳐 선보여 온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으로서 <노량: 죽음의 바다>가 완벽히 훌륭한 영화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한 탐구 의지와 존경심이 함께 깃든 결과물이다 보니 탐구한 것을 되짚으면서 동시에 교훈 또한 전하려는 과정에서 다소 늘어지는 부분이 있고, 그 마음이 엔딩 크레딧 이후 쿠키 영상에서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교육적인 마무리는 호불호를 크게 탈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이라는 한국사 속 불세출의 영웅을 평면적으로 예찬하는 것을 넘어서 그의 업적을 영화적으로 장쾌하게 구현하고, 그의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 보는 것을 함께 시도했고 영화적으로 이를 육중한 무게감으로 어느 정도 성공해 냈다는 점에서 <노량: 죽음의 바다>는 3부작의 마무리로 비교적 만족스러운 영화가 되었습니다. 


<노량: 죽음의 바다>(Noryang: Deadly Sea,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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